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다섯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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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사람
성경구절 예레미야서 31:31-34/ 히브리서 5:5-10/ 요한복음서 12:20-33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1-03-21
전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F. Couperin)
찬양1부 예수 나를 오라 하네(J. S. Norris) 특송: 김홍태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예수 나를 오라 하네(J. S. Norris) 특송: 김홍태 집사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주가 지신 십자가를 자랑하노라(I. Conkey)
후주2부 주가 죽으신 십자가(L. Mason)
성경본문 예레미야서 31:31-34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히브리서 5:5-10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요한복음서 12:20-33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에게로 가서 청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로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께 그 말을 전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거기에 서서 듣고 있던 무리 가운데서 더러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고, 또 더러는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이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이다. 내가 땅에서 들려서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가 당하실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암시하려고 하신 말씀이다.


1. 죽음은 삶과 동시에 시작되고, 살아 있는 존재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두렵게 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때와 형태입니다. 너무 이른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억울한 죽음은 우리를 분노하게 합니다.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드는 듯이 평안한 죽음, 모두가 원하는 것이고, 고통스럽고 한 맺힌 죽음, 모두가 피하고 싶은 죽음이지요.

 

예수님은 자신이 언제, 어떤 죽음을 죽을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하여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8,31; 9,31)임을, ‘그들이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사람들에게 넘겨주어, 이방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10,33-34)임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예고하신 죽음은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고향 갈릴리 지역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규모의 농민 반란과 로마 군대에 의한 진압과 학살, 십자가 처형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셨고, 스스로 목격하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1세기 예루살렘 근처에서 로마 군대가 수 천 명의 사람들을 십자가에 처형한 일에 대해 말해줍니다. 주전 4, 헤롯 대왕이 죽은 후에 2천 명이 처형된 일로부터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에 하루에 500명이 처형된 일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겼습니다.

십자가형은 시민들과 귀족들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노예와 하인, 농민과 산적들, 로마 제국에 저항한 반란자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한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국가권력에 저항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함으로써, 일종의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공포정치의 한 방법이었지요.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은 십자가 위에 그대로 두어 썩게 하거나, 매장하지 않고 내던져 버려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이 정해진 규정이었습니다. 언젠가는 끝날 일이긴 해도, 길고 극심한 고통을 있는 그대로 감내하는 일과, 매장되지 못해 영원한 수치로 남게 된다는 사실은 똑같이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고대인의 정서에 비추어, 십자가형이 주는 최대의 공포는 공적인 애도를 받지 못한다는 것, 적합한 매장의 기회를 빼앗기는 것, 자기 조상들과 영원히 격리된 채 묻히는 것, 유골이 안치되고 영혼이 머물고 후손들이 죽은 이와 함께 음식을 먹기 위해 찾아오는 장소를 전혀 갖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괴롭고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 되신 예수님은(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도 함께 깨어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신 후, 땅에 엎드려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14,32-36).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마태복음서 저자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고 하신 후,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세 번씩이나 하셨다고 합니다(26,38-44). 누가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고 합니다(22,44).

그렇지요. 과연 어느 누가 가까이 다가온 십자가 죽음 앞에서 놀라고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마음이 근심과 괴로움으로 죽을 지경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 죽음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죽음입니다. 육체적 고통만이 견디기 힘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 죽음은 제자의 오해와 배신, 대중의 모함과 선동, 제국의 안정과 질서에만 몰두한 로마 총독과 기득권 유지에만 관심을 가진 유대 종교 지도층 인사들의 결탁으로 진행된 억울한 사법 살인 앞에, 끓어오르는 분노로 차마 눈을 감을 수도 없는 죽음이지요.

 

그러나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왔다. 일어나서 가자.’(14,41-42).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12,23).

 

자기 죽음의 때를 아시는 분의 말씀이지요. 아니 스스로 자기 죽음의 때를 정하신 분의 말씀입니다. 살고 죽는 것이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단호함, 빌라도 총독이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라고 말했을 때, ‘위에서 주지 않으셨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를 어찌할 아무런 권한도 없을 것이오.’(19,10-11)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드러납니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태도이지요(10,28).

 

물론 요한복음서 저자도 예수님께서 다가온 죽음 앞에서 괴로워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12,27)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보내신 분의 일을 아는 사람은 그 일이 성취되어야 할 때도 압니다. 땅에서 들려서 올라가는 일’, 곧 십자가 죽음이고, 는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12,23).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음을 당하는 때가 어떻게 영광을 받을 때란 말일까요? 놀란 것은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인자가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인자가 누구입니까?’(12,34).

 

그리스도는, 구세주는 죽을 수 없습니다. 아니 죽어서도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하고, 다윗 왕의 영광을 회복해야 할 메시아가 죽을 수는 없지요. 게다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2. 그런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을 때는 불의가 심판받고, 폭력은 더 큰 폭력에 의해서 극복되고, 정의는 오직 힘에 의해 실현되며, 죽음은 영생으로 보답을 받는 때라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진짜 종교는 불교나 유교나 기독교, 이슬람이 아니라, 폭력, 힘이라는 이름의 종교입니다. 폭력은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이기도 합니다. 특히 사법체제가 인권을 보호하지 못할 때, 갈등을 해결하고, 권선징악을 위해, 법보다 가깝다는 주먹, 폭력은 확실히 효과가 있다는 생각에는 좌파나 우파, 진보나 보수, 종교적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 모두 차이가 없습니다. 더 큰 폭력이 작은 폭력을 막을 수 있다는 신념, 정의는 힘에 의해 보장된다는 생각, ‘힘 있는 자는 항상 옳다’(Might makes Right!)는 확신, ‘권력은 권력을 만든다’(Macht macht Macht)는 신앙이 현대인의 의식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의식은 고대 신화에서부터, 오늘의 대중문화와 국제관계에서도 지배적입니다. 신들을 살해하고 그 사지로 하늘과 땅을 만든 고대 바빌론 창조설화에서부터, 열광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전쟁을 통한 평화’, ‘힘의 의한 안보’, 할리우드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액션 영화 등, 이른바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는 이런 의식들을 정당화했습니다.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the myth of redemptive violence)는 심지어 어린이들에게도 각인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서구 문명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성서학자 월터 윙크 박사는 잘 알려진 텔레비전 연재 만화였던 뽀빠이와 블르토’(Popeye and Bluto)를 가지고 분석합니다. 여러분도 어쩌면 다 보셨을 것입니다. 어느 날 블르토가 소리소리 지르면서 발버둥을 치는 뽀빠이의 여자 친구, 올리브 오일을 납치합니다. 소식을 들은 뽀빠이가 달려가지만, 거대한 블르토는 곁에서 올리브가 속절없이 초조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뽀빠이를 형편없이 두들겨 패서 물리칩니다. 우리의 주인공 뽀빠이는 바닥에 납작하게 되었고, 블르토는 올리브 오일을 덮치려고 합니다. 이 마지막 위기의 순간, 돌연히 뽀빠이의 주머니에서 시금치 깡통이 튀어나오고, 그의 입 속으로 시금치가 쏟아져 들어갑니다. 이 놀라운 은총의 힘을 주입받아 변화를 받은 뽀빠이는 간단히 악당을 때려눕히고, 사랑하는 여인을 구출합니다.

 

연속극 회수가 바뀔 때마다 소재만 달라질 뿐, 형식은 언제나 똑 같습니다. 악당의 등장, 선한 주인공의 등장과 패배, 그리고 갑작스런 변화와 초능력, 악당의 폭력적인 제거, 그리고 정의의 승리와 평화의 수립. , 이런 순서로 전개되는 영화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제임스 본드’, ‘슈퍼맨’, ‘슈퍼우먼’, ‘베트맨’, ‘이퀄라이저등등.

 

그런데 문제는 주인공의 이름만 바뀔 뿐, 바빌론 창조설화에서부터 우리 시대의 대중매체까지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라는 근본구조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혼돈과 악을 상징하는 강력한 힘이 공격해오고, 주인공은 방어적 전투에 나서고, 그러나 틀림없이 무참한 패배를 당하고, 악의 힘은 승리의 욕망달성에 만족하지만, 주인공은 무력화되어 도망을 치고, 결국 힘을 되찾은 후 다시 나타나 마지막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고 혼돈을 물리쳐서 질서를 되찾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악당은 언제나 죽거나 패하지만, 영웅은 결코 죽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에서 사람들은 카타르시스(Catharsis)를 경험합니다. 어쩌면 현실에서 그러지 못하니까 영화를 통해서라도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인지 모르지요. 그러나 어느 사이에 악을 물리치는 폭력은 언제나 정당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더욱 굳어지면, 신념이 되지요. ‘논리적으로 따지거나, 설득하거나, 흥정하거나, 혹은 외교적 완곡함 따위는 결코 장려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악과는 어떤 타협도 용납될 수 없고, 악은 완벽하게 제거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합니다.

 

이런 생각은 사실 민주주의, 사법체제에 대한 불신 혹은 거부입니다. 공적 수단이 마땅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대하고, 갑자기 나타난 메시아적 영웅은 직접적이고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지루하고 무기력한 공적 절차보다는 빠르고 폭력적인 해결방식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즉결처분식의 정의를 선호하면서 메시아적 구원자를 갈망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적 환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그러니 예수님이 메시아가 십자가 죽음을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변의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배웠는데, 어떻게 당신은 인자가 십자가 죽음을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느냐고 물었던 것이지요(12,34). 그들은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는 말씀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12,23). 영광은 승리자의 몫이지, 패배자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십자가 죽음의 때가 영광 받을 때가 될 수 있단 말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사명이 완결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에 의하면, 십자가 죽음과 함께 이 세상이 심판을 받고,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쫓겨날 것이며(12,31),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려올 것이기 때문입니다(12,32).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일반적인 속죄론이나, 개인을 위한 대속적 구원이라는 종교적 의미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도덕적 죄의 용서나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의미로 십자가를 이해하지 않습니다. 요한에게 십자가 사건은 세상을 심판하고, 세상의 통치자를 몰아내는 정치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 사건은 세상과 통치자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폭력의 구원신화를 실현할 정치적 메시아, 영웅과 다윗 왕국의 회복에 대한 기대에 사로잡힌 세상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심으로써 세상을 심판합니다. 폭력은 오직 더 큰 폭력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는 신념과 제도화된 국가폭력으로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인간 위에 군림하는 로마 총독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18,36)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런 세상의 통치자는 주님의 나라에 속해 있지 않다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모든 형태의 폭력의 실체를 드러내셨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살해의지와 음모, 한 때는 기적을 보고, 기적을 구해 호산나를 외쳤지만, 이제는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선동된 눈먼 대중의 외침과 모함, 제국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 사법정의를 이미 포기한 로마 총독 빌라도의 무관심, 단지 명령에 따라 예수님을 고문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인들의 벌거벗은 폭력의 실체를 모두 다 폭로하신 것이지요.

 

예수께서 이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던 이유, 그것은 그가 죽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12,24),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요.: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12,26).

 

섬김은 따름으로 인도하고, 그 따름의 마지막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사람을 아버지께서 높여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12,26). 새번역은 아버지께서 높여주실 것이라고 번역했는데, 헬라어는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높여준다는 것이 자칫 신분상승으로 오해될 수 있어, ‘귀하게 여긴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철저하게 비폭력의 길을 가신 주님, 악에 대한 도피나 굴복, 혹은 폭력적 보복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을 통해 원수는 물론,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이끌어오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죽음이 따르겠지만, 마침내 주님께서 그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영생을 보전하며, 주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는 영광에 참여시킨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아는 대로, 요한복음의 이 이야기의 처음은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이방인인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제자들에게 부탁한 사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만나고자 하는 그리스도는 종교적 황홀경이나 신비한 체험과 이적을 통해서 만나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를 따름으로써, 다시 말해 십자가 죽음에로 인도하는 섬김의 길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섬김의 길은 폭력을 통한 정의와 정의를 통한 평화 사이의 선택이고, ‘승리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pax romana)와 정의에 의한 평화,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 사이의 선택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악한 국가 권력에 의해 처형당하신 것이지, 우리의 개별적인 죄들을 위하여 자살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지,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사순절에 그리스도인은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로 잔혹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체제안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학살과 파괴를 정당화하는 악한 세력들의 악마적 실체를 폭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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