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열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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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성경구절 창세기 37:1-4/ 로마서 10:5-15/ 마태복음서 14:22-33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08-09
전주 이때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아니하시면(D. Buxtehude)
찬양1부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M. W. Moody) - 특송: 유희업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내 평생에 가는 길(Arr. Daine Bish) 특송: 이재은 집사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라(H. Rinck)
후주2부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시라(H. Rinck)
성경본문 창세기 37:1-4
야곱은 자기 아버지가 몸붙여 살던 땅 곧 가나안 땅에서 살았다. 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 열일곱 살 된 소년 요셉이 아버지의 첩들인 빌하와 실바가 낳은 형들과 함께 양을 치는데, 요셉은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 이스라엘은 늘그막에 요셉을 얻었으므로,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여서, 그에게 화려한 옷을 지어서 입혔다. 형들은 아버지가 그를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요셉을 미워하며, 그에게 말 한 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다.

로마서 10:5-15
모세는 율법에 근거한 의를 두고 기록하기를 "율법을 행한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근거한 의를 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마음 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 말아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또 '누가 지옥에 내려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도 말아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서 14:22-33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서,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서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께서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 요셉은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에게서 얻은 첫 아들이었기 때문이겠지만, 야곱은 레아에게서 얻은 아들들보다 요셉을 유난히 더 사랑했고, 그래서 요셉에게 화려한 옷을 지어서 입혔다고 합니다(37,3). 편애 속에서 자란 탓인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에도 요셉은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쳤고(37,2), 당연히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며, 그에게 말 한 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37,4). 게다가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더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격분한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으나, 차마 죽이지 못하고,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스무 냥에 팔아넘겨, 요셉은 이집트 노예로 팔려갔습니다(37,28).

 

이집트까지 팔려간 요셉은 바로의 신하이자 경호대장이었던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으나,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며,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 되도록 돌보신다는 것을 알게 된 보디발은 요셉을 그의 심복으로 삼고, 집안일과 재산을 모두 그에게 맡겨 관리하게 했다고 합니다(39,4).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용모가 준수하고 잘생긴 미남’(39,6)이었던 요셉을 날마다 끈질기게유혹했으나(39,10), 요셉은 거듭하여 거절합니다. 화가 난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모함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게 하지요(39,20).

 

그러나 감옥에서도 주님은 요셉과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 주시고, 그를 한결같이 사랑하셔서, 간수장의 눈에 들게 하셨다고 합니다(39,21). 요셉은 감옥에서 바로에게 술을 올리는 시종장과 빵을 구워 올리는 시종장을 만납니다. 그런데 같은 날 밤, 이 두 시종장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요셉은 술을 바치는 시종장이 풀려날 것이라고 해몽하면서, 자기를 기억했다가 바로에게 자기 사정을 말씀드려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40,14).

술을 올리는 시종장은 요셉의 해몽대로 풀려났으나, 요셉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40,23).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해괴한 꿈이었습니다. 마음이 뒤숭숭해진 바로는 전 이집트의 마술사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들여, 그가 꾼 꿈 이야기를 했으나, 아무도 그 꿈을 해몽하여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41,8). 그 때 감옥에서 만났던 요셉을 기억해낸 시종장이 바로에게 요셉을 소개, 바로에게 불려온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몽합니다. 그것은 일곱 해 동안 큰 풍년이 들었다가, 일곱 해 동안 큰 흉년이 들터이니, ‘명철하고 슬기로운 사람을 책임자로 세워 이집트 땅을 다스리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41,29-33). 요셉의 해몽과 제안을 기쁘게 생각한 바로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을, 이 사람 말고,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느냐?’하면서(41,38), 요셉을 온 이집트 땅의 총리로 세웠습니다(41,41). 요셉의 나이 서른 살 때의 일입니다.

 

풍년이 지나고, 기근이 온 세상을 뒤덮게 되자 다른 나라 사람들도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왔습니다. 그 가운데 야곱의 아들들, 곧 요셉의 형들도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식량을 구하러 온 형들을 첩자로 몰아(42,9), 감옥에 가둔 후, 인질로 시므온을 붙잡아 두고(42,24), 나머지 형제들을 식량과 함께 고향으로 돌려보내면서, 막내 동생인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이집트로 올 것을 요구합니다. 아버지 야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근이 더욱 심해지고 가져온 식량도 떨어지자, 요셉의 형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이집트로 갑니다. 요셉의 극진한 환대를 받고 형들은 집으로 향하지만, 요셉은 사전에 계획한대로 베냐민의 자루에 자기 은잔을 몰래 넣어두었다가, 마치 도둑맞은 것처럼, 혐의를 뒤집어 씌워 베냐민을 종으로 삼겠다고 위협합니다. 형들은 막내 동생을 잃으면 아버지 야곱이 슬퍼하며 죽을 것이라며 선처를 호소하고, 마침내 북받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놀란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45,3). 그러나 요셉은 말합니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45,4-8).

 

요셉은 형들과 하나하나 다 입을 맞추고,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제야 요셉의 형들이 요셉과 말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45,15). 이 소식을 들은 바로는 요셉의 부친과 가족 모두를 이집트로 이주하게 하고, 이주한 이스라엘 자손은 고센 땅에 자리를 잡고, 재산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했다고 합니다(47,27). 요셉은 100년 하도고 십 년을 더 살면서, 자기 친족들을 돌보다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너희를 돌보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니, 그 때에 너희는 나의 뼈를 이곳에서 옮겨서, 그리로 가지고 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50, 24-26).

 

2. 이것이 성경에 전승된 대강의 요셉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열 한번 째 아들,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임신하게 된 라헬이 주님께서 나에게 또 다른 아들 하나를 더 주시면 좋겠다는 소원을 담아 더하다는 뜻의 이름을 붙인 요셉을 생각하면(30,24), 우리는 편애 속에서 성장하여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마마보이’, ‘배다른 형들의 미움을 받은 막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 ‘외국인 노예로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 ‘자기 부족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재난과 기근으로부터 구한 재상’, ‘이스라엘의 이집트 이주와 출애굽 사이의 구원사를 잇는 족장등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요셉은 무엇보다 꿈을 꾸고, 꿈을 해몽하는 지혜를 가진 인물입니다.

 

성경에서 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알리는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12,6). 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식, 혹은 천사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전달하시는 통로라는 것이지요.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경고하신 것이나(20,3-6), 야곱이 베델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꿈에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본 것도 그런 예입니다(28,12).

 

그러나 성경에는 꿈으로 점을 치면서 백성을 현혹하는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경고도 있습니다(13,5).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님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로 예언하는 예언자들을 규탄합니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고, 점쟁이들에게도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29,8).

 

물론 꿈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길몽도 있지만 악몽도 있고(시편 73,20), 태몽도 있고, 현몽도 있고, 몽중몽, 백일몽, 일장춘몽, 용꿈, 돼지꿈, 개꿈, 헛된 꿈(잠언 12,11; 28,19)도 있습니다. 헛된 꿈들은 걱정이 많으면 함께 많아지는 꿈이고(전도서 5,3), 그래서 전도자는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다. 오직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만 알고 살아라.’(전도서 5,7)고 권면합니다.

 

목사이자 꿈 연구자인 제레미 테일러는 꿈은 인류의 역사 이래, 신의 세계와 더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수단으로 인식되어 왔다. 신의 세계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물리적인 실체의 한계를 넘어선 상징적 진실을 지니는 다층적인 세계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꿈은 인류 공통의 심오한 인간성과 보편적 상징을 드러내는데, 근본적으로 인류는 유사한 방식으로 꿈을 꾸고, 유사한 희망, 사랑, 두려움, 이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요셉이 꾼 꿈은 형제들과의 긴장과 갈등을, 요셉이 해몽한 꿈들, 곧 술잔을 올리는 시종장과 빵을 구워 올리는 시종장의 꿈은 삶과 죽음 사이의 긴장을, 바로가 꿈에 본 살이 찌고 잘 생긴 암소 일곱 마리와 약하고 흉측하고 야윈 암소 일곱 마리는 7년간의 풍년과 흉년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보여준 것이지요(41,25-30). 바로의 꿈은 두려움과 희망, 상승과 몰락, 빛과 어둠, 삶과 죽음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라는 삶의 원초적인 불안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요셉 이야기의 주요 모티브가 형제들 사이의 갈등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형제들의 시기로 이집트로 노예로 팔려가서, 바로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시종이 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을 물리친 것 때문에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혀 13년 동안을 살았습니다. 그가 당한 고통과 고난을 생각하면 결코 형들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집트의 재상이 된 요셉은 형들에게 보복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고난의 시기가 지났고 출세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자기 자신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정체를 알게 된 형제들, 두려움에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고 합니다(45,3). 그러나 요셉은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45,5)라며 형제들에게 걱정하지도, 자책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물론 요셉은 고통 받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형들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에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셉은 자기가 당한 고통과 고난을 개인적이고 사적인 원한으로 기억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 나아가 이집트와 주변 세계를 함께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커다란 구원 계획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고백합니다. 이런 시각의 전환, 아니 이런 생각의 변화는 자신이 당한 개인적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함께 계시면서, 자기를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서만 가능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사소하고 개인적인 고통과 고난일지라도 거기에서 더 큰 뜻, 곧 하나님의 숨은 뜻을 찾으면, 그것은 결코 개인적이고 사적인 고통과 고난에 머물지 않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적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꿈꾸는 사람, 이집트 노예였다가 재상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기근에서 구한 요셉 이야기의 초점입니다.

 

3. 요셉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 사람이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의(10,10-11) 산 증인입니다. 요셉은 주님께서 자신을 돌보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39,2), 자신을 통하여 이집트 사람의 집에도 복을 내리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39,5; 39,23). 자신에게 있는 해몽의 능력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고백한(40,8; 41,16) 요셉은, 마침내 이집트의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그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을, 이 사람 말고,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느냐?’는 말을 듣습니다(41,38).

 

이방인인 이집트의 바로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 것이지요. 마음으로 믿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선포이고 전도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이다는 기쁜 소식을(10,13), 들은 적이 없어서 믿지 못하고, 믿은 적이 없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전도이고,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발걸음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바울은 증언합니다(10,15).

그렇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10,17). 그러니 전하는 이가 없다면, 어떻게 들을 수 있으며, 듣지 않고서 어떻게 믿음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전도는 그리스도는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신다’(10,12)는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전도를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지요.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유대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1,16).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사람, 주님의 말씀을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이 어찌 증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믿는 사람은 증언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11,16), 우리가 어떻게 부끄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2,11), 우리가 어찌 부끄러워할 수 있겠습니까!

 

4. 그러나 듣기만 하고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의심하는 사람, 믿음이 적은 사람이 됩니다. 마태복음에 전승되고 있는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이적 이야기는 오병이어의 이적 이야기와 함께, 예수님이 엘리야와 모세를 능가하시는 메시아이심을 증언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제자들 가운데 으뜸이라는 사도 베드로가 얼마나 믿음이 적고, 의심하는 인물인지를 숨기지 않습니다(14,31).

 

의심’(疑心)이라는 헬라어(dubitare)무엇인가를 더 이상 하나로 받아들일 수 없고, 두 개로 갈라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독일어로 ‘Zweifel’로 번역된 헬라어 의심두 가지 방향으로 가는 것’, ‘두 길을 동시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을 뜻합니다. 두 마음을 품고 있어 행동에 안정이 없는 상태(1,8)라는 것이지요.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예수님의 말씀(14,27)과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대한 무서움 사이에서(14,30), 베드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아무 것도 결단하지 못하고 주저하거나, 이 길도 가고 싶고, 저 길도 가고 싶어, 마음이 두 방향으로 갈라진 믿음이 적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갈라진 마음으로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베드로, ‘주님, 살려 주십시오라고 외쳤고, 예수께서는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아 배에 함께 오르셨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쳤습니다.(14,30-32). 베드로는 주님을 시험했고,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 거센 파도 속으로 빠져 들어갔지만, 주님은 그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제자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구원하셨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고 약속하셨습니다(28,17-20).

 

그렇습니다. 구원의 희망은 두 개로 갈라져 있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오직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 안에만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분열되어 있고, 두려움과 주저함으로 이리저리 흔들릴 수 있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 있으며, 하늘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119,89).

 

어찌 개인에게만 그러하겠습니까? 한 나라도 마음이 둘로 갈라져 이리저리 흔들리면 망합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광복 75주년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배에서 우리를 해방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남북의 분단에서 비롯된 미완의 해방 75,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형제전쟁 70년을 기억하는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70년이 넘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온전한 자주와 독립, 해방과 평화를 우리 힘으로 성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계 최강의 4() 강대국들의 이해가 충돌하고, 분단된 휴전상태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온 것, 참으로 대단하고 대견한 일입니다. 스스로 자랑스럽고, 세계도 놀란 일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주독립국가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지킬 수 있는 나라, 주변 강대국들의 부당한 간섭과 제재를 받지 않고 자립, 자주, 자조, 자강하는 나라, 되어야 합니다. 그런 나라 될 수 있다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분단의 짙은 그늘 걷어내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광복’, 참된 빛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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