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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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는가?
성경구절 사도행전 2:1-21/ 고린도전서 12:3b-13/ 요한복음서 20:19-23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05-31
전주 오소서, 주 성령이여(D. Buxtehude)
찬양1부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Traditional Irish Melody) 특송: 정록기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주님은 살아계셔(G. F. Händel) 특송: 이예랑 교우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성령으로 구주를 찬송하리로다(P. P. Knapp)
후주2부 성령으로 구주를 찬송하리로다(P. P. Knapp)
성경본문 사도행전 2:1-21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에는 경건한 유대 사람이 세계 각국에서 와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말소리가 나니,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들은 놀라, 신기하게 여기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이오?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고,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이고, 또 나그네로 머물고 있는 로마 사람과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 우리는 저들이 하나님의 큰 일들을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소."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서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하면서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더러는 조롱하면서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여서, 그들에게 엄숙하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금은 아침 아홉 시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또 나는 위로 하늘에 놀라운 일을 나타내고, 아래로 땅에 징조를 나타낼 것이니, 곧 피와 불과 자욱한 연기이다. 주님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오기 전에, 해는 변해서 어두움이 되고, 달은 변해서 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2:3b-1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서 20:19-23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1. 유대인들에게 오순절은 유월절, 초막절과 함께 3대 축제 가운에 하나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한편으로 칠칠절로 알려졌는데, 그것은 이 축제가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시작하여 일곱 이레를 센 후에 지켜졌기 때문입니다(23,15-16; 16,9-10). 다른 한편으로 오순절은 맥추절로도 불렸는데, 이 때, 보리 수확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입니다(28,26).

 

그런데 오순절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처음으로 성령임재사건이 일어난 날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오순절 축제일, 예루살렘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들이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러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방언으로 번역된 헬라어 성경의 원어는 다른 혀입니다. ‘’(tongue)방언’(tongues)이 동의어로 사용된 것에 비추어, 여기서 방언은 외국어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한 외국어가 어떤 언어였는지는 다음 구절들이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대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 로마에서 온 사람,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였습니다(2,9-11).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들을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 어쩔 줄 몰랐는데, 그것은 학력도 없고 교육받지도 않은 변방의 갈릴리 촌놈들이 외국어를 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다고 합니다(2,13).

 

그러자 사도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지금은 아침 아홉 시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불길 같은영을 부어 주신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여러 나라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들이 무엇인지 증언하기 위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들’(2,11), 그것은 유대인들이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 살리셨고’(2,23-24), 바로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2,36).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자, 베드로는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2,37-39)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는데, 그 날에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어났다는 것이 사도행전이 보도하는 첫 번째 선교 사건입니다(2,41).

 

2.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성령임재 체험과 거기에서 시작된 선교의 역사를 기록한 행전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임재의 형태는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불길로 표현되었고(2,2-3), 성령임재의 내용은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성령임재의 목적은 제자들이 여러 나라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 예수님을 증언하고, 사람들을 회개와 세례에로 초대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셔서 방언의 은사를 주신 것이 예언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언자 요엘은 요엘서의 제목에서 알려진 그의 이름 외에 알려진 것이 없는 인물입니다(요엘은 야훼는 하나님이다는 뜻). 그러나 우리는 그의 메시지에서 그가 포로기 이후, 주전 약 400년경의 제의 공동체에 속한 예언자였고, 강력한 메뚜기 재앙(1,6)과 가뭄(1,12)이라는 엄청난 자연재해를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으로 선언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한 예언자였다고 추정합니다.

 

오늘 날 모든 자연재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견강부회(牽強附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원인임이 분명한 기후변화에 의한 자연의 복수라면, 굳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지 않아도, 인간에 대한 자연의 심판임이 분명합니다. 물론 예언자 요엘이 자연재해를 임박한 야훼의 날에 대한 표시로 이해한 것은, 자연 질서까지도 하나님께서 지배하신다는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의 결과입니다.

 

당시 유대 땅은 메뚜기 떼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메뚜기 떼들의 공격에서 비롯된 재난은 가뭄과 기근으로 확대되었고, 기근은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양극화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웃나라들은 유다가 당한 위기를 기회로 삼아, 유다 백성을 약탈했고, 예루살렘 시민을 그리스 사람에게 팔아넘겼습니다(3,5-6). 지배층은 토지를 나누어 독점하고, 제비를 뽑아 백성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소년을 팔아서 창녀를 사고, 소녀를 팔아서 술을 사 마셨습니다’(3,2-3). 한 나라가 망해가도 결코 망하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아니 위기가 더 큰 돈벌이의 기회가 되는 사람들도 있지요.

 

자연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재해는 모든 사람에게 닥치지만, 모든 사람이 재해의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코로나 바이러스-19’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생자는 대부분 기저질환자, 노약자,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미국에서는 사망자가 지난 3개월 동안(20202월부터 지금까지) 10만 명을 넘어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 사망자 숫자는 한국전쟁(1950-1953, 36,500), 베트남 전쟁(1961-1975, 58,000), 이라크(2003-2011, 4,500)와 아프카니스탄(2001-오늘까지, 2,000) 전쟁 등 총 44년간에 걸친 전쟁에서 사망한 미국 군인들 숫자보다 더 많습니다. 감염 확진자는 150만 명, 수 백 만 명의 미국인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불법체류자, 의료보험미가입자 등은 치료조차 받을 수 없습니다. 재해와 재난도 불공평한 것이지요.

 

그러나 예언자 요엘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신다고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 주님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호소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2,28-32).

 

주님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호소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너무 어리다고, 너무 늙었다고, 자유가 없는 종들이라고 차별받고 배제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회개하면, 옷을 찢지 않고 마음을 찢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늘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시는 주님께서’(2,12-13)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 초대를 거절할 뿐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함께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만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구원, 그것은 자신만의 안위(安慰), 자기 집단만의 안전(安全)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19의 세계적 대유행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국경이 폐쇄되고 자국중심주의가 강화되고,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 국가들 사이의 양극화는 물론 한 나라 안에서의 양극화도 더 심화될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19’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코로나 바이러스-19’로 희생당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들임이 분명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19’ 이후의 세계에 대한 전망, 강요된 부정적, 긍정적 변화에 대한 이런 저런 전망이 제시되고 있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결국 경제일 것입니다. 백신이 개발되거나, 아니면 절대 다수의 인류가 면역력을 갖게 되어 코로나 바이러스-19’가 진정국면에 들어가는 것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불안, 언제 또 다시 사회적 감염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지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 장기경기침체가 동반하는 대량실업과 경제위기는, 국가의 긴급재난지원금으로도, ‘기본소득’, ‘전국민고용보험제도로도 온전히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난(災難)과 재해(災害)는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경기침체로 고통당하는 것은 위기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원인을 꼼꼼히 성찰하고,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인류가 지혜와 힘을 모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멸절할 수 있다는 집단적 학습도 하나의 기회입니다. 다만 그 학습이 집단적 깨달음이 되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19’의 세계적 대유행의 원인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인간의 욕망충족을 위해 파괴하고 착취한 데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우리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맺어야 합니다. 자연과 인간을 보는 우리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자연에 대한 파괴와 착취의 관계를 돌봄과 보전의 관계로 바꿔야 합니다. 약탈적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공동체적 상생의 경제체제로 바꿔야 합니다.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공조의 재원마련을 위해 대규모의 군비축소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어떤 세계를 만들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누가 과연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저런 대안과 해결책이 제시되어도, 결국 인간이 하지 않으면 공염불(空念佛)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회개, 영적 인간으로의 거듭남이 없이는 코로나 바이러스-19의 세계적 대유행 시대의 인류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습니다. 대다수 기후학자들은 2100년까지 바닷물 온도가 섭씨 4도 이상 상승할 가능성이 크며(해수면 높이는 현재보다 30cm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 지구 산소의 3분의 2를 만들어내는 식물성 플랑크톤을 2100년까지 대량으로 죽게 만들 것이기 때문에, 2050년에 90억 명에 도달할 인류는 점차 식량난과 산소 부족 사태로 인해 2100년경에는 10억 명 또는 5억 명 정도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이런 비관적 전망은 사이비 종말론자들이나 신천지같은 이단들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내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문명사적 전환은 결코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의 종교적 전통들이 우리에게 주는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안에 오래된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차축시대의 모든 종교들의 공통점은 정의로운 관계들 속의 삶’(life in just relationshios)을 찾는데 있습니다. 생명은 상호성과 상보성(相補性)이라는 관계망 안에 있는 것이기에, 관계가 정의롭지 못하면 생명은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을 파괴하는 불의한 관계를 극복하고, 상호성과 상보성의 관계 안에서 충만해지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주셨다고 예언자 요엘과 베드로는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으면, 아들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될 것이고, 남종과 여종들은 예언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2,28-29; 2,16-18).

 

예언을 하는데 남녀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청년이 환상을 본다고 하면, 사람들은 꾸짖을 것입니다. 현실을 보고,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연봉을 계획해야 할 때에 도대체 실현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환상을 보는 청년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 할 일도, 쓸모도 없는 잉여(剩餘) 혹은 투명인간으로 노인을 취급하는 세상에서 정의로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꾸는 노인을 누가 경청하겠습니까! 종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유도 주체도 없는 존재입니다.

 

구약성경 전통에 따르면 영은 왕이나 제사장, 예언자 같은 지도층 인사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영은 더 이상 특별한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들의 특권이 아닙니다(삼상 10,6; 11,2).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종과 자유인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결코 특정 계급이나 계층에게 제한되지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는 사회적 한계들도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지양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사제나 매개자 없이 스스로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시는 언어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임재와 함께 남종과 여종들에게 주어진 예언의 능력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선견지명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이 이해하는 예언자, ‘나비대언자를 의미합니다(7,1). 세상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예언이라는 것이지요. 대언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 대한 경고, 회개에로의 부름, 심판, 모든 사람의 구원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초대교회의 성령강림 사건을 오순절 축제 때 일어난 사건으로 증언하면서, 예언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으로 해석한 것은 매우 중요한 연관성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오순절과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억하는 유월절 축제와 달리 유대민족만이 지키는 배타적 축제가 아니었습니다. 오순절과 초막절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 자녀들만이 아니라, 남종과 여종과, 성 안에서 같이 사는 레위 사람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까지도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했습니다(16,11절과 14).

 

성령을 받은 교회 공동체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누가는 구약성경의 오순절 축제에서 미리 본 것입니다. 성령임재 체험의 은사는 배타적으로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지요.

 

3.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성령의 은사, 특별히 방언의 은사를 중심으로 다툼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못 받은 성도를 차별하고 경멸하는가 하면, 못 받은 사람은 받은 사람을 공연히 시기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은사는 다양하지만,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 분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고(고전 12,11),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 곧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고전 12,7). 이로써 누구도 성령의 은사를 사유화할 수 없고, 자신의 특별한 능력이나 믿음 때문에 주어진 특권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자신이 받은 은사가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보다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은사를 받을만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신도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에게 이런 저런 은사를 달라고 열심히 구할 수는 있어도(고전 12,31), 지시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은사를 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성령의 일이므로 아무도 자랑하거나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시고’(고전 14,33),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라고 권면한 것입니다(고전 14,20).

 

초대교회 최초의 성령임재 체험이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소통의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 성령의 은사가 넘치는 교회는 소통이 활발한 공동체입니다. 근거 없는 비방이나 뒷담화가 아니라, 상호존중에 기반한 솔직한 대화, 일방적인 자기주장보다 먼저 경청하는 대화, 자기 뜻의 관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는 대화가 있는 공동체가 성숙한 신앙공동체입니다. 예언자 요엘이 2,400년 전에 꿈꾸었던 나라, 베드로가 2,000년 전에 꿈꾸었던 교회가 바로 그런 공동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통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세상을 향하여 대언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환상을 세상과 함께 나누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고, 하나님은 우리를 보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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