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일곱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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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베레스 웃사
성경구절 사무엘기하 6:1-11/ 로마서 7:15-25/ 마가복음서 9:50
설교자 배영호 목사
예배일 2019-07-28
전주 주여 우리에게 힘을 주소서(J. A. Guilain)
찬양1부 위대하신 주(A. V. Boex)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주가 축복하리라(Meredith Willson)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W. G. Cooper)
후주2부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J. Marsh)
성경본문 사무엘기하 6:1-11
다윗이 다시 이스라엘에서 정병 삼만 명을 징집하여서, 그들을 모두 이끌고 유다의 바알라로 올라갔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올 생각이었다. 그 궤는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부르는 궤였다. 그들이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꺼내서, 새 수레에 싣고 나올 때에,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히요가 그 새 수레를 몰았다.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히요는 궤 앞에서 걸었고, 다윗과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은, 온 힘을 다하여서, 잣나무로 만든 온갖 악기와 수금과 거문고를 타며, 소구와 꽹과리와 심벌즈를 치면서, 주님 앞에서 기뻐하였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들이 뛰어서 궤가 떨어지려고 하였으므로, 웃사가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궤를 꼭 붙들었는데, 주 하나님이 웃사에게 진노하셔서 거기에서 그를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다. 주님께서 그렇게 급격히 웃사를 벌하셨으므로, 다윗이 화를 내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베레스 웃사라고 한다. 그 날 다윗은 이 일 때문에 주님이 무서워서 "이래서야 내가 어떻게 주님의 궤를 내가 있는 곳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다윗은 주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지 않고,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실어 가게 하였다. 그래서 주님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서 석 달 동안 머물렀는데, 그 때에 주님께서 오벳에돔과 그의 온 집안에 복을 내려 주셨다.

로마서 7:15-2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서 9: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구약성서시대 이스라엘의 왕정시대가 시작된 이후 두 번째 왕이 된 다윗은 30살에 즉위하여 40년을 통치하였습니다. 다윗은 왕정시대가 열리기 전 12지파 동맹체로 지내오던 사사시대를 마무리하고 남북을 하나로 묶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었습니다. 하여 다윗의 시대를 통일왕국시대라고 합니다. 다윗의 통일왕국 시대 이스라엘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요단 강 동편의 모압 땅과 서편으로는 지중해 연안까지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애굽의 시내 반도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끝부분인 유브라데 서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야말로 가나안 전 지역을 장악한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안정되었고 특히 종교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신앙은 확고했습니다.

 

이렇틋 이스라엘의 태평성대를 연 다윗이었지만 그가 왕이 된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세습 왕이 아닙니다. 군사들을 모아 왕위를 찬탈한 왕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왕위에 추대된 왕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된 사울이 그 초심을 잃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 하나님은 한낱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에 불과했던 십대 소년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년 다윗의 머리에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기름을 부어 구별하신 후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며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사울 왕의 궁중악사로 들어가 수금을 연주하며 궁중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사울 왕의 집요한 질투와 미움으로 비롯된 살해 시도를 피해 도망자가 됩니다. 후에 다윗은 자신의 군사 600명과 함께 지역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16개월을 보내는 것을 포함하여 근 10년 넘게 이 곳 저 곳을 떠돌아다닙니다. 이 기간 사울 왕과 친구 요나단이 죽는 슬픔을 안고 마침내 예루살렘 남쪽 헤브론에 정착합니다. 그리고 이 곳 유대 지파의 지지를 받아 유대의 왕이 됩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지만 아직은 반쪽짜리 왕입니다. 헤브론에서 유대의 왕이 되어 76개월 동안 유대를 다스린 후 마침내 그의 나이 30세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다윗은 베들레헴의 목자로 시작하여 궁중악사로 사울 왕의 총애를 받았고,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죽이고 사람들의 갈채를 받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울 왕에게 쫓기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적대관계에 있던 블레셋 아기스 왕의 신하가 되기도 하였으며, 용병으로 많은 전쟁을 치루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입니다. 이 기간 다윗은 한 인간으로서 질투와 미움, 사랑과 우정, 배신과 음모, 권력과 돈,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전쟁과 평화, 죽는 것과 죽이는 것의 실상과 허상을 온전히 몸으로 체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무상하고 허망한 것들인지도 알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의 마음에 흔들지 않고 자리 잡은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왕이 되는 과정에서 다윗이 맞닥트렸던 온갖 시련과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통일왕국의 왕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인도하심입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압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루살렘에 도성을 정한 다윗은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궁리하다가 잃어버린 법궤를 찾아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법궤, 언약궤라고도 합니다.

법궤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현실적으로 확인하는 하나의 상징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실존하시고 또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에 나갈 때 법궤를 앞세워 나갔습니다. 법궤를 앞세우고 전쟁에 나가면 이스라엘 백성은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법궤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닙니다. 법궤는 물리적으로는 커다란 상자일 뿐 사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법궤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법궤를 앞세워 전쟁에 나가면 그 법궤 때문에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사무엘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대패하였습니다. 법궤를 블레셋 군사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 제사장이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는 이야기는 잘 아시지요.

 

이렇게 이스라엘로부터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 군사는 그 법궤를 자신들의 신상인 다곤 신상 옆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전쟁에서 이긴 전리품으로 취급하여 그들의 다곤 신에게 바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세워져있던 다곤 신상이 법궤 앞에 엎드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 다곤 신상을 일으켜 제자리에 세워두었는데 또 그 다음날 보니 전날과 똑같이 다곤 신상이 엎드려져 있습니다. 얼굴은 땅에 닿았고, 머리는 잘려져 나가고, 두 손목은 끊어진 채 몸뚱이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법궤가 있던 블레셋 지역의 아스돗 지방에 전염병이 퍼져 그 지방에 살던 모든 블레셋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에 안 되겠다싶어 블레셋 사람들이 의논한 결과, 법궤를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고, 법궤를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로 돌려보냈습니다. 블레셋 땅에 법궤가 있은 지, 7개월 만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이스라엘로 돌아온 법궤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경계지역인 기릿여아림이라는 지역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기릿여아림이라는 지역은 변방이었고,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은 레위인으로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법궤는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20년을 머물게 됩니다. 이것은 아직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과거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한 이후 법궤를 상실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여기 기릿여아림에 하나님의 법궤가 머무른 20년은 고난과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의 일입니다. 그 후 다윗이 왕이 되어 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명실공히 예루살렘을 새로운 예배 중심지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고 또 실행에 옮겼습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하기 위해 새 수레를 준비하고 이스라엘의 최 정예병 3만 명을 동원하여 법궤를 앞뒤로 호위하게 했습니다. 아비나답의 두 아들 중 아효는 앞에서 수레를 끌고 웃사는 수레 곁을 따라갑니다. 뿐만 아니라 법궤 앞에서 악사들이 여러 가지 악기로 연주를 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정성을 다하여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 오는데, 얼마쯤 이동하였을까? 법궤가 실린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무슨 까닭인지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어올라 수레에 있던 법궤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수레 옆에 있던 웃사가 손으로 법궤를 붙잡아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나님의 법궤를 손으로 만진 웃사가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죽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베레스 웃사곧 하나님께서 웃사를 침이라는 뜻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이 일로 다윗은 너무나 놀라고 무서워서 이래서야 내가 어떻게 여호와의 법궤를 내가 있는 곳으로 옮겨갈 수 있겠는가?”하며 법궤를 옮기는 것을 중단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법궤를 그 근방에 사는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실어 가 그 집에 보관하도록 하고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오벳에돔의 집에 법궤는 3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주시어 그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성서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신앙적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신앙적 성찰과 사유를 가져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행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20년 동안 시골 변방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겠다는 다윗의 생각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어쩌면 법궤의 존재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기억에서 잊혀져버리고 말 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법궤를 예루살렘 성에 보관함으로써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여주려는 다윗의 신앙은 분명 칭찬받아 마땅할 일입니다. 또 그 옛날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그랬듯이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중심으로 통일왕국 이스라엘을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공동체로 세워가고 싶은 희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희망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지요. 다윗의 신앙도, 다윗의 희망도 다 좋은 것 이었으나, 문제는 그 신앙. 그 믿음의 표현이 결코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법궤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할진데 그 법궤를 옮기는 것에 대해서 성서는 그 방법과 규례를 매우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25:13-15, 4:15, 7:9, 역상 15:14-15)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에 의하면 법궤를 옮길 때에는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스러운 것에 대한 경외심을 지적하는 것일 겁니다. 또 반드시 레위사람들로 하여금 법궤에 붙어있는 네 고리에 채를 끼운 후 그 채를 어깨에 메고 옮기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구별과 성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 법궤는 수레가 아니라 사람이 직접 옮기도록 되어있습니다. 다윗이 새 수레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효율적일 수는 있었지만 비인격적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 하나님 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법궤를 옮기는 이 모든 방법이 말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은 사람들의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겸손히 법궤를 옮기는 법도를 배워야 했고, 또 그 하나님의 법에 따라 마땅히 법궤를 옮겨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말씀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알고도 그랬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 다윗은 자신의 생각과 마음만을 앞세웠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옴으로서 예루살렘 도성을 정치, 종교, 사회, 문화, 군사적 측면에서 다윗 왕권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전략적 결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 왕권을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상징인 이 법궤를 통해 보장받고 싶은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윗 자신의 왕권을 지켜주신다는 것을 이스라엘 내외에 선언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겠단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윗의 믿음과 희망을 넘어 욕망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잘 알려지지 않은 변방의 한 마을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 위해 갖춘 모든 준비와 행위는 단지 다윗의 최선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우리 사람의 노력과 정성과 열심, 또 자신의 믿음과 행위를 인정받고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는 노력, 그것은 사람들의 최선일 수는 있겠으나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최고의 행위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려분!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수레에서 떨어지려는 수레를 손으로 만졌다가 갑작스럽게 죽은 웃사의 죽음을 바라보는 성도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웃사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생각 드십니까? 아니면 운명이다 생각되십니까?

 

웃사가 수레에서 떨어지는 법궤를 손으로 만진 행위는 조건반사적인 행동이 아니라 법궤를 다루는 평소의 그의 습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레위인 이었던 웃사는 법궤를 옮기는 방법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웃사는 그 방법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사람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하는 법궤가 수레에 실려 이동할 때 그 옆을 따라가며 웃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자신이 법궤를 지키고 있으며 더 나아가 법궤 안에 든 하나님을 돌본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잘 다듬어진 대리석이나, 아주 귀한 나무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상자 안에 보관되어져 계실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웃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데 전념하지 않고 상자 안에 보관된 하나님을 돌본다고 생각하는 평소의 생각과 습관이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는 순간 손을 뻗쳐 법궤를 막아보려는 행위로 드러난 것입니다. ()스러움에 대한 경외심도, 성별과 구별에 대한 조심함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돌보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신앙은 그 누구든 내가 하나님을 지키고 보호한다는 착각에 빠져 세속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목적이 옳고 바른 것이라면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수단과 방법도 정당하고 옳아야 합니다. 과정이 목적을 합리화 시킬 수 없습니다. 목적이 분명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면 그 과정도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적 행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들의 일상의 성화이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모두 마음으로는 선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의 속사람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일을 합니다. 우리들 겉 사람의 모습니다.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선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선한 믿음을 제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생각하고 또 행하는 그것은 욕망입니다. 우리들 속사람은 목적을 지향하지만 겉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중요시 합니다. 명분을 내세우고 상황을 살핍니다. 우리의 믿음은 분명 하나님의 법을 따라 선한 일을 뜻하고 계획하는 데 어느새 우리 안의 욕망이 하나님의 법을 누르고, 믿음을 누르고, 죄의 법 곧 욕망에 따라 가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하며 탄식했던 것입니다.

우리들 속사람과 겉 사람의 충돌과 갈등,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의 갈등과 대립, 믿음과 욕망 사이에서의 갈등과 모순 이것을 해결하는 것 그 방법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평화를 누립니다.

다윗도, 사도 바울도, 오늘 우리도 믿음과 욕망사이에서 갈등하고 충돌합니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입니다.

 

둘째, 우리 사람은 참으로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 스스로의 욕망으로 인하여 시험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수레에서 떨어지는 법궤를 붙잡으려고 했던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자, 그것을 보고 있던 다윗이 화를 내었다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몹시 마음에 걸렸다.’라고 했으며, 개역개정판에는 분하여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David was angry.’ 라고 했습니다.

분하여라는 히브리어 원어는 하라인데, 그것은 괘씸한 마음을 품거나, 섭섭한 감정을 지니는 것 정도 이상의 것으로써, 온 몸과 심장이 타버릴 듯한극도의 분노를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왜 다윗은 화가 났을까요? 도대체 다윗이 화가 난 까닭이 무엇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다윗 자신의 계획이 무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뜻과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 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하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과 노력과 정성을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결과가 웃사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일단락되자 다윗은 하나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는 원망의 마음이 하나님께 투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의 잘못에 정말 정직하지 못합니다. 잘못된 신앙으로 비롯된 어떤 비극이나 불행을 우리는 나의 잘못된 신앙, 나의 잘못된 신앙행위나 삶으로부터 비롯된 것에서 그 이유를 찾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눈앞에 나타난 불행이나 비극, 그 자체를 못마땅해 하고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건데하며 그 원인을 다른 것에 투사하려고 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람이)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시험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1:13-15)”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들 스스로의 욕망에 이끌려 시험에 빠져 사망에 이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지성적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이 주는 중요한 신앙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기릿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동안 머물러 있었으나 지난 20년 동안 아비나답의 집에는 별 변동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다가 웃사가 죽게 되자, 법궤를 옮기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이 법궤를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에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법궤가 오벳에돔의 집에 3개월 동안 머무는 동안,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벳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셨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슨 이유일까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어째서 아비나답은 20년 동안이나 자신의 집에 법궤를 모시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했는데, 20년의 80분의 1인 단지 3개월, 그 짧은 시간 법궤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있던 오벳에돔은 어떻게 그 자신과 그의 온 집안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이방인이 말입니다. ‘가드 사람이란 말은 가드 출신블레셋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가드 사람은 적대적 관계입니다.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20년 이지만 아비나답이 법궤를 모시는 것은 그 에게는 이었습니다. 아비나답은 레위인 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레위지파를 구별하고 선택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선택된 지파요 구별된 레위인일지라도 그 선택과 구별이 무조건 하나님의 축복을 보장받는 것은 아닙니다. 기쁨과 감사로, 소명과 사명감으로, 은혜와 영광으로 감당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아비나답은 비록 레위인 이었지만 다만 의무로써 하나님의 법궤를 모셨습니다. 기쁨도 감사도 없습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명감도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감도 없습니다. 값없이 주신 은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비나답에게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하지만 아비나답은 그 축복의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반면에 가드 사람 오벳에돔은 기쁨과 감격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모셨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된 하나님의 법궤를 마음과 정성을 다해 모셨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다함없는 축복입니다.

 

기쁨과 감격이 없는 해야 하기 때문에하는 일, 그것은 안 하는 것 보다야 분명 낫겠지 만 결코 오벳에돔이 받았던 하나님의 축복, 그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인간관계 더 나아가 우리들의 모든 일상적 삶과 사회생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것은 슬픈 삶입니다. 그래서 해야 하기때문에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기꺼이, 마음 내켜하는 믿음의 신앙생활이 이루어질 때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따뜻한 축복이 우리들 삶을 감싸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시간이 문제가 아니고,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남녀의 성별, 사회적 지위와 신분의 고하, 학식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또 소유의 많고 적음, 이 곳이냐 저 곳이냐, 오늘이냐 내일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믿음의 자세와 태도로 하나님을 섬기느냐하는 마음가짐의 문제 옳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신실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신실하심으로 대하시고, 흠 없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간교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절묘하심을 보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연약한 백성은 구하여 주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십니다. , 주님, 진실로 주님은 내 등불을 밝히십니다. 주 나의 하나님은 나의 어둠을 밝히십니다.”(시편 18: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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