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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생명 평화 기행문 (최효정 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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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생명 평화 기행문

- 지각(知覺): 생명, 평화,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다.

최효정

오키나와 생명평화 기행 가기 전, ‘오키나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바로 ‘동양의 하와이’였습니다. 미디어의 영향 때문인지 오키나와 나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푸르른 바다를 보고 있다 보면 ‘동양의 하와이’ 라는 말이 꼭 알맞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느긋한 분위기와 그 별칭 이면에는 전쟁의 참혹함이 숨어있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의 첫 일정은 카카즈타카다이 공원이었습니다. 카카즈타카다이 공원으로 가는 동안, 기노완센터 목사님께서 오키나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 이후, 1945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정부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오키나와의 미군기지가 출격기지로 사용되었으며, 한국전쟁 후에는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키나와의 역사적 이야기를 듣고 나니, 우리나라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목사님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듣다 보니 어느새 공원에 도착해있었습니다. 카카즈타카다이 공원은 해발 92m의 낮은 언덕이지만 후덴마 미군기지가 한눈에 들어오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주 방어선이었으며 미군의 격전지였습니다. 공원에서 전쟁 당시 사용한 땅굴들을 보며 전쟁의 생생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원에는 조선인 희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가 있었으나, 희생하는 사람들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만 담겨있을 뿐, 일본군이 조선인을 징용한 것에 대한 반성과 전쟁에 대한 반성은 어디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분노를 느꼈지만, 그 분노는 금세 안타까움으로 변했습니다. 공원의 전망대에 올라 후덴마 미군기지를 보며, 오키나와 섬 중심에 미군기지가 있어 오키나와 시민들이 이동할 때에 불편함을 느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전투기가 자주 다니는 걸 실제로 목격하면서 그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분노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며 공원에서 내려왔습니다. 다시 버스로 돌아가는 길에 놀이터에서 놀던 일본 어린이들을 마주쳤습니다. 그 아이들의 해맑게 “Bye, Bye”하고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순수하고 해맑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자라나길 소망했습니다. 카카즈타카다이 공원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서 버스를 타고 기노완센터로 향했습니다. 기노완센터는 아늑한 분위기였고, 그곳의 선생님들께서 경동교회 신우들과 청년들을 반갑게 맞이해주셨습니다. 방배정을 받고서 짐을 정리하고 다같이 세미나실에 모여 여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안전하게 오키나와에 도착할 수 있게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일정까지 마친 후, 둘째 날에 진행될 일정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둘째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일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기노완센터에서 준비해주신 아침을 먹었습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서 도카시키 섬으로 가는 배를 타러 갔습니다. 처음에는 도카시키 섬 가는 도중에 고래를 볼 수도 있다는 말에 설레는 마음으로 배를 탔으나, 뱃멀미가 심해 가만히 앉아서 가는 것마저 힘들었습니다. 오전에는 날이 많이 흐려서 아쉽게도 고래를 볼 수 없었고,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겨우 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도카시키 섬에서는 서쪽 전망대, 동쪽 전망대, 집단자결지터, 배봉기 할머니 빨간기와집터, 아리랑비를 둘러보았습니다. 도카시키 섬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도카시키 섬과 얽힌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해들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가 본격적으로 발발하기 전, 미군은 조사를 통해 류큐 왕국이 도카시키 섬의 활발한 해역을 활용하여 중국과 교류한 것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러한 점을 활용하고자 도카시키 섬에 상륙했습니다. 일본군은 미군이 상륙한 이후에 뒤늦게 도카시키섬으로 오게 되었고, 진지 구축을 위해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였습니다. 도카시키 섬 주민들은 일본군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일본군들은 오히려 도카시키 섬 주민들에게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지 말고 집단 자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나서 국가가 국민들을 보호하지 않고 권력과 패권이 생명보다 우위였을 그 당시 상황들이 안타깝게 느껴졌고, 더 이상 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카시키 섬에서의 투어가 끝난 다음에는 다시 배를 타고 오키나와 본섬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길에는 정말 운이 좋게도 고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미디어에서만 접했던 고래를 직접 보니 자연의 신비를 느낄 수 있었고, 이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약 30분가량의 고래 투어가 끝난 후, 다시 버스를 타고 히메유리 평화기념 자료관으로 이동했습니다. 히메유리 평화 기념 자료관에서는 오키나와 전투 때 히메유리 학도대로서 오키나와의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이 동원된 일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10대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제대로 수업도 듣지 못하고 전쟁에 학도병으로 지내야 했다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자유롭게 기념관에서 관람을 하고서 나하국제거리로 갔습니다. 나하국제거리에서는 조별로 자유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오키나와에서 버스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길어서 일본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기 어려웠는데, 나하국제거리로 나오니 그제서야 제가 오키나와에 왔다는 것이 실감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조인 신우회 친구들, 청년부 교우들과 같이 국제거리를 둘러보며, 오키나와 현지식을 먹으러 갔습니다. 같이 저녁을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보니 나이를 떠나 서로 가까워지며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달콤한 자유시간을 즐기고서 저녁기도회를 위해 기노완센터로 돌아갔습니다. 2일차 저녁기도회는 조별로 시간을 보냈고, 서로 돌아가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에 대한 소감을 나누었고, 서로에 대해 더 잘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일정이 다 끝난 이후에는 시간 되는 청년들끼리 모여 밤새 이야기 꽃을 피웠고, 청년부 교우들 간의 친목을 도모했습니다. 그렇게 2일차에는 생명과 평화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는 기회와 신우회, 청년부들이 서로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셋째날의 첫 일정은 오키나와 대학 헬기추락 현장 방문이었습니다. 오키나와 대학에 헬기가 추락했을 당시, 방학이라 다행히도 학생들은 없어서 인명피해가 있진 않았지만, 오키나와 대학이 사립대학이었기에 피해상황에 대한 예산 지원이 확실하지 않아서 오키나와 대학 학생들의 불만이 많았고, 다음 세대 학생들에게도 헬기 추락 사고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건물의 일부는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는 헬기가 배움의 장소에 떨어진 것이 불만이었고, 헬기 추락사고, 초등학교 비행기 추락사고 경험으로 트라우마가 생겨 혹여나 또 추락사고가 일어나지 않을지 매일 걱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가이드 선생님의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미군 기지가 들어서면서 미군 측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에 대한 피해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오키나와 사람들은 미군에 대해 더더욱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실제로 오키나와에서 지내는 동안 전투기 지나가는 소리를 자주 들었기에 늘 불안에 떨며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키나와 대학 헬기 추락 현장을 보고 나서는 사키마 미술관에 갔습니다. 사키마 미술관에서는 마루키 이리, 마루키 토시 부부가 그린 오키나와 전의 그림이라는 작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 본토에서도 공습전이 있었지만 지상전은 없었고, 오키나와에서는 지상전이 일어났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공습전뿐만 아니라 지상전도 함께 진행되어 내 눈 앞에서 나를 죽이려는 적이 보이고, 공격성, 살의, 비명을 겪으며 처참하게 진행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지옥과도 같은 상황에서 살아남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전후 27년 동안 본토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고, 미군을 통치를 받아 부당한 일을 당해도 어떻게 해결할 방안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오키나와의 얘기를 듣게된 마루키 이리, 마루키 토시 부부는 오키나와의 비애를 그려 오키나와 전투의 참상을 기억하기 위해 작품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실제로 봤을 때는 작품의 크기가 커 그 크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품 속 사람들의 몸짓과 표정에서 처절함이 고스란히 느껴졌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만 눈동자가 제대로 그려져 있어서 아이들이 미래이며 진실의 눈으로 오키나와 전투를 보고 평화를 위해 행할 수 있는 존재로 표현했다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시간 관계상 미술관의 모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작가들이 세상에 던지고 싶은 메세지를 그림에 담아낼 수 있다는 예술의 가치와 의의에 대해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키마 미술관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나서 헤노코 농성장으로 갔습니다. 헤노코 농성장에서는 미군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재일교포 선생님을 만나뵈었습니다. 헤노코 기지가 생기게 된 원인은 1995년 9월 미군의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이었습니다. 그 당시 범인을 잡았으나 일본 정부도, 오키나와 정부도 범인을 송치시킬 수 없었고 미군은 군 활동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미 해병대는 성폭행 사건에 대해 초등학생 아이들이 운이 없었다고 말하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를 본 오키나와 주민들은 분노했고, 미군은 그러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후텐마 기지를 폐쇄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미군은 후테만 기지의 대책으로 헤노코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으나 지역주민들의 저항과 오키나와의 내외부 노력으로 인해 비행장이 건설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70%의 오키나와 현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현 지사의 권한을 빼았고 기지 공사를 진행하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나라에서 발생했었던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가 떠올랐고, 미군의 주둔 이유와 민주주의 국가에서 동맹국의 군대가 더 우위에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문과 동시에 국립외교원에서 2주간 들었던 대학생 외교 연수 수업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한미동맹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전투기 소음 문제로 인해 종종 미군과 마찰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나라도 일본도 국민과 미군 간의 마찰이 생겼을 때 국내정치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어떻게 잘 해결하면 좋을지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외교, 동맹, 국제관계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면서 만좌모로 갔습니다. 드넓은 바다와 절벽을 보며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만좌모에서도 오키나와 전투와 관련된 얘기를 들었고, 다들 고된 일정으로 많이 지쳐있었기에 여유를 즐기러 호시노 반탄 카페로 이동했습니다. 호시노 반탄 카페에서는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져 있어 멍하니 경치를 바라봤습니다. 다들 마음 맞는 사람들과 오순도순 모여 수다를 떨었습니다. 여유를 만끽하고나서는 무라사키무라 랜턴 페스티벌에 갔습니다. 랜턴 페스티벌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나라별로 다 다른 랜턴의 디자인도 보고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추억들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기노완센터로 돌아와 저녁기도회를 드렸습니다. 3일차 기도회는 애찬식으로 진행되었고 다들 경건한 마음으로 애찬식에 참여했습니다. 애찬식이 끝난 이후에는 한 명씩 돌아가며 이번 오키나와 생명 평화 기향에 대한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저마다 느낀 것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신우회와 청년부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좋았다고 해서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이번 기행을 통해 신우회와 청년들이 더 돈독해질 수 있었고, 경동교회 안에서 하나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이 감명 깊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게 아쉬워서 신우회는 신우회끼리, 청년부 교우는 교우들끼리 삼삼오오 모였습니다. 서로 신앙생활에 대한 고민도 나누고 평소 가지고 있었던 고민들을 하나 둘씩 털어놓으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진솔한 얘기를 하다 보니 날이 밝았습니다.

 그렇게 밤을 새고서 주일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주일예배가 끝난 후에는 오키나와에서 마지막 일정으로 강가라 계곡 트래킹을 갔습니다. 원시림 같았던 강가라 계곡에서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었고,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해주시는 가이드 선생님 덕분에 강가라 계곡과 얽힌 역사에 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트래킹이 끝난 이후에는 다같이 고기 먹으러 갔습니다. 점심 식사 때는 한 번도 말을 나누지 못했던 사람들끼리 모여 같이 식사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맛있는 것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니 서로에 대해 더 잘 알아갈 수 있었고, 두루두루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서 귀국하기 위해 공항에 갔습니다. 지연되는 비행기로 인해 수속이 늦어져서 예상보다 늦게 비행기를 탔지만, 무사히 귀국했습니다.

 오키나와 생명 평화 기행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중에 일어났던 오키나와 전투에 대해 알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느껴야했던 오키나와 주민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내전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사람들이 떠올라 지금 우리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번 기행을 통해 신우회 친구들과 청년부 교우들과 가까워지며 서로 깊은 얘기를 나누다보니 신앙생활을 할 때 왜 공동체가 중요한지 깨닫게 되어 오키나와 생명 평화 기행은 제게 있어 뜻깊은 수련회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고, 모태신앙인으로서 받은 공동체에 대한 상처를 회복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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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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