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첫째 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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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탄식의 세례
성경구절 이사야서 43:1-7/ 사도행전 8:14-17/ 누가복음서 3:15-22
설교자 임영섭 목사
예배일 2022-01-09
전주 요단강가에 오신 주 예수(D. Buxtehude)
찬양1부 주님을 찬양하라(G. F. Handel) 특송 : 이예랑 교우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주님을 찬양하라(G. F. Handel) 특송 : 이예랑 교우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S. J. Vail)
후주2부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S. J. Vail)
성경본문 이사야서 43:1-7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다. 너의 구원자다. 내가 이집트를 속량물로 내주어 너를 구속하겠고, 너를 구속하려고, 너 대신에 에티오피아와 쓰바를 내주겠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너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내주고, 너의 생명을 대신하여 다른 민족들을 내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동쪽에서 너의 자손을 오게 하며, 서쪽에서 너희를 모으겠다.북쪽에다가이르기를 ‘그들을놓아보내어라’하고,남쪽에다가도 ‘그들을 붙들어 두지 말아라. 나의 아들들을 먼 곳에서부터 오게 하고, 나의딸들을땅끝에서부터오게하여라.나의이름을부르는나의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사도행전 8:14-17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듣고서,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로 보냈다. 두사람은 내려가서,사마리아사람들이성령을받을수있게하려고,그들을위하여 기도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이요,그들가운데아무에게도아직성령이내리시지않았던것이었다. 그래서베드로와요한이그들에게손을얹으니,그들이성령을받았다.

누가복음서 3:15-22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그는 자기의타작마당을깨끗이하려고,손에키를들었으니,알곡은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 요한은 그 밖에도, 많은 일을 권면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분봉왕 헤롯은 자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관련된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 때문에, 요한에게 책망을 받았고, 거기에다가 또 다른악행을보태었으니,요한을옥에가둔것이다.백성이모두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 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탄식의 세례(20220109)

 

우리는 오늘부터 새로운 교회 절기인 주현절에 들어섭니다. 주현절은 예수께서 공적으로 세상에 나타나신 공생애를 시작하신 절기이기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주현절을 주님 공현 대축일이라고 하고 성공회에서는 공현절이라고 합니다.

주현절, 혹은 공현절을 가리키는 에피파니라는 말은 빛을 가져온다”, 혹은 빛을 드러낸다는 헬라어 에피파네이아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력의 시작을 지난 12월에 대림절로 시작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며 매주 촛불을 밝혀 왔습니다. 그리고 촛불을 매주 하나씩 더해 가다가 성탄절에는 다섯 개의 촛불을 밝히면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성탄을 함께 축하했습니다.

이 주현절에 빛을 가져온다, 빛을 드러낸다는 것은 우리에게 오신 주님의 그 빛을 이제는 세상을 향해 널리 비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의 그 빛은 마굿간에만 있어서도 안 되고,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에만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베들레헴과 갈릴리만 비추는 빛이 되어서도 안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비치는 빛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를 비롯한 기독교 전통이 있는 국가들 중에는 성탄 휴일이 끝나고 주현절이 시작되는 시점을 빛의 축제로 축하하면서, 예수의 성탄이 세상의 빛으로 퍼져 나가는 걸 염원하는데, 특히 주현절을 동방박사 기념일로 지킵니다.

그 이유는 하늘의 빛을 따라 아기예수를 축하한 동방박사들이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었던 것처럼 예수가 주신 그 기쁨은 민족과 국가와 종교를 넘어 온 인류의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주현절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비록 힘든 시대를 살면서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주님의 기쁨과 소망을, 우리가 누리고 감사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빛이 누군가에 의해서 독점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특정한 교리와 신념에 의해서 배타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 빛은 나와 내 가정과 우리 교회를 넘어 세상과 이웃을 향해 퍼져 나가야 한다는 그런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현절을 맞이할 때마다 묵상하는 복음서의 말씀은 오늘도 함께 읽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빛과 함께 세례가 주현절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치르는 세례예식은 물을 찍어 머리에 바르는 것으로 그치지만, 아시는 것처럼 세례는 침례라고 하는 물에 온몸을 완전히 담그는 그런 예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세 교회에는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 옆에 세례를 위해서 욕조처럼 물을 가두는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에 세례당이라는 건물이 따로 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원래 세례는 유대교에도 있었는데 누군가가 유대교로 개종을 할 때 옆에서 모세의 율법을 낭독하면서 세례와 비슷한 의식을 치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례와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는 것은 유대교 세례가 아니라 오늘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세례요한의 세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세례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 전체를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들처럼 매우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예수의 공생애가 세례로써 시작하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례를 당부하면서 예수의 공생애를 마칩니다.

오늘 누가복음서 말씀처럼 예수께서는 세례를 통해서 메시아로 인정받으시고 그 후로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람들을 고치시고 먹이시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이 땅의 모든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떠나시면서 마태복음서 2819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치 세례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전제조건인 것처럼 예수께서는 내가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했으니 너희는 나의 제자로서 세례를 통해 복음을 전하여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게다가 복음서에서 이 세례는 또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이 의식이 베풀어지고 언급되는 장면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등장합니다. 오늘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22절을 보면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결국 세례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나타나시고 이것은 예수의 마지막 당부에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성경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등장하는 게 뭐가 특별하냐고 물을 수 있지만, 복음서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등장하는 사건과 언급은 이 두 경우가 유일합니다.

물론 지금 예수께서는 이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로서 세상을 구원하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때문에 그분은 이 주현절의 상징처럼 빛 가운데,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례를 축복과 영광과 빛에 휩싸인 걸로만 생각하기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고, 이것이 예수의 세례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이 주현절의 핵심적인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는 그것이 물이든지 성령의 불이든지 정결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유대교에서 세례를 받은 것은 이제 하나님을 믿기로 결정했을 때 이전에 갖고 있던 잘못된 습관과 죄를 씻기 위해 세례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 본문 앞에 나오는 7절을 보면, 세례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세례는 죄인이 회개해서 정결해지기 위해서 받는 거였습니다. 세례를 통해 죄와 허물이 씻겨져서 심판과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 받는 것이 당시의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세례가 정결이든지 심판이든지 이것이 지금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세례가 독사의 자식들이 회개를 하기 위해 받는 거라면 이것은 죄 없는 그리스도 예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세례가 심판을 모면하는 일이라면 예수는 원래 심판의 주체가 되면 됐지 심판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는 죄를 씻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더 이상 종교적으로 정결해질 필요가 없는 분이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서 314절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하자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왜 내게 오셨습니까?”

 

따라서 오늘 예수의 세례는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아 왔던 그 세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요단강물에 자신을 담그며 이 의식에 참여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가? 그 대답을 오늘 이사야서와 그리고 고린도전서 101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세례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정결예식이 오늘 이사야서와 이러한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이집트를 탈출해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거쳐 다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그 구원의 여정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출애굽 광야생활을 연상케 하는 금욕생활을 하며 광야에서 생활하던 예언자였고, 그 세례요한에게 나아가 강물에 몸을 담그는 예식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홍해와 광야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는 출애굽의 경험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의 세례는 하늘의 빛과 영광에 휩싸여 세상을 통치하는 메시아의 대관식 같은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이집트 노예 시절처럼 로마제국의 탄압에 의해 수탈당하고 고통당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가,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아픈 사람을 고치고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출발하는 자리에서, 하늘의 빛과 영광을 받아 자신의 능력과 지위만을 과시한다면, 그건 십자가 죽음을 향해 가는 예수의 참 모습이 아닐 겁니다.

 

지금 예수는 세례를 통해 영광의 즉위식이 아니라 허겁지겁 울부짖으며 이집트를 도망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그 행렬에 동참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는 강물 속에서 세례를 받으며 질식할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 너는 메시아.”라는 음성을 듣기 전에, 먼저 백성들의 신음과 탄식과 울부짖음을 듣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서 본문 21절을 보면 예수는 특별한 대우가 아니라 백성들이 세례를 받는 곳에서 자신도 줄을 서고 있고 순서를 기다리다가 백성들과 함께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주현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세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해준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독일 베를린에 가면 도시 중심부 브란덴부르크 문 옆에 홀로코스트 공원이라고 있습니다. 독일에는 나치 독일의 만행을 고발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물들이 참으로 많은데, 미국의 유대인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이 설계한 이 홀로코스트 공원은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그런 장소입니다.

이 공원 옆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를 기념하는 한나 아렌트 슈트라세, 한나 아렌트 도로가 있어서 이 공원의 의미를 더 짙게 만든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홀로코스트 추모공원의 넓이는 19,000 평방미터에 이를 정도로 넓고, 그 공원 안에는 무려 2711개의 콘크리트 기둥들이 마치 회색 건물처럼 혹은 묘지의 비석 혹은 시신을 안치한 관처럼 빽빽하게 서 있습니다.

높은 건물을 떠받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콘크리트 사각 기둥들이 서 있는 그 사이사이를 걷다보면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높은 기둥들이 만드는 캄캄한 그늘이 무력함과 절망감을 일으키게 합니다.

때로는 독일군에 의해서 학살당한 유대인들이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회색 콘트리트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일 때면 무언의 비명소리 같은 스산함과, 가스실에서 희생당한 이들이 느꼈을 질식과 그 고통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곳을 다녀와서 그 추모공원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던 중에 저는 그 건축물에 대한 놀라운 설명과 해석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목사로서 지금까지 갖고 있던 기독교 세례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7백 개가 넘는 콘크리트 기둥들을 세우면서 건축가는 사람들이 들어가면 어디가 중심인지 모르게 설계하였고, 그 전체 모습은 마치 바다처럼 강물처럼 물결치듯이 기둥들을 세워놓아서, 그 안에서 마치 물에 빠진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당신들은 이곳에서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 세례는 제가 느꼈던 공포, 슬픔, 분노, 울부짖음, 바로 탄식의 세례였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세례의 아름다운 경험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 경험은 기쁨과 축복과 잊혀지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로 남아 있습니다. 저도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그해 성탄절에 받은 아기세례 사진을 볼 때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는 요단강 물속에 깊이 잠기며 이집트를 탈출하며 바다를 건너는 히브리 노예들의 신음소리, 바벨론에 끌려가며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를 건너며 울부짖었던 이스라엘 포로들의 울음소리, 요단강과 갈릴리 바다에 사무친 로마제국 식민지 백성들의 탄식소리를, 그 세례를 통해 예수는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 소리를 가슴에 품고 세상에 나아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먹이시고 싸매시고 품에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도 똑같은 탄식을 뱉으시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빛과 소망을 비춰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주현절을 맞이하면서 주님과 함께 조금 더 이웃의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시기에 병석에서 신음하는 교우들, 평생을 지켜온 이 제단에서 마음껏 찬양하지 못하는 교우들, 양극화에 시달리며 가게문을 닫고 직장을 잃고 시름하는 이웃들, 지금도 우리교회 주변에서 폐휴지를 주으며 생계를 이어가는 이웃들, 추운 겨울 날씨에도 전기장판을 켜지 못하는 쪽방촌의 이웃들, 그리고 소방관으로서 화재를 진압하다 희생당한 우리의 안타까운 이웃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를 갈망하는 그 탄식을 성령의 세례를 통해 듣고, 주님 가신 길을 따라나서는 주현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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