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두려워하지 말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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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창세기 21:14-21/ 로마서 6:3-11/ 마태복음서 10:24-31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06-21 |
전주 | 사랑의 주여, 저희가 여기 있나이다(J. S. Bach) |
찬양1부 | 경배하라 우리 하나님(J. C. Rinck)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시편 23편(나운영) 특송: 이재은 집사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M. W. Moody) |
후주2부 |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M. W. Moody) |
성경본문 |
창세기 21:14-21 다음날 아침에 일찍, 아브라함은 먹거리 얼마와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에게 주었다. 그는 먹거리와 마실 물을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서, 그를 아이와 함께 내보냈다. 하갈은 길을 나서서, 브엘세바 빈 들에서 정처없이 헤매고 다녔다. 가죽부대에 담아 온 물이 다 떨어지니, 하갈은 아이를 덤불 아래에 뉘어 놓고서 "아이가 죽어 가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면서,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 떨어져서, 주저앉았다. 그 여인은 아이 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하나님이 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을 부르며 말하였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하갈이 샘을 발견하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다가 아이에게 먹였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바란 광야에서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이집트 땅에 사는 여인을 데려가서, 아내로 삼게 하였다. 로마서 6:3-11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서 10:24-31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제 스승만큼 되고, 종이 제 주인만큼 되면, 충분하다. 그들이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고 불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덮어 둔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그리고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
1. ‘두려워하지 말아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은 현실 때문이지요(마 10,16). 제자들은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었습니다.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가지고 다닐 수 없었고,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닐 수 없었습니다(마 10,9-10). 독사와 야생동물이 출몰하는 광야에서 신과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밤에 기온이 급하게 떨어지는 광야에서 속옷이 없다는 것은 자칫 얼어 죽을 수도 있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맨발은 가난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성전에 들어갈 때의 겸손의 표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온전히 무방비 상태로, 길 잃은 양 떼 같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가서, 겸손하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어야 했습니다.
여행길에 돈은 물론 여행용 자루와 속옷도 두벌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은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호의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라는 말입니다. 가난은 단지 불편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게다가 방랑의 설교자들이 낯선 사람들에게서 호의를 기대하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지하는 것은 자존심을 해치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가난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구걸하는 거지로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갈 때, 거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야 했습니다(마 10,11). 그들이 선포하는 하늘나라에 합당한 사람인지, 그들이 비는 평화를 누리기에 알맞은 사람인지 살펴보고 선택했던 것이지요(마 10,13). 그리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집에는 평화를 빌고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그 집이 평화에 알맞지 않으면, 제자들은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고 떠나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땅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내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한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마을이나 집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선취적으로 보여주는 객관적이고 공적인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무릅써야 할 위험은 단지 가난과 광야와 낯선 마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악하고 위험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법정에 넘기고, 회당에서 매질을 할 것입니다. 당시 최소한 120명의 교인을 가진 유대인 공동체 안에는 23명으로 구성된 최고의 법적 권한을 가진 일종의 작은 법원이 있었는데, 이들은 ‘산헤드린’(Synhedrien)으로 불렸습니다. ‘회당’(Synagogen) 또한 정치적인 모임이었고, 재판과 형집행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질은 공개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로부터 온전히 축출당하기전까지는 회당의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조심해야 할 사람들, 제자들을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을 할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제사장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박해자는 유대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를 따르기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나가고, 관가에 넘겨질 것입니다(마 10,18-19).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마 10,22). 예수님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하신다고 비난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비난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당하신 같은 모욕을 당하는 것이지요(마 10,25).
이런 상황에 처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의미하는 독일어 ‘앙스트’(Angst)는 언제나 ‘무엇 앞에’를 의미하는 전치사, ‘vor’와 함께 사용됩니다.
두려움은 일반적으로 관계의 단절 혹은 분리, 부끄러움과 죄책감, 창피함과 수치심에서 오는 자아의 죽음, 소멸 혹은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 징그러운 것들에 대한 두려움, 신체의 부분을 잃는 절단, 폐소공포증같은 자유의 상실에서 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1882-1945)가 말한 것처럼,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두려워했을까요? 가족과 동족으로부터의 미움과 배척과 단절, 공개적인 재판과 비난과 태형으로 당할 육체적 고통, 지연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리스도에 대한 실망, 그리고 마침내 예상되는 참혹한 십자가형이 그들을 두렵게 했을 것입니다. 같은 상황에 있었더라면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두려움은 예측하기 어렵고 막연한 미래의 불확실성이나, 죽음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고, 법정에 넘겨주고, 고통스럽게 채찍으로 때리고, 잔혹하게 죽일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서 구체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 10,28).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몸을 영혼보다 덜 소중한 것으로 여기거나, 육체의 고통을 경하게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고통은 우리를 죽일 만큼 충분히 두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영혼’은 일반적으로 ‘생명’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과 ‘영혼’은 인간의 두 가지 측면이지, 두 부분이 아닙니다. 영혼도 몸과 마찬가지로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몸이 죽는다는 것이 곧 생명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옥에 던져질 영혼을 주시기도 하고,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영혼을 주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태의 관심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마태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에,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몸과 영혼, 모두를 다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 분이라는 것이지요(마 10,30).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 분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머리카락이든지,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세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리 할 일이 없고, 시간 밖에 가진 것이 없어도 머리카락을 세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니,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우리를 위해 쓰고 계신다는 말일까요!
마태는 하나님은 하찮게 보이는 미물까지도 지키신다는 것을 참새를 빗대어 말씀하신 예수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인데(마 10,29), 제자들은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 말씀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과 충돌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뜻과 연결시켜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도 땅에 떨어지는 참새가 있듯이 – 실수든 사냥총에 맞아서건 – 수많은 일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일어납니다. 게다가 사악한 일들을 벌리면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주장하는 뻔뻔스러운 사람들을 정당화하는 기재로 이 말씀이 악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땅에 떨어지는 참새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제자들의 운명을 암시하는데 있습니다. 제자들의 순교에 빗댄 참새 두 마리 이야기는 그러므로 결코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같음을 표현하십니다. 또한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걱정과 겨우 한 냥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 같은 보잘 것 없는 미물도 지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의 운명, 곧 그들이 당할 고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마 10,40). 이로써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과 운명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은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게 함으로써, 제자들을 죄의 세력에서 해방하셨고,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롬 6,3-6).
2.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소유인 이집트 출신의 여종입니다. 사래가 아기를 출산하지 못하자, 사래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동침하여 집안의 대를 이어가라고 합니다. 그 때가 아브라함과 사래가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온지 10년이 지난 뒤라고 하니, 아브라함이나 사래도 무던히 아기를 기다려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임신 가능성을 기대할 수도, 또 기다릴 수도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아브라함과 자신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약속을 잊은 하나님 대신에 스스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사래는 아브라함에게 이집트 출신의 자기 몸종인 하갈을 취하게 합니다. 하갈은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갈은 자신의 사랑과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사래의 노예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갈이 임신을 합니다. 부족장의 대를 이을 맏아들을 임신하자, 하갈이 본부인이며 자기 여주인인 사래를 깔보기 시작합니다. 사래는 남편에게 따지듯 항의합니다. ‘내가 받은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나의 종을 당신 품에 안겨 주었더니, 그 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멸시합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창 16,5).
하갈이 임신한 것으로 봐, 불임의 책임은 사래에게 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보면, 사래는 본부인으로서의 권위와 권한을 지키는 당당한 여인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소극적인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래에게 말합니다: ‘하갈은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기 바라오.’(창 16,6).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래는 하갈을 무섭게 학대합니다. 학대를 못 견딘 하갈은 임신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막으로 도망갑니다. 수르로 가는 길 목, 사막 우물가에서 임신하여 무거운 몸을 쉬고 있는 하갈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며 살라고. 그리고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고 합니다. ‘이스마엘’,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 여종 하갈이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 것이지요(창 16,11).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고통 받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집트 여인인 하갈은 처음으로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엘로이’, 곧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지어서 불렀습니다(창 16,13). ‘보시는 하나님’, 이방인 여종이 붙인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갈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난 곳,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는 샘의 이름도 그래서 ‘브엘라해로이’, ‘나를 보시는 살아계시는 분의 샘’이 되었습니다(창 16,14).
3.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계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절규를 들으실까요? 우리의 현실은 때로 하갈의 이런 고백을 승인할 수 없게 합니다.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보다, 우리를 보지 않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무관심한 하나님을 우리는 더 많이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다면, 과연 ‘하나님은 어떻게, 어디에서 우리를 보고 계시는 것’일까요?
마틴 루터는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보았다’는 하갈의 말을(새번역), ‘분명히 나는 나를 뒤에서 보신 분을, 여기에서 보았다’(Gewiss habe ich hier gesehen den, der mich hernach angesehen hat)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내가 여기서 뒤에서 나를 보시는 분을 보았단 말인가!’ 또는 ‘나는 나를 뒤에서 살피시는 그 분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독일어 ‘sehen’과 ‘ansehen’은 ‘본다’는 의미는 같으나, ‘ansehen’은 훨씬 더 가까이, 직접적이고, 능동적이고, 인격적으로 본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더 직접적이고, 능동적으로, 인격적으로 보신다는 것이지요.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뒤에서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우리를 보시면서 인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우리 뒤에서 우리를 보시고, 우리 뒤에서 우리를 보살피면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빛은 앞에서 비추면 눈이 부시어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등 뒤에서 비출 때 오히려 우리는 앞을 잘 볼 수 있지요. 그러나 빛이 등 뒤에서 비추면 길 위에는 그림자가 생깁니다. 빛이 인도하는 길 위에도 그림자는 있는 법, 그 누구의 그림자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그림자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갑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언제나 빛나고 환한 것은 아닙니다. 빛이 있는 곳에 반드시 어둠도 있는 법, 아니 빛이 있어야 그림자도 있는 법, 믿음이 언제나 밝고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불행을 없애거나 피해갈 수 있는 비밀스런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하갈은 다시 여주인인 사래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사래의 질투와 학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그러나 하갈은 이미 혼자가 아닙니다. 배 안에는 아브라함의 가문을 이어갈 아들, 이스마엘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여종의 몸을 통하여 또 다른 위대한 한 부족을 이룰 것을 약속하십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히 11,1). 바라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현실이 아니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 본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를 이미 이루어진 현재로 확신하고 살게 하는 힘이지요.
그래서 하갈은 사래의 질투와 학대가 기다리는 일상으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그녀가 만난 하나님은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손으로 만든 우상은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소리를 내지 못하지만(시편 115,5-7),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방인 여인인 하갈의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통 받는 우리를 뒤에서 보시는 하나님,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도 들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을 보지 못할 때에도, 아니 우리를 보고 계시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 분은 언제나 우리를 우리 뒤에서 살피시면서, 우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십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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