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넷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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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권능과 힘은 하나님께
성경구절 사도행전 9:36-43/ 요한계시록 7:9-17/ 요한복음서 10:22-30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5-12
전주 하나님 품안에 살게 하소서(D. Buxtehude)
찬양1부 갈릴리 사람(Douglas E. Wagner)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너 낳은 부모님을 공경하라(V. E. Nessler)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만복의 근원 하나님, 찬송 성부 성자 성령(L. Bourgois)
후주2부 만복의 근원 하나님, 찬송 성부 성자 성령(L. Bourgois)
성경본문 사도행전 9:36-43
그런데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가인데, 이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그 무렵에 이 여자가 병이 들어서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겨서 다락방에 두었다. 룻다는 욥바에서 가까운 곳이다. 제자들이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을 그에게로 보내서,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일어나서, 심부름꾼과 함께 갔다. 베드로가 그 곳에 이르니, 사람들이 그를 다락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과부들이 모두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지낼 때에 만들어 둔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여 주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다비다여, 일어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 여자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서 앉았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서, 그 여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서, 그 여자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 일이 온 욥바에 알려지니,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여러 날 동안 욥바에서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묵었다.

요한계시록 7:9-17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10:22-30
예루살렘은 성전 봉헌절이 되었는데,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께서는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생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1. 지난 20065월에 개봉된 김태용 감독이 만든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가정의 달에 상영된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가족이 해체된 한국사회의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군대 간다고 나갔다가 5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던 남동생 형철(엄태웅 분)이가 혼자 사는 누나 미라(문소리 분)를 갑자기 찾아옵니다. 그런데 스무 살 연상의 무신(고두심 분)이라는 여인을 애인이랍시고 데리고 들어온 것입니다. 엄마 같은 남동생의 애인과 셋이 함께 사는 것도 이상한데, 어느 날, 무신의 전 남편의 전 처 소생의 어린 딸까지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 후 형철은 또다시 역마살이 발동해 집을 나가서 연락이 끊기고, 집에는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어른 여자 둘에 어린 여자 하나가 동거를 하게 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선경(공효진 분)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선경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씨 다른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엄마 매자(김혜옥 분)가 유부남을 사랑하여 낳은 아이입니다. 유부남을 사랑한 것도 한심한 일이지만, 그와의 사이에 아이까지 낳아 기르는 엄마가 더 한심해 두 사람은 티격태격 밤낮 다툽니다. 마침내 중병으로 엄마가 죽자, 의붓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고, 선경은 씨 다른 남동생 경석이와 함께 삽니다.

별로 연결점이 없는 이 두 가정이 나란히 소개된 이유는 선경의 남동생 경석(봉태규 분)과 무신의 딸 채현(정유미 분)이 운명처럼 서로 엮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 다 평범하지 않은 가족사를 가진 이 두 남녀는 연애를 하다가 마침내 헤어지기로 합의합니다. 채현의 집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데, 갑자기 대문이 열리더니, 미라가 나오면서 남자친구냐며 호감을 표시합니다. 그러자 채현은 우리 헤어졌어라고 말합니다. ‘두 글자로 신학하기의 저자인 구미정 박사는 이 장면이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합니다. ‘헤어졌다고 밥도 안 먹냐?’면서 미라가 무작정 경석의 손을 잡아끌며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밥상에 둘러앉게 된 무신과 미라, 경석과 채현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 사이지만, 그 장면만 떼어놓고 보면 영락없이 할머니와 엄마, 아들과 딸처럼 보입니다. 글자 그대로 전혀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그 즈음 집나갔던 형철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는 이번에도 낯선 여자 하나를 데리고 옵니다. 여자의 배는 남동생 형철이의 씨를 잉태하여 보름달처럼 부풀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누나인 미라의 반응입니다. 영화 초반에서 유일한 핏줄인 형철을 반기며 애지중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그녀는 치매로 형철을 알아보지 못하는 늙은 무신을 감싸고, 형철을 매몰차게 쫓아냅니다. 혈연중심의 가족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인류는 오랫동안 혈연중심의 가족을 유지해왔습니다. 혈연, 그 어떤 보다 짙고, 질긴 관계이지요. 그런데 이런 의미의 가족관계는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무너지고 있습니다. 아예 결혼을 하지 않는 비혼’, ‘혼밥 문화’, 자녀 없는 가족, 높은 이혼율은 물론, 친자 학대, 친부 살해 등 상상조차 하기 힘든 범죄도 혈연중심의 가족관계를 해체시키고 있습니다. ‘도 국가주의와 권위주의의 마지막 폐기물로 취급됩니다. ‘며느리의 남편을 아들이라고 착각하는 어머니도 있지만, ‘시월드무섭다고 물놀이도 안가는 며느리도 있다고 합니다.

 

 

2.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부부와 그 자녀로 구성된 혈연가족을 오랫동안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여겨왔습니다.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핵가족 형태이지요. 혈연중심의 가족의 끈끈함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다른 형태의 가족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라는 단점도 있습니다. 게다가 순혈주의적 가족은 다문화가족, 다종교가족에 대해서 더 배타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은 혈연이나 성, 신분이나 계급을 넘어선 새로운 가족을 선포하셨습니다: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23,9).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한 분 아버지로 한 새로운 가족은 혈연공동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입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10,34-35). 예수님의 이 말씀도 혈연적 상하관계에 의해 규정되고 고착된 인간관계를 뒤집는 새로운 가족관계에 대한 선언입니다.

 

혈연과 인종,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는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십자가에서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시고, 제자에게는 ,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이었고(19,26-27), 초대교회가 실천한 정신입니다.

 

욥바에서 다비다라는 이름을 가진 여제자가 병으로 죽었을 때, 살려낸 베드로 이야기, 그리고 그가 천대받던 이방인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무른 이야기도 이것을 뒷받침합니다. 초대교회는 과부 신세였던 불쌍한 여성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 인종과 신분과 직업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지 않는 것은 초대교회의 정신이자, 변해서는 안 될 교회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를 넘어선 모든 인간과 피조세계의 보편적 구원 이상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역사가 끝날 때 완성됩니다(7,9-12). 모든 인간은 그 출신과 상관없이 모두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 하고 말하였습니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은 그 출신과 상관없이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구별된 공동체입니다. 그들이 어느 민족, 어느 종족에 속했는지, 무슨 언어를 말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한이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하나님께 영원무궁하도록 있다고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작성되던 시대, ‘영광과 존귀와 권능과 힘은 오직 로마의 황제에게만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이 오직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영원무궁하게 있다고 선언한 것이지요.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불경하고 반역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고서는 감히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로마 제국의 악마적 권능과 힘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힘은 로마의 군대, 총독, 십자가 처형, 세금납부, 로마의 거룩한 상징들, 군기 등 구체적인 체제에서 드러났습니다. 제국은 그 권능과 힘을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로 정당화했고, 그래서 황제를 주님이자 하나님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던 것이지요. 힘의 숭배는 국가주의라는 집단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힘에 의한 구원신앙을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 나사렛 예수님이 구원임을 믿었습니다. 진정한 구원의 권능과 힘은 제국의 황제에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이런 믿음이 한 편으로는 국가주의적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이런 믿음은 일상의 폭력을 극복할 힘을 주었습니다. 인간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모든 폭력, 그것이 관습이건 제도이건,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모든 폭력적 관계를 평화적인 관계로, 모든 수직적 관계를 평등한 관계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권능과 힘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것은 구원하는 권능과 힘이지 지배하는 권능과 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봉헌절, 성전에서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10,24)라고 예수님을 다그쳤을 때,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나사렛 출신의 목수가 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아니 그리스도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사람은 사실이나 진실을 믿기보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이른바 확증편향이론이 있습니다.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인지적 편향성입니다. 사람들은 증거나 자료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선택함으로써, 있는 그대로를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지요.

39년이 지난 지금까지 광주민주화운동이 철수 1,2,3 으로 불리는 북한 간첩들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민특위가 국론을 분열시켰다느니, 대한민국 국가 수립 기원에 대한 역사논쟁도 사실과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확증편향 다툼처럼 보입니다.

 

 

3. 이런 확증편향은 편견을 강화하고, 인간관계를, 심지어는 가족관계도 파괴합니다. 외국인 노동자, 무슬림 난민에 대한 사회적, 종교적 편견도 그렇지만, 성소수자, 에이즈나 알츠하이머 같은 질병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종영된 눈이 부시게라는 JTBC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배우 김혜자씨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자기가 25살이었던 시절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 노인 역을 했습니다. 결혼 후 기자였던 남편이 독재정권시절, 고문으로 어린 아들 하나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 아들마저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들이 행여 여린 마음으로 평생을 기를 펴지 못하고 움츠러들어 살까봐 겉으로는 혹독하게 대했지만, 그녀는 눈만 오면 아들이 넘어질까봐 새벽부터 산꼭대기 빈민촌 험한 길의 눈을 치웠습니다. 아들은 학교 갈 때마다 눈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어머니가 그랬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이 된 아들이 알츠하이머로 고생하다가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어머니는 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하셨어요?’

어머니가 대답합니다: ‘대단한 날은 아니고, 나는 그냥 그런 날이 행복했어요. 온 동네에 다 밥 짓는 냄새가 나면 나도 솥에 밥을 안쳐놓고 그때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던 우리 아들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가요. 그럼 그때 저 멀리서부터 노을이 져요.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그때가.’

그때, 퇴근하여 언덕길로 올라오는 남편과 어린 아들과 함께 포옹하는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그리고 독백을 하지요: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것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행복을 무언가 대단한 것, 특별한 것, 권세와 힘에서만 찾는 사람은 소소한 일상, 지극히 평범한 날이 참으로 눈이 부신 날이라는 것을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의 삶은 매일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수많은 우연과 사건들의 연속이지요. 그러므로 지금, 여기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영원한 현재입니다. 지금이 우리의 삶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소중하지 않은 순간, 소중하지 않은 만남이 있을 수 없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언제나 늦게 배웁니다. 부모가 되어서야 부모 마음 깨닫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후회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지금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하늘나라에 계신 이들은 못 다한 사랑, 살아있는 어르신들에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아들 혹은 딸이었고, 누이 혹은 형이었고, 엄마 혹은 아빠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 자신일지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어버이 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지금 어버이인 모든 이들은 어린이였고, 지금의 어린이들은 언젠가 어버이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가족관계가 변한다고 해도,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라는 주님의 계명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계명은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 살면서 복을 누린다.’(5,16)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6,2).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이 너무 어리다고, 너무 늙었다고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사랑하고, 공경하는 이유, 주님께서 어린이들을 축복하셨기 때문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딸린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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