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첫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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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하나님의 말씀이 희망이다
성경구절 예레미야서 1:11-12/ 빌레몬서 1:8-20/ 요한복음서 15:5-10
설교자 배영호 목사
예배일 2020-09-06
전주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여(J. Pachelbel)
찬양1부 Ave Verum Corpus(W. A. Mozart) 특주: 최정헌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지휘자
반주자
후주1부 온 천하 만물 우러러(G. Slate)
후주2부
성경본문 예레미야서 1:11-12
주님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예레미야야,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 내가 대답하였다. "저는 살구나무 가지를 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바로 보았다.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지켜 보고 있다."

빌레몬서 1:8-20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주 담대하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사이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그대에게 간청을 하려고 합니다. 나 바울은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요, 이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로 또한 갇힌 몸입니다.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 나는 그를 내 곁에 두고 내가 복음을 위하여 갇혀 있는 동안에 그대를 대신해서 나에게 시중들게 하고 싶었으나,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대가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지 않고, 자진해서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잠시 동안 그대를 떠난 것은, 아마 그대로 하여금 영원히 그를 데리고 있게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는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그대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나에게 그러하다면, 그대에게는 육신으로나 주님 안에서나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생각하면,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아 주십시오. 그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내 앞으로 달아놓아 주십시오. 나 바울이 친필로 이것을 씁니다. 내가 그것을 갚아 주겠습니다. 그대가 오늘의 그대가 된 것이 나에게 빚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호의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마음에 생기를 넣어 주십시오.

요한복음서 15:5-10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그 해 1220, 동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 흥남에 매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 ()라는 미국 국적의 화물선 한 척이 들어갑니다. 이 화물선에는 흥남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대 항공단에 공급할 제트연료 10만 톤이 선적해 있었습니다. 그때 흥남 앞바다에는 무수한 종류의 기뢰가 매설되어 있었는데 만약 이 기뢰에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모두가 끝장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30대 중반인 미국인 선장 레너드 라루(Leonard P. Larue, 1914-2001)는 이 사실도 모른 채 무식하다면 용감하다고 이 배를 흥남 부두에 정박시킵니다. 정박된 이 배에 올라 탄 미 해군 대령이 흥남 철수가 시작되고 있으니 배에 싣고 있는 기름을 하역할 상황이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대신 흥남 부두에 있는 한국인 피난민을 실어달라고 요청합니다.

 

레너드 선장은 대령님! 이 배의 승선 정원은 47명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대령은 아무 말 없이 배에서 내립니다. 브릿지에서 레너드 선장이 쌍안경으로 흥남부두를 보자 거기에는 처참한 몰골의 한국인 피난민들이 모여 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과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이지요. 그 뒤에는 중공군의 대포소리가 가까이 울리면서 우리 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음을 알립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레너드 선장은 무릎을 끊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한 30분쯤 지나 선장은 부하 선원에게 말합니다. “사람을 태우십시오. 타고자하는 사람들 모두, 모두 다 태우십시오.” 그렇게 해서 이 배에 탄 사람이 얼마였을까요? 자그만치 14천명입니다.

 

다음 날 새벽 배가 부두를 떠났는데 선원 한 사람이 선장에게 묻습니다. “선장님, 이 배에 몇 명이 타고 있는 줄 아십니까?” 선장이 “14천명 아닌가?”하자 선원이 웃으면서 아니요, 지금 이 배는 141명이 타고 있습니다. 방금 한 여인이 아이를 낳았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141명의 한국인 피난민을 태운 배는 영하 20도의 눈보라치는 흥남 항구를 떠나 사흘 후인 1224일 거제도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제도의 주민들이 이 배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히 주먹밥을 만들어 부두에 나와서 배에 타고 있던 한국인 피난민들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레너드 선장은 눈물을 흘리면서 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했답니다. 레너드 선장은 그 해 1950, 미국으로 돌아가 베데딕트 수도원의 수사가 되어 마리너스(Marinus)라는 이름으로 50년 동안 미국 뉴튼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사로 헌신하다가 2001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생전에 레너드 선장 아니 미리너스 수사가 이 흥남 철수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물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해, 그 추운 겨울 크리스마스에 어둡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위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확신이 저에게 옵니다. 그것은 신비입니다. 사람은 어쩌면 빵과 집이 없어도, 행복과 사랑이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신비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비 말입니다.”

 

빌레몬은 소아시아의 부르기아 서남쪽에 있던 골로새 성읍에 거주하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으며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 자신의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하여 많은 사람들이 빌레몬의 집에 모여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하고 서로 떡을 떼며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참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빌레몬은 경제적 여유가 있어 어려운 사람들을 즐겨 도와주고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참 고매한 인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살고 있는 성읍과 교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의 노예인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1세기 그레코-로마시대에는 노예가 대단히 많았는데 당시 노예들은 주인의 소유물로 사고 팔수 있는 상품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어쩌다가 노예가 도망쳤다가 다시 잡혀오면 주인은 그 노예를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빌레몬의 노예인 오네시모가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도망 친 것이 아니라 주인인 빌레몬의 귀중한 물건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주인으로부터 도망간 것도 문제지만 주인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입히고 도망친 노예이니 중범죄자입니다. 이 오네시모가 로마로 도망쳤습니다. 골로새로 부터 로마까지는 자그만치 1,400입니다. 엄청나게 멀리 도망쳐 온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로마로 도망쳐 온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로마 감옥에 갇혔는데 이 감옥에서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로마로 도망친 오네시모가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난 것일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만 추측컨대 오네시모가 로마에 와서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혀 수감된 그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거나, 아니면 검문 검색중 도망친 노예라는 것이 들통이 나서 감옥에 갇혔는데 그 곳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거나 둘 중 하나 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노예였던 오네시모는 자유롭게 살아보려고 멀리멀리 도망쳤지만 결국은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로마 감옥에서 뜻하지 않게 사도 바울을 만난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날 부족과 허물로 채워진 자신의 삶을 참회하면서 속죄하는 심정으로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을 성심성의껏 보살핍니다. 이렇게 변화된 오네시모의 모습을 확인한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한 통의 편지를 써 오네시모 편으로 빌레몬에게 전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전한 편지의 내용은 한마디로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빌레몬과 그의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고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네시모를 종과 같이 대하지 말고 사랑받는 형제로 대해 달라. 빌레몬 당신이 나를 당신의 동지로 생각한다면 여기 이 오네시모를 더 이상 당신의 종이나 노예로 여기지 말고 나를 대하듯이 그를 대해주고 나를 영접하듯이 오네시모를 영접해 달라. 오네시모가 당신에게 빚진 것이 있다면 나 바울 앞으로 달아놓아 달라. 나는 오네시모를 당신에게 돌려보내는데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12:16-18) 라고 했던 것입니다.

 

분명하건데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로 주인의 재산상의 손해를 입히고 달아난 도망자요 절도범입니다. 무슨 온정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빌레몬이 당시의 법과 관습대로 처분한다 해도 원망 받을 일이 아닙니다.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은 빌레몬은 사람에 대한 사도 바울의 깊은 사랑과 신뢰에 감동받으며 또한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 울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사도 바울의 부탁대로 오네시모를 용서하였습니다.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 주었습니다. 아마도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품안에 꼬옥 안아 주었을 것이고, 오네시모 역시 빌레몬의 그 따뜻한 품에서 더할 수 없는 깊은 사랑에 감동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이제 오네시모는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자유롭게 살아보겠다고 도망친 오네시모가 우여곡절 끝에 다다른 곳이 감옥입니다. 감옥에 갇힌 오네시모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그에게는 죽음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고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이 오네시모에게 희망이 되고 생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하나님의 신비를 사람이 그 무엇으로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예언자 예레미야는 기원전 587년 자신의 조국인 남왕국 유대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패망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비운의 선지자입니다. 바벨론 제국의 군사들이 예루살렘 성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성전기구들을 약탈해 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유대 왕인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사로잡혀 두 눈이 뽑히고, 차꼬에 채여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또한 수많은 유대의 고급관료들과 기술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1,200㎞나 떨어진 바벨론 땅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레미야의 조국 유대가 패망되는 그 시점에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주시는 말씀은 한마디로 심판의 말씀입니다. 유대 이스라엘의 죄악이 너무 크고 깊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샬롬!!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건강하세요. 모든 것이 잘 될 겁니다하는 소식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꾸짖고, 심판하시고, 그 결과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언자는 자신의 뜻과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주신대로, 하나님께서 선포하라고 하신대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 선포하고 전하라고 하신 말씀 곧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듣기 싫은 말씀을 전해야 하는 그 고통에 예레미야 예언자는 머리를 감싸고 끙끙 앓습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 이스라엘이 패망할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그 유배의 세월이 자그마치 70년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라고 전해야 하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가슴은 어떻겠습니까? 답답합니다. 화가 납니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지경이 되었나, 가슴 치며 탄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이 이런 고통과 시련을 당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성전이 파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우리는 이대로 끝입니까? 이렇게 무너지고 마는 겁니까? 더 이상 희망은 없습니까? 라고 그야말로 애간장이 녹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가 멈추면 아니야! 무언가 길이 있을 거야하다가, 다시 아니야! 답이 없어. 끝이야하다가, ‘아니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그냥 내 버려두시진 않으실 거야하면서 그야말로 생각이 롤러를 탑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희망에서 절망으로, 극에서 극으로 생각이 오고갑니다. 그때마다 눈물만 나옵니다. 그렇게 예언자 예레미야는 애끊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한결같이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야말로 예레미야 예언자의 모든 관심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맛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다시금 새롭게 회복되는 가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소망이요, 기도제목이요, 그의 영성입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 환상을 보여주시며 묻습니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그러자 예레미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대답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네가 잘 보았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고난과 시련에 빠져있는 유대 이스라엘을 보면서 비통한 심정에 빠져있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살구나무 환상을 보여주시는 하나님! 도대체 하나님은 이 살구나무 환상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겨울이 가고 봄이 올 때, 이스라엘 팔레스틴 땅에서 제일 먼저 피는 꽃이 살구나무 가지에서 피는 하얀 색의 살구꽃입니다. 아직 겨울의 찬 기운에 다른 모든 나무들이 숨죽이고 있을 때, 살구나무는 잎을 내기도 전에 하얗게 핀 살구꽃으로 봄이 다가왔음을 알립니다. 그 꽃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이스라엘의 메마른 땅 전 지역으로 흩어집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이 살구꽃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회복입니다. 이스라엘이 되살아난다는 것,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희망입니다. 결코 지금 당하는 이 고통과 시련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하나님의 심판으로 유대 왕국이 몰락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의 유배 생활을 하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당하는 이 고난의 현실이 감당하기 어렵고 버겁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반드시 회복되고, 반드시 제자리를 찾고, 반드시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힘쓰고 애쓸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오늘 여러모로 고통 중에 있는 우리들을 위해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그 구원의 약속을 하나님은 지금 이 살구나무 환상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과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십니다. 가지가 살 수 있고 또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죽어 사람들은 그 가지를 불에 던져 태워버릴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머물다(한다)’라는 말은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표현인데 머물다라는 성서 헬라 말은 메노’ (mevnw)한결같은 동거를 의미합니다. 곧 어떤 일이 있어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는 것 그것이 머무는 것이요, ‘붙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문다는 것이요, 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산다는 말입니다. 왜 입니까? 말씀이 예수님의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기자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고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언합니다. 요컨대 나무와 가지는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이고 그렇게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을 때 가지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들도 나무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붙잡혀 있을 때, 그 말씀에 머물러 있을 때 믿음과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분리되어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열매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7). 이 말씀은 우리 사람들이 욕망하는 바를 다 이룰 수 있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 사람을 통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목적이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을 하나님도 포기하시지 않으실 터이고 우리 믿음의 사람 역시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신비한 연합입니다.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믿음으로 맺는 신비한 열매가 우리들 삶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창조절 절기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라는 시편 시인의 찬양과 감사의 그 고백이 똑같은 감동으로 지금 우리 가슴에 여울지기에는 솔직히 우리 마음이 많이 고단하고 지쳐 있습니다.

올 해가 시작되면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 19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사유와 생활방식 그리고 우리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련과 혼란 속으로 우리를 몰아세우고 있어 매우 당혹스럽고 불안합니다. 이 때 우리에게 희망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의 희망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성도 여러분

희망은 두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막연한 기대에서 오는 희망입니다. ‘그래 오늘 보다 내일이 나을 거야라든가 오늘쯤에나 소식이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에서 오는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언제나 우리를 속입니다. 정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희망 곧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한 희망 그것은 정직한 희망입니다. 그 희망은 한 번도 우리를 속인 적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내 삶을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체험한다는 것 그것이 신비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희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또 하는 까닭은 바로 이 정직한 희망,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약속, 그 약속에 기반한 희망, 그 희망을 믿고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엄혹한 시절에 살구나무 환상을 통해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이방 땅의 포로 신세로부터 자유와 조국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약속하십니다. 비록 주인 빌레몬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치고 도망가다가 감옥에 갇힌 노예 오네시모였지만 그는 바로 내 마음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네시모는 자유를 얻고 희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레너드 선장을 통하여, 예레미야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빌레몬을 통하여 하나님의 희망의 말씀을 보여주시고 들려주십니다. 그 말씀을 통해 141명의 한국인 피난민이, 이스라엘 백성이, 오네시모가 희망을 가지고 새 생명을 얻고 새 삶을 시작합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 희망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희망을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이제 그 희망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참으로 신비롭고 놀라운 방법으로 오늘 우리 가운데 열매 맺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삶을 일구어 갈 것입니다. 지금 척박한 이 땅과 고달픈 우리들 마음으로 은은히 잠겨 풍기는 살구꽃 향내를 조용히 눈을 감고 맡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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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2020-07-05 성령강림후 다섯째주일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채수일 목사
1028 2020-06-28 성령강림후 넷째주일    하나님을 시험한 아브라함 채수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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