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약한 데서 완전해지는 하나님의 능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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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사무엘기하 5:1-5, 9-10/ 고린도후서 12:2-10/ 마가복음서 6:1-13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1-07-04 |
전주 | 너희 영혼을 아름답게 하여라(J. S. Bach) |
찬양1부 | 위에 계신 나의 친구(B. F. Butts) 특송: 송승연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위에 계신 나의 친구(B. F. Butts) 특송: 송승연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전능하신 주 하나님, 나를 인도하소서(J. Hughes) |
후주2부 | 전능하신 주 하나님, 나를 인도하소서(J. Hughes) |
성경본문 |
사무엘기하 5:1-5, 9-10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으로 다윗을 찾아가서 말하였다. "우리는 임금님과 한 골육입니다. 전에 사울이 왕이 되어서 우리를 다스릴 때에,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출전하였다가 다시 데리고 돌아오신 분이 바로 임금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네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며, 네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실 때에도 바로 임금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헤브론으로 왕을 찾아오니,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그들과 언약을 세웠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다윗은 서른 살에 왕이 되어서, 사십 년 동안 다스렸다. 그는 헤브론에서 일곱 해 여섯 달 동안 유다를 다스리고,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 다윗은 그 산성을 점령하고 나서, 그 산성에 살면서, 그 이름을 '다윗 성'이라고 하였다. 그가 성을 쌓았는데, 밀로에서부터 안쪽으로 성을 쌓았다. 만군의 주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다윗이 점점 강대해졌다. 고린도후서 12:2-10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갔습니다. 그 때에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나는 이 사람을 압니다. 그가 몸을 입은 채 그렇게 했는지 몸을 떠나서 그렇게 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이 사람이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두고서는 내 약점밖에는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자랑하려 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터이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은 삼가겠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서 보거나 들은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서 6:1-13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서 고향에 가시니, 제자들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어서,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 예수께서는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신 것 밖에는, 거기서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마을들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을 둘씩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명하시기를, 길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 밖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빵이나 자루도 지니지 말고, 전대에 동전도 넣어 가지 말고, 다만 신발은 신되, 옷은 두 벌 가지지 말라고 하셨다.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곳을 떠날 때에 너희의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서, 그들을 고발할 증거물로 삼아라." 그들은 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 주었다. |
1. 예수께서 고향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라서 말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막 6,1-2).
우리는 첫 번째 발언, ‘이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이미 청중의 마음과 태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비아냥거림이지요. 이들은 이미 가르치는 이가 ‘마리아의 아들 목수이고,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름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이름을 알면서도, 굳이 ‘이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못내 못마땅했거나, 불쾌했다는 표징이지요.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을 알고 있는 동네사람들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이름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라고 한 것은, ‘애비 없는 아들’이라는 모욕적 표현이자,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정통성을 폄훼하려는 중상모략이었습니다. 더구나 목수라는 직업은 가르침을 청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의도적으로 목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과연 어떤 가르침이 청중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마가는 어쨌든 청중이 ‘예수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막 6,3). 그래서 예수님은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단지 몇몇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주신 것 밖에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합니다(막 6,4-5).
기적은 언제나 상호적 사건임이 다시 확인됩니다. 아픈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능력이 만날 때 치유 사건은 일어나는 것인데, 믿지 않는 청중들에게 무슨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마가는 예수님께서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고 합니다(막 6,6).
그렇지요. 그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나사렛 작은 동네에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알고, 어릴 적부터 자라는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의 눈에, 장남으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많은 형제자매를 부양하기 위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청년 목수인 예수가 그렇게 놀라운 가르침을 주는 것이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놀라움은 곧바로 경멸과 무시로 바뀝니다. 믿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믿기 싫었던 것이지요. 이들의 돌변하는 태도에 예수님은 ‘이들이 믿지 않은 것에 놀라시면서’,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막 6,4)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말은 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잘 알려진 잠언, ‘예언자는 자기 고향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는 격언에, ‘자기 친척’과 ‘자기 집’을 첨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 심지어는 가족과 친척들의 이런 거부를 상상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마가는 이 사건 전에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막 4,35-41), 악령들을 축축하시며(막 5,1-20),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혈루증 앓는 여자를 고쳐주신 놀라운 이적들을 배치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자 예언자이신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의 뿌리 깊은 불신앙으로 인해 어떻게 좌절하셨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 자신을 경멸하고 달갑지 않게 여기는 고향 동네를 제자들과 함께 두루 돌아다니신 후, 제자들에게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주시면서’ 명하셨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 밖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빵이나 자루도 지니지 말고, 전대에 동전도 넣어 가지 말고, 다만 신발은 신되, 옷은 두 벌 가지지 말라.’
이 말씀은, 방랑하는 순회 설교자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어느 마을에 들어가든지 정착 신자들의 환대에 전적으로 의존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받기 어렵다는 말씀으로 방랑의 순회설교자들인 자기 제자들도 스승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임을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환대하는 성도의 집에는 머물지만, 그렇지 않은 집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떠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후, 제자들은 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면서,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고, 수많은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합니다(막 6,12-13).
그렇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을 받아 다만 몇몇 병자들만 고쳐주신 것 밖에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받은 제자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수많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막 6,12-13)는 것을 서로 대비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 사건 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상 사역 기간 동안에 행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일들을 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 것이지요.
한 지역에서의 선교 실패가 반드시 다른 지역에서의 실패로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겨자씨, 누룩과 같아서, 처음에는 약하고 작아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 이미 창대한 마지막을 품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약한 데서 완전해지는 하나님의 능력의 비밀은 사도 바울의 삶에서도 드러납니다.
2. 고린도 교회의 적대자들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역사적 예수님을 본 적이 없고,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정작 직접 대해보면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고후 10,10). 바울의 육체적인 겉모습만 본 것이지요(고후 10,7). 그리고 그들은 신적인 계시와 환상을 보았고, 몰아적인 경험을 했다고 자랑했습니다.
오직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신비한 종교체험으로 신앙의 척도를 삼는, 바울의 표현을 따르면, ‘육을 따라’ 평가하고, ‘육신의 일을 가지고 자랑하는’(고후 11,18),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바울은 자신을 변호합니다. 자기도 역사의 예수님을 보았다는 ‘거물급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할 것이 없고, 말에는 능하지 못할는지 모르지만, 지식에는 그렇지 않으며(고후 11,5-6), 다른 어떤 그리스도의 일꾼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하면서, 여러 번 죽을 뻔했다고 합니다(고후 11,23). 그뿐만 아니라,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가,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상들과 계시들을 보았고(고후 12,1),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사람이 말해서도 안 되는 말씀도 들었다고 합니다(고후 12,4).
바울은 지식에서나 영적 체험에서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서 그 어떤 거물급 사도나 그리스도인보다 더 큰 인물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을 제 3자에 빗대어 말한 것은 이런 자랑이 그에게 이로울 것도 없고(고후 12,1), 자랑할 의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쓸데없이 그에게서 보거나 들은 것 이상으로 그를 과대평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6-7).
그래서 바울은 오히려 자기 약점밖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평생 그를 괴롭힌 지병에 대하여 말합니다. 바울이 ‘내 몸의 가시’,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표현하고, 세 번이나 이것이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한 고통이나 무력감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어느 학자는 심한 안질이었다고, 또 다른 학자는 심한 스트레스와 영향실조, 언어장애 또는 간질병이었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병으로 고통을 받았는지 추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세 번이나 주님께 간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고후 12,9).
참으로 놀라운 역설, 신앙의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세 번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는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우리는 강할 때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고,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은혜가 충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의 은혜는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되고, 마음을 비울 때 충만해진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바울이 자기 ‘몸의 가시’, ‘사탄의 하수인’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 가시를 주신 것은 그가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고후 12,7) 의미를 부여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고통의 원인은 다양하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다양합니다. 그러나 고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고통은 전혀 다르게 이해됩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심리학자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빅토르 에밀 프랑클(1905-1997)이 1946년에 출판한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그 생생한 예증입니다. 본래 이 책의 독일어 원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기: 한 심리학자의 강제수용소 경험’입니다. 영어로는 ‘인간의 의미 탐구’로 번역되었지요. 빅토르 프랑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살아서 가족을 찾겠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고압전기철조망에 자기 몸을 던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기도에 대한 응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우리는 목적과 수단을 구별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합당하게 추구하는 목적을 허락하시지만, 우리가 원하는 수단대로 허락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구하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간구를 외면하실 리 없습니다(마 7,11).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수단대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고후 12,9),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작용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 사랑의 관계는 ‘환난도, 곤고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협도, 칼도 끊을 수 없고,’(롬 8,35),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습니다.’(롬 8,38-39).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장 심한 고통이나 가장 낮은 비천함도 견딜 수 있게 해주었고, 바울의 사도적 선교활동을 수행할 힘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롬 1,25).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도가 금방 응답받지 않는다고, 우리 믿음이 아직도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능력은 오히려 약한 데서 강해지고, 완전해진다고 하셨으니, 우리의 약함을, 우리의 믿음 없음을, 우리의 고통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은 충분히 고달프고, 우리는 수많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약하고, 무능하고, 수동적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약함 안에 계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약함을 오히려 기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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