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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모욕을 이기는 길
성경구절 이사야서 50:4-9a/ 빌립보서 2:5-11/ 마가복음서 14:53-65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1-03-28
전주 주의 보좌로 나아갑니다(J. S. Bach)
찬양1부 거룩한 성(Stephen Adams) 특송: 이재은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거룩한 성(Stephen Adams) 특송: 이재은 집사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호산나! 주를 찬송하리로다(M. Teschner)
후주2부 호산나! 주를 찬송하리로다(M. Teschner)
성경본문 이사야서 50:4-9a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빌립보서 2:5-11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서 14:53-65
그들은 예수를 대제사장에게로 끌고 갔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를 뒤따라 대제사장의 집 안마당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하인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온 의회가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그를 고소할 증거를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예수에게 불리하게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의 증언은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더러는 일어나서, 그에게 불리하게, 거짓으로 증언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세우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도 서로 들어맞지 않았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한가운데 일어서서, 예수께 물었다.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데도,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 그러나 예수께서는 입을 다무시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대제사장이 예수께 물었다. "그대는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바로 그이요.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고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들이 더 필요하겠소?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예수는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정죄하였다. 그들 가운데서 더러는, 달려들어 예수께 침을 뱉고,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고 하면서 "알아 맞추어 보아라" 하고 놀려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인들은 예수를 손바닥으로 쳤다.

1.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모욕’(侮辱)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수모(受侮)는 그래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하여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모욕을 당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자기를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여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행위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형태로 보복하려고 합니다. 당한대로, 당한만큼 되갚아 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동태복수의 법칙이 정의를 실현하고,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힘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대부분 무력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한없이 원망하거나 더 나아가 자신을 파괴합니다. 그 반대의 극단에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자신을 모욕한 사람을 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모욕을 이기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길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이 문제와 씨름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분노를 조절하고 화를 다스리는 법,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는 길을 배우고 익혔더라면, 이른바 묻지마 살인, ‘자녀학대같은 끔찍한 사건은 물론, ‘혐오살인’, 테러와 전쟁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도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유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에 의해 선동된 대중에 의해, 예수님은 그에게 불리한 모함(謀陷)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고 했다며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감탄하며 말했을 때,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13,1-2)고 주후 70년 유대전쟁의 막바지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예언하신 적은 있어도, 스스로 성전을 허물고 다른 성전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솔로몬 왕이 7년에 걸친 건축을 마치고 주전 957년에 봉헌하고,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주전 586년에 파괴되었다가, 주전 535년에 재건을 시작하여, 주전 515년에 다시 봉헌된 이른 바 2 성전’, 후에 헤롯 대왕이 주전 20년 경 재건축한 화려하고 장엄한 예루살렘 성전을 도대체 누가 어떻게 허물고 삼일 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망언(妄言)이지요.

 

그런데 자기가 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을 했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악쓰며 대드는 사람들 앞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 그러셨을까요? 아니면 공연히 대꾸했다가 말꼬리 잡으려는 대제사장의 의도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으시려는 전략적 선택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성서학자들은 예수님의 침묵은 살해할 의도를 가지고 음모를 꾸미고 의도적으로 모욕하는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을 경멸’(輕蔑)하는 태도라는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종교지도층 인사들은 처음부터 불법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밤에는 중요한 재판을 열 수 없고, 또 안식일이나 축제일에는 법정심리를 할 수가 없는데도, 그들은 규정을 무시하고 밤에 공회를 연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증거를 가지고 죄인을 심문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피고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사형에 처할 의도를 가지고 증거를 찾으면서 법을 무시하는, 일종의 기획재판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사형판결은 심리한 당일이 아니라 그 다음 날에 내릴 수 있다는 유대 법을 스스로 어기면서 서둘러 판결한 것도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런 법정을 존중할 수 있겠습니까! 강력한 적들의 음모와 거짓 증언과 사형 의도를 가지고 진행되는 유대 최고 법정을 예수님은 침묵으로 경멸하셨던 것이지요.

 

사실 권세가들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고 말했을 때,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13, 31-33)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예수님은 유대의 최고 권력자를 명시적으로 무시하신 것이지요.

유대 왕 헤롯 안티파스를 여우라고 부르신 것도, 그의 교활함보다는 비열함 때문입니다. 교활함은 긍정적으로 보면 지혜와 같습니다만, 비열함은 결코 긍정적 가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 최고 권력자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사역을 끝맺으실 것임을 선언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이런 믿음과 태도, 우리는 빌라도 법정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모함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예수님에게 로마 총독 빌라도는 말합니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19,10).

네 목숨이 내 말 한 마디에 달려 있다는 오만한 권력자의 비아냥거림이자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갈릴리 출신 청년에 대한 경멸입니다.

 

모욕과 경멸은 유대를 식민지배하는 로마 제국 총독의 일상이었습니다. 예속민들을 통제하고, 제 때에 세금을 거두고, 있을 수 있는 동요와 반란을 사전에 진압하기 위해 제국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을 모욕하고 경멸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호의를 사기 위해 뇌물을 바치는 유대 왕과 제사장 임명권을 행사하는 자기에게 종교지도자들의 존경과 복종을 강요하기 위해 총독은 의도적으로 유대 지도자들을 모욕했습니다. 유대 민중의 잠재적 불만과 적개심을 억누르기 위해서도 경멸과 공포정치가 동원되었습니다. 유대 지도층 인사들은 기득권 유지 때문에, 유대 민중은 폭력적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감히 저항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 총독 앞에 잡혀온 예수님은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빌라도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19,11).

 

그렇습니다. ‘경멸은 물리적으로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 약자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만이 아닙니다. 힘은 없지만 정신적으로 우월한 사람, 가진 것은 없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도 취할 수 있는 태도이지요. 화려하게 입고 호사스럽게 사는 왕보다 낙타 털 옷을 걸치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고 사는(1,6) 세례자 요한에게 경의를 표하고,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평가할 수 있는 분(7,28), 그리고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보다 들의 백합화가 더 잘 입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분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6,28-29).

 

그런데 이제 스스로 답답해진 대제사장, 예수께서 무언가 말을 해야, 그 말꼬리를 잡아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 것인데, 입을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자, 마침내 한가운데 일어서서 묻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대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데도, 아무 답변도 하지 않소?’(14,60).

그러나 예수님은 입을 다무시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침묵 속에서 복음서 저자들은 제2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고난 받는 종,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53,7)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말꼬리를 잡아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구실을 찾으려는 모함이 통하지 않자, 대제사장은 말머리를 돌립니다.: ‘그대는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14,61).

 

그런데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하시던 예수님, 놀랍게도 이 질문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이요’(14,62).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이제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확언하십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자, 동시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밝히신 하나님의 이름, ‘나는 곧 나다의 메아리입니다.(3,14). 그리고 곧바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14,62).

 

지금 예수님을 심판하는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은 그 분이 다시 오시는 날, 그들이 심판한 바로 그 분에게서 심판을 받으리라는 선언입니다. 지금 비천한 자리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시인한 예수님을 심판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확증하실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놀라고 흥분한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들이 더 필요하겠소?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예수는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정죄하였습니다.

 

유대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이 예수님에게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는 만족감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승천하시고 재림하시는 심판 주와 동일시하는 것이야 말로 신성모독이라고 본 것입니다. 대중의 일부는 예수님에게 달려들어, 침을 뱉고,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면서, 누가 때렸는지 알아 맞추어 보라고 놀려대기 시작했고, 심지어 하인들도 예수님을 손바닥으로 쳤습니다(14,65).

 

침을 뱉고(12,14; 25,9; 30,10), 손바닥으로 치는 것, 그것도 손 등으로 치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가장 모욕적인 경멸행위였습니다.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인 하인들에게 뺨을 맞는 것은 더더욱 참을 수 없는 치욕이지요.

 

2.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극단적인 모욕을 아무런 저항 없이 감수해 내십니다. 아무런 변명도 없이 다만 침묵으로 그 모든 모욕을 견디신 것이지요. 이런 예수님에게서 복음서 저자는 구약성경의 제2 이사야가 증언하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친 사람들을 말씀으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그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으며, 침을 뱉고 모욕하여도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습니다.’(50,6).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은 어떻게 그런 모욕과 치욕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2 이사야는 그가 모욕을 당해도 마음 상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50,7), ‘아침마다 귀를 깨우치시어 제자처럼, 말씀을 알아듣게 하시는주님께서(50,4), 자기를 도우시고, 의롭게 하시면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50,78).

 

새번역은 학자처럼이라고 번역했으나,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림무드’(limmud)라는 낱말은 학교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어, 제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직무는 주님의 말씀을 제자처럼 듣고, 말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침마다 귀를 열어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말씀으로 지친 사람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인 예언자의 직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종이 까닭 없이 비난과 모멸, 구타와 욕설을 당한다는 것인데, 그는 이 모욕을 자기를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각오하고 견디어 냈다고 합니다. 모욕을 피하지도 않았고, 도망치지도 않았다는 것이지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이 모욕을 각오하고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은 모욕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중에 이 치욕을 벗겨 주리라는 기대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를 의롭다고 인정함으로써, 지금 당하는 비난과 모욕을 견딜 수 있게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모욕과 비난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2 이사야 예언자가 증언한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이나, 모욕 받는 예수님의 침묵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과 조롱과 모욕은 그의 제자들이 앞으로 어떤 모욕을 당할 것인지를 미리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저자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벧전 2,19-21)

 

사도 바울도 빌립보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2,5-9).

 

그렇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할지라도 참으라고, 우리보다 앞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라고, 그리스도인은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신 주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벧전 2,23).

 

모욕을 모욕으로 갚는 것이 정의롭고,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있으나, 결코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욕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두려움이나 증오에서가 아니라, 참음과 소망에서 옵니다. 그리고 그 참음과 소망은 하나님은 반드시 정의롭게 심판하신다는 믿음에서 옵니다. 이런 믿음에서 오는 인내와 소망이 우리 자신은 물론 모욕하는 사람도 파괴하지 않게 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면서, 참을 수 없는 모욕 당해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때 마다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죽기까지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정의롭게 심판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여러분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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