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정의와 공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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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출애굽기 16:2-5/ 빌립보서 1:21-30/ 마태복음서 20:1-16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09-20 |
전주 | 주님을 찬양하나이다(G. Corrette) |
찬양1부 | 나 주를 찬양하리라(Philip Landgrave) 특송: 이예랑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
지휘자 | |
반주자 | |
후주1부 | 만복의 근원 하나님, 찬송 성부, 성자, 성령(L. Bourgois) |
후주2부 | 만복의 근원 하나님, 찬송 성부, 성자, 성령(L. Bourgois) |
성경본문 |
출애굽기 16:2-5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먹을 것을 하늘에서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이 날마다 나가서, 그날 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그들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하여 보겠다. 매주 엿샛날에는, 거두어들인 것으로 먹거리를 준비하다 보면, 날마다 거두던 것의 두 배가 될 것이다." 빌립보서 1:21-30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확신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가면,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 때문에 많아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또한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이고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하는 것과 똑같은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으며,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지금 소문으로 듣습니다. 마태복음서 20:1-16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그는 품삯을 하루에 한 데나리온으로 일꾼들과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원으로 보냈다. 그리고서 아홉 시쯤에 나가서 보니, 사람들이 장터에 빈둥거리며 서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적당한 품삯을 주겠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일을 하러 떠났다. 주인이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 나가서 그렇게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주인이 또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하고 물었다.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이 되니, 포도원 주인이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기를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치르시오'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을 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들은 받고 나서,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보시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 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
1. 포도원 주인과 날품팔이 노동자들에 대한 비유의 초점은 주인의 긍휼과 자비에 있다는 것이 주석학자들의 해석입니다. 날품팔이 노동자들을 다섯 차례에 걸쳐 직접 찾아가 고용하고, 그들 모두에게 꼭 같이 하루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그들의 생존권을 보장한 자비로운 포도원 주인처럼 하나님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해석하면, 우리는 마태가 이 비유를 굳이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수난 예고 직전에 이 비유를 배치한 이유, 게다가 이 비유의 끝에 첨부된 난해한 마지막 문장,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마 20,16)는 말씀을 덧붙인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포도원 주인의 긍휼함과 자비를 드러내면서 평범하게 전개되는 비유의 중간에 우리는 놀라운 사건에 부딪치게 됩니다. 사건은 임금을 지급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별이 뜰 무렵, 주인은 맨 마지막에 온 일꾼들부터 품삯을 지급하는데, 당시 팔레스타인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게 합니다.
이스라엘 전통에 따르면, 품값은 일한 그 날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주어야 했습니다(레 19,13). 가난한 사람들은 그 날 품삯을 그 날 받아야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족에게만이 아니라, 성문 안에 사는 외국인 가운데서,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소한의 기본소득으로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가난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여 그들이 원망하면서 주님께 호소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가 돌아간다는 것이 신명기 법규였습니다(신 24,15).
그런데 이것을 본,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을 한 일꾼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생각이지요. 늦게 온 품꾼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노동했고, 게다가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자기들을 겨우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들과 꼭 같이 대우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노동 시간과 강도에 상관없이 모든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똑같이 지급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와서 가장 힘든 시간에 가장 긴 시간동안 노동한 일꾼들이 주인에게 투덜거립니다. 그들은 호칭 없이 더욱이 존칭 없이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주인에게 분개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보시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성경원문에 따르면, 주인이 품꾼을 ‘친구여’(hetairos)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이름을 모르는 상대에게 말을 걸 때 널리 쓰는 형태이자, 낯선 이를 공손히 부를 때 쓰는 칭호입니다. 존칭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분개하고 투덜거리는 일꾼들 가운데 이름을 모르는 한 사람을, ‘친구여’라고 호칭함으로써, 포도원 주인은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자신이 법적으로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말합니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마 20,14-15).
새번역은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라고 번역되었으나, 헬라어 성경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선하기 때문에 당신 눈에 악하오?’입니다. 이 비유는 불평하는 사람의 ‘악한 눈’과 주인의 ‘선함’ 사이의 대립으로 끝납니다.
2. 자, 그렇다면, 이른바 ‘포도원의 품꾼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비유의 진정한 초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전통적으로 이 비유는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과 은혜, 그리고 정의에 초점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듣는 청중을 – 그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었건 예수님의 제자들이었건 - 놀라게 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아니라, ‘마지막에 온 날품팔이 일꾼들에게도 그 많은 품삯’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맨 나중에 온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씩 지급하는 것을 본 다른 품꾼들, 특히 가장 먼저 와서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사람들이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어찌 그들만 그렇게 생각했겠습니까? 중간에 온 품꾼들도 그러면 우리에게도 조금씩 더 주겠거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가장 늦게 와서, 가장 짧은 시간동안 노동을 한 품꾼들에게 온전히 하루분의 품삯을 지급하더니, 먼저 와서, 가장 오랜 시간동안 일한 품꾼들에게도 꼭 같은 임금을 지급한 것이지요. 불평하는 노동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사실 주인은 법적으로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합의한 임금에 대하여 노동자들도 불평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온 품꾼들에 대한 주인의 자비와 배려가 못마땅했던 것이지요. 같은 날품팔이 신세이지만, 그래도 나는 가장 늦게 인력시장에서 팔려온 저 늙고 약한 날품팔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당신이 고용하지 않았으면, 누구도 고용하지 않았을 이런 인간쓰레기와 우리를 똑같이 대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내가 더 능력 있고, 더 많이 일했으니,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처사는 시장논리에 맞지 않고, 아니 시장논리를 거스르는 것이고, 정의롭지도 않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의 개념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5-BC 323)입니다. 그는 정의의 본질이 평등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의를 ‘평균적 정의’와 ‘일반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로 구분했습니다. ‘배분적 정의’는 각자가 개인의 능력이나 사회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가치로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 적용됩니다. 그리고 공정성(fairness)을 구현하면, 평화로운 공동체를 낳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공정성이란 사회적으로 이미 규정된 차이, 곧 출생 성분, 소유 재산, 개인의 역량과 관련한 차이를 전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우는 정의란 질서유지입니다. ‘status quo’, 현상유지이지요. 이런 정의는 안정성을 유지시켜 주는 규범과 제재를 낳습니다. 따라서 정의는 응보적 정의, 곧 사회 안전과 통합에 순응하는 자에게는 보상을, 위반하는 자에게는 형벌을 내리는 체계를 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배분적 정의’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에 관심합니다. 다시 말해, 공정한 배분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긍휼’과 권리의 회복이 정의라는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긍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함’(raham)이 같은 낱말인 ‘자궁’(태)로 변용되고(이 49,15), 그래서 ‘긍휼’은 ‘자궁 같은 모성애’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예언서들은 ‘정의와 공의’(justice and righteousness)를 짝으로 묶어 사용함으로써, 공평한 배분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회복적 정의’를 ‘공의’ 개념으로 포함시킨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 없는 정의의 무자비함’과 ‘정의 없는 사랑의 무력함’을 극복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진정한 관심은 모든 품꾼들의 기본적 생존권의 보장에 있었습니다. 오늘도 공쳤다는 허탈함과 좌절감을 안고 종일 염려하며 기다리는 아내와 배고픈 자식들이 있는 집으로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품꾼들에게도 하루 품삯을 주어,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이고,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3. 최근 우리사회에서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의 여파로 어려워진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 지급한 긴급재난지원비를 둘러싼 논란을 생각하게 합니다. 국민 모두에게 지급해야 한다, 아니다, 선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다툼이지요.
며칠 전, 머리를 깎으러 간 미용실에서 들은 대화, 왜 ‘일하는 사람들이 내는 세금으로,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느냐, 국민모두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흥분하면서, ‘빨갱이 정부라 그런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도 누리는 보편적 복지는 말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만 혜택이 가는 것은 복지의 과잉이라면서, 종북 좌파정부라 그런다는 것입니다.
긴급재난구호가 왜 색깔과 관계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노동시간에 따라 임금을 차등적으로 지급하지 않고, 노동 강도와 노동력을 고려하지 않고 꼭 같이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무시하는 빨갱이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마태의 이 비유에 나오는 하늘나라는 공산주의국가이고, 하나님은 빨갱이 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가 질문으로 끝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로 새번역은 번역했으나, 헬라어 원문은 ‘내가 선하기 때문에 당신 눈에 악하오?’입니다. 이 질문은 포도원 주인의 질문이자, 동시에 예수께서 청중들에게 남긴 물음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 가운데서도 약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그들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못마땅하게 보이느냐는 물음이지요. 하나님의 선이 당신들의 눈에는 악하게 보이느냐는 물음입니다.
이렇게 물으심으로써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경쟁과 차별의 구조 위에 세워진 경제 질서로부터 변두리로 밀려난 사회적 약자들을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눈으로 볼 것인지, 자기 자신의 ‘악한 눈’으로 볼 것인지 청중들에게 선택하게 하신 것이지요.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요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덧붙여 난해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마 20,16).
그런데 이 말씀은 마태복음 19장 30절의 말씀을 거꾸로 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베드로가 하늘나라에서 무엇을 보상받을 수 있느냐고 물은 질문에, 예수님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땅을 버린 사람은 백배나 받을 것이요, 또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마 19,29-30)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본에는 여기에 ‘부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비유가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과 관계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첫째와 꼴찌를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수님의 제자들로, 혹은 처음 제자들과 나중에 믿게 된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첫째와 꼴찌가 누가 되었든, 예수님은 언제든지, 그 순서가 바뀔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첫째인 제자들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면서, 공동체로서 살 수 없다면, 그들을 악한 눈으로 본다면, 그들은 꼴찌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부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는 다른 사본에 첨가된 이 말씀은 첫째가 꼴찌가 된다는 말이 단지 경고가 아니라, 심판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만 택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같은 날품팔이 신세인데도 그들 사이에 능력과 임금 문제를 가지고 분열과 거리두기와 차별이 일어나는 것을 이 비유에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편파적인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하였으나, 가난함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4.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축재(蓄財)에 대한 욕망입니다. 출애굽 후, 광야에서 이집트 땅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신 하나님은 그들이 ‘그날 그날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게 함으로써, 그들을 시험하셨다’고 합니다(출 16,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시험하셨을까요? 몰래 더 많이 모은 것들을 썩게 하심으로써(출 16,19-20), 축재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많이 거둔 사람이나 적게 거둔 사람이나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함께 살 수 있게 되는 공의로운 세상을 만들 것인지, 아니면 불평등한 세상을 만들 것인지,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신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어 들였는데,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고 합니다(출 16,17-18).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사적인 축재는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것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생존권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그리고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지요.
최근 한 달 가까이 지속된 ‘대한의사협회’의 의사집단휴진 사태가 있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사들이 집단휴진을 하는 것은 물론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다행히 타협이 이루어져 의사집단휴진 사태가 진정되었지만, 코로나 사태가 더 확대되고 위중한 시기에, 국민의 목숨을 볼모로 한 의사들의 집단휴진 사태는 아무리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라고 해도, 국민의 눈에는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행위로 비쳤습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코로나와 목숨을 걸고 헌신해온, 아니 지금도 헌신하는 수많은 의료진들의 노고와 명예를 손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부가 ‘대한의사협회’와 사전에 협의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공공의대 설립에 대한 반대는 결국 전문직 특권계층의 ‘기득권 챙기기’라는 비난을 받게 했습니다. 게다가 세 차례나 의사 시험을 거부한 학생들을 타이르지는 못할망정, 추가 시험 기회를 보장하지 않으면 집단행동을 불사하겠다고 교수들이 나선 것은 도대체 의학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 회의하게 했습니다. 정부가 소위 SKY 대학이나 기존의 의과대학 정원을 늘리는 방식으로 접근했다면 혹시 집단행동을 하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마치 공공의대를 졸업한 의사들은 무능한 의사인 것처럼, 의사협회가 ‘전교 1등 의사냐, 무능한 공공의사냐?’라는 홍보물을 돌린 것을 보면, 의사 집단내부의 뿌리 깊은 엘리트 의식과 양극화를 오히려 조장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의료는 공공재가 아니라거나, 공공의료는 공산주의, 사회주의라고 주장했다고 하니, ‘의협’은 정치집단이 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의료기관 중 공공병원의 비중은 2018년 통계로 고작 5.7%라고 합니다. 다른 부문도 마찬가지인데, 국공립 어린이집은 전체의 11.5%, 공공임대주택재고율은 7.5%에 불과합니다. 국공립 어린이집에 자녀를 맡기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맞벌이 부부, 평생을 모아도 자기 집 가질 수 없는 젊은 세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데, 공공임대주택 들어오면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공공성 의식이 어느 수준인지 가늠할 수 있게 합니다. 신진욱 교수(중앙대 사회학과)의 지적대로, 지금 한국사회의 문제는 공공성의 과잉이 아니라, 극심한 결핍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길과 공원, 대중교통, 물과 전기, 교육, 모두 공공의 것입니다. 더욱이 공기와 햇볕, 자연이야 두 말할 필요 없이 인류 전체를 위한 공공재이자,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한 공공재입니다. 누구도 사유화해서는 안 되고, 또 사유화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지구적 차원에서 공공재에 대한 약탈과 파괴, 독점과 사유화가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 피해는 온 인류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심한 피해는,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의 피해자들이 대부분 노약자, 기저질환자, 가난한 사람들인 것처럼,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는 권리의 평등한 배분이 아니라,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추면서 실현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심판인 것입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배부르게 되지만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굶주리게 될 것이고,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웃게 되지만 지금 웃는 사람들은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눅 6,21-25).
예수님은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마 19,29-30), ‘부름 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경고하신 것이지요.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회적 대타협은 평등한 배분적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성경의 증언처럼,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 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푸는 데서 가능한 것입니다(시 82,3). 왜냐하면,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이 42,3).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빌 1,29)고 말합니다. 교회는 믿는 특권은 누리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동일시하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하여 고난 받는 특권은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가 우리나라의 사회적 대타협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누려온 믿는 특권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특권을 기뻐해야 합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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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4 | 2025-05-18 | 부활절 다섯째 주일 | 하나님의 집 | 임영섭 목사 |
1293 | 2025-05-11 | 부활절 넷째 주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 | 임영섭 목사 |
1292 | 2025-05-04 | 부활절 셋째 주일 | 한 아이와 하나님 나라 | 김진 목사 |
1291 | 2025-04-27 | 부활절 둘째 주일 | 복음의 대가 | 임영섭 목사 |
1290 | 2025-04-20 | 부활주일 |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 임영섭 목사 |
1289 | 2025-04-13 | 종려주일 | 장애를 가진 하나님 | 임영섭 목사 |
1288 | 2025-04-06 | 사순절 다섯째 주일 | 이웃을 위한 향유 | 임영섭 목사 |
1287 | 2025-03-30 | 사순절 넷째 주일 |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 | 임영섭 목사 |
1286 | 2025-03-23 | 사순절 셋째 주일 | 새 이스라엘의 사명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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