설교제목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교환예배 (서울주교좌 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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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창세기 11:1-9/ 사도행전 2:1-4, 16-21/ 요한복음서 14:8-17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19-06-09 |
전주 | 오소서, 성령이여 (D. Buxtehude) |
찬양1부 | 거룩한 주 성령 (George. F. Handel)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찬양2부 | 거룩한 주 성령 (George. F. Handel)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Toccata in G (T. Dubois) |
후주2부 | Toccata in G (T. Dubois) |
성경본문 |
창세기 11:1-9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주님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사도행전 2:1-4, 16-21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또 나는 위로 하늘에 놀라운 일을 나타내고, 아래로 땅에 징조를 나타낼 것이니, 곧 피와 불과 자욱한 연기이다. 주님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오기 전에, 해는 변해서 어두움이 되고, 달은 변해서 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서 14:8-17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
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교회력에 따른 성령강림주일이자, 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과 한국기독교 장로회의 경동교회가 교환예배를 시작한지 19년이 되는 날입니다. 해마다 한번 씩 두 교회가 미사와 예배를 교환하여 드림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립니다.
성서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엡 1,23).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의 지체인 교회의 일치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어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7,21). 그리스도인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완전한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로써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요 17,23). 다시 말해 교회의 일치는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임을 알고, 믿게 하는 선교적 과제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천 년 동안의 교회의 역사는 일치의 역사라기보다는 다툼과 분열의 역사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다툼과 교회의 분열은 선교의 ‘걸림돌’(스칸달론)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선교의 ‘디딤돌’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일치, 곧 ‘오이쿠메네’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요한이 꿈꾼 교회의 일치는 교회의 기구적 통합과 수직적 통치구조, 그리고 교리적 통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런 인위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는 인류의 언어가 왜 서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렇게 많은 언어로 분열되었는지에 대한 원인론적 설화입니다. 바벨탑 이야기에 의하면, 하나의 언어로 통합된 인류가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여, 이름을 날리고, 흩어지지 않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여 인간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되기를, 다시 말해 마침내 신(神)이 되기를 원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여, 온 땅으로 흩으셨고, 그래서 그곳 이름을 바벨, 아카드어로 ‘신의 문’, 히브리어로는 ‘혼란’을 의미하는 바벨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창 11,1-9).
그것이 언어건 조직체이건, 무엇이든지 위로부터 아래로, 획일적으로 통합될 경우, 매우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상징적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고, 오직 하나의 집단이 힘을 가지면, 다른 언어, 다른 집단에게 배타적이 되고, 독점은 차별과 억압의 도구로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충분히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에서 하늘로 치솟는 탑과 함께 하나의 언어를 흩으신 것이지요. 그러나 언어가 뒤섞이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면, 소통의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초대교회는 성령강림 사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강림 사건은 방언의 은사, 다시 말해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 경험되었습니다. 오순절, 제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불길이 각 사람 위에 내려앉자, 사람들이 여러 지방의 말로 하나님의 큰 일들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습니다(행 2,1-11).
성령의 은사는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 주어졌고, 그 능력을 힘입어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큰 일들을 여러 지방의 말로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은 소통과 증언의 영이라는 뜻이지요.
2. 그런데 요한에 의하면,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보혜사이자 진리의 영입니다(요 14,26).
‘보혜사’(保惠師), 곧 ‘지켜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스승’으로 번역된 ‘파라클레토스’의 문자적 의미는 ‘옆에 있도록 불린 자’입니다. ‘파라’는 ‘옆에’라는 의미이고, ‘클레토스’는 ‘불린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를 위해 옆에 있도록 불린 자’라는 말인데, 법정 용어로는 ‘변호사’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변호사’ 외에 ‘위로자’(comforter), ‘중재자’(intercessor), ‘협조자’(helper) 등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에게 성령은 지금 우리와 영으로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지키시고, 변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말이지요.
요한에 의하면 보혜사 성령은 또한 ‘진리의 영’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진리’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로 번역된 헬라어 ‘알레테이아’(aletheia)는 ‘덮여있는 것(letheia)’에 부정의 접두사 ‘a’를 붙인 것이어서, ‘덮여있지 않은 것’, 다시 말해, ‘숨어있는 것을 드러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란 무엇인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요한이 진리를 세계와 사물을 움직이는 보편타당한 원리나 법칙으로 이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동일시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요 14,6-7a)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길과 진리, 생명이신 것은,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서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숨어계신 하나님을 드러내신다는 의미에서 진리이지요. 빌립이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요 14,8)라고 말했을 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답변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예수님 자신이 진리임을, 다시 말해 숨어계신 하나님의 계시임을 뒷받침하지요.
그러므로 숨어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길이면서 목표이고, 목표이면서 길입니다. 길과 목표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길은 목표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이 아닙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괴테(J.W.Goethe,1749-1832)의 파우스트 박사(Dr. Faust)가 한 말의 의미가 아닙니다. 스토아 학파가 말한 것처럼 ‘항상 힘써 노력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은 명백하게 십자가의 길입니다. 길과 생명, 십자가와 부활은 길이자 동시에 목표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값싼 은혜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 없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 14,6)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독교적 구원의 배타적 근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시고, 십자가의 길 없이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보혜사이자 진리의 영으로 길 위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계신 것입니다.
3. 진리의 영, 성령은 ‘덮여있는 것을 드러내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는 진리의 영과 거짓 영을 구별하는 능력일 것입니다.
이제 ‘가짜 뉴스’는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가짜뉴스를 생산하여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언론 자체에 대한 불신도 심각합니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명문장을 남겼지만, 정작 그 자신은 ‘신문에 실린 것들은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진실 그 자체도 신문이라는 오염된 매체에 실리는 순간 수상해 보인다.’는 편지를 남겼습니다.
200년도 넘은 시대의 증언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에도 언론 자체가 불신을 받는 것은 옛날처럼 언론이 권력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업적 이익과 광고료 수입 때문에 공정성과 객관성을 스스로 상실한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가짜 뉴스를 생산하고, 팩트를 감추면서 거짓을 진실처럼 보도하는 시대,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세상,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 시대의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을 드러내는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요 14,1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을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기준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가셔서 보내시는 성령을 힘입어,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을 하는 것, 설령 그것이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인도한다고 해도 그 일을 하게 하는 것, 그것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때,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 곁에 함께 계시면서 힘이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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