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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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사무엘기상 3:1-10/ 고린도전서 6:12-20/ 요한복음서 1:43-51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1-01-17 |
전주 | 주 예수여 우리와 함께하소서(G. Böhm) |
찬양1부 | 주님을 찬양하라(G. F. Händel) 특송: 송승연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
지휘자 | |
반주자 | |
후주1부 |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Salis. J. Vail) |
후주2부 | |
성경본문 |
사무엘기상 3:1-10 어린 사무엘이 엘리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이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였다. 그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른 새벽,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환하게 밝혀져 있을 때에, 주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그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고서, 곧 엘리에게 달려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사무엘이 다시 가서 누웠다.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얘야,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이 때까지 사무엘은 주님을 알지 못하였고,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난 적도 없었다. 주님께서 사무엘을 세 번째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소년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사무엘에게 일러주었다. "가서 누워 있거라. 누가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이 자리로 돌아가서 누웠다. 그런 뒤에 주님께서 다시 찾아와 곁에 서서, 조금 전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고린도전서 6:12-20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주님은 몸을 위하여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살리셨으니, 그의 권능으로 우리도 살리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떼어다가 창녀의 지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창녀와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영이 됩니다. 음행을 피하십시오. 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자기 몸 밖에 있는 것이지만, 음행을 하는 자는 자기 몸에다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요한복음서 1:43-51 다음 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려고 하셨다. 그 때에 빌립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빌립은 벳새다 출신으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고향 사람이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빌립이 그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시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나다나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1.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한편으로 고린도에 널리 퍼져있던 음행과 성적 방종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한 금욕주의로 몸을 폄훼하고 학대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방종(放縱)주의와 금욕(禁慾)주의는 인간의 몸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인데, 영지주의의 물질에 대한 경시는 때로는 ‘나는 모든 것을 할 자유가 있다’는 도덕적 무관심주의로, 때로는 엄격한 금욕주의로 이끌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상극적으로 보이는 이 두 태도는 사실, 몸에 대한 같은 생각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것은 몸이 자기 자신의 것이고, 그러므로 자기 것을 자기 뜻대로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영적 체험을 통하여 신성과 신적 지혜, 소피아를 얻은 영지주의자들에게 몸은 억압되어야 할 대상이거나, 혹은 어떤 도덕률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것이었습니다.
2.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런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은, 고린도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고린도는 지금의 그리스 본토와 펠레폰네소스를 연결하는 지협의 서남단에 있습니다. 비록 토지는 비옥하지 않았지만, 남북으로는 육지와 연결되어 있고, 동서 양 옆구리에 바다를 끼고 있어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그런데 주전 146년 로마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시민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아넘긴 후, 도시를 파괴함으로써 그 후 100년 동안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데, 주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따서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었습니다. 이 식민지 건설은 그리스의 로마화를 향한 결정적인 첫걸음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이 지역은 그리스에서 로마제국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로마 제국문화에 완전히 동화된 헬레니즘적 도시문명을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이 지역을 군사적으로 안정시키는 동시에 도시화를 통해 보다 효율적인 행정체계를 이루고, 경제적 착취를 용이하게 했으며, 동부 제국과 활발한 무역과 교류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런 식민지 정책에 힘입어 고린도는 다시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주요 해상 교차로에 위치해 있다는 장점 때문에, 고린도는 무역과 정치적 소통의 중심이었고, 상업을 통해 부유한 도시로 부러움을 샀습니다. 특히 청동 제품이 유명했고, 수공업으로 생산된 소형 일용품이나 장식품들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로마 식민지들은 퇴역군인들이 정착한 반면, 고린도로 보내진 사람들은 많은 경우 로마의 도시빈민 출신과 해방된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이탈리아 시골지역에 있던 자신들의 농장으로부터 강제이주당한 사람들이었고, 해방된 노예들은 로마가 소아시아, 시리아와 유대, 그리스를 정복할 때 정복당한 사람들이었거나 그 후손들이었습니다. 고린도에 유대인들과 회당이 있었다는 것도 이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고린도의 사회문화적 에토스는 철저한 개인주의였습니다. 낮은 출신 신분 때문에 고린도 사람들은 신분에 집착했고, 매우 경쟁적이었습니다. 1세기 말에 이르러 고린도는 모든 도시들 가운데 가장 경쟁적인 도시라는 평판을 얻었고, 경제적인 부분에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무슨 짓이든지 하는 장사꾼들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도시는 외형상 호화롭고 휘황찬란했지만, 그 안의 시민들은 품위는 물론 교양도 없고, 타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빈부격차는 말할 수 없이 양극화되었고, 정신적으로도 공허한 도시였습니다.
3.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아테네를 방문한 이후, 주후 50년 3월경에 고린도에 도착했는데(행 18,1), 그곳에는 이미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고, 바울은 비교적 자유롭게 회당에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유대인들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바울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선교로 방향을 바꾸어, 주후 51년 9월까지, 약 18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 후 시리아를 거쳐 에베소에 도착한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3개월 동안 머물렀는데,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체류하던 주후 53년 말 혹은 54년 초에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바울에게 큰 상심과 슬픔을 안겨주었음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여러 차례 방문하려고 했다는 것과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가 사실은 네(4)통이나 되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이 네 편지들 가운데 고린도 전-후서, 두개의 편지만이 보존되었고, 다른 두통의 편지는 유감스럽게 분실되었습니다.
주후 50년대의 고린도 교회는, 다른 초대교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아직 온전한 구조와 체제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된 교인들은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고전 1,12). 구성원들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도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고전 1,26). 강제이주당한 빈농출신과 해방된 노예 등, 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였는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도 내가 높으네, 누구는 낮으네 하면서 자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기와 다툼은 더 심해졌습니다(고전 1,27-29; 3,3). 툭하면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을 가지고 세상 법정으로 가서 다투는 신도들도 있었고(고전 6,1-7),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는 문제 때문에 다툼이 생겼습니다(고전 8,1-13). 계모와 사는 아들도 있었고(고전 5,1), 음행과 탐욕, 우상숭배와 약탈 등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났던 것입니다(고전 6,8).
사도 바울을 화나게 만드는 것은 그런 성적 방종 자체만이 아니라, 그런 일에 대하여 교회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고전 5,2).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음행이나 탐욕을 부리거나, 약탈하거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세상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면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바울은 인정합니다. 바울이 충격을 받은 것은 교회 안에도, 세상보다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이 실천되고, 세상을 심판해야 할 교회 안에서조차 음행을 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을 숭배하고, 사람을 중상하고, 술 취하고, 약탈하는 신도들이 있다는 것이지요(고전 5,10-11).
이런 많은 도덕적 문제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음행과 금욕이라는 몸에 대한 극단적인 입장의 대립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한편에는 신적 세계에 대한 지식, 소피아를 얻은 사람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허용된다는 생각에 당시의 관습적인 도덕률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다. 그러니 내 소유를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자신의 몸은 자기에게 속한 것이니, 내 몸을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주장하면서, 음행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일종의 자유방임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고전 10,23-24).
바울의 주된 관심사는 ‘공동체의 연대’이자 ‘상호호혜’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2천 년 전의 고린도와 비슷합니다. 언어표현에 조금 차이가 있을 뿐, ‘천민자본주의’, ‘졸부들의 천국’, ‘안하무인적 오만함’, ‘무한경쟁’, ‘빈부양극화’, ‘성차별’, ‘성적 방종’, ‘황제(권력)숭배’, ‘우상(황금)숭배’, ‘그치지 않는 소송전’ 등 고린도를 지배했던 에토스와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현실의 에토스에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제시했던 해결책, 곧 공동체의 연대와 상호호혜도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가장 현실적인 해답이라고 생각됩니다. 경쟁과 ‘성과급 이데올로기’라는 우상 숭배에 사로잡힌 현대의 시장경제 안에서 함께 잘 사는 방법으로 ‘콤무니타스 이코노미’를 제안하는 이탈리아 정치경제학자 루이지노 브루니도 바울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린도에는 엄격한 금욕주의를 주장하면서, 육체를 억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리실 것이다’(고전 6, 13)고 하면서 음식과 육체 모두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몸은 참 자아, 영혼 또는 영으로부터 분리된 열등한 존재의 차원이었던 반면, 바울에게 몸은 타인과의 실제적인 상호관계 속에 체현된 전체로서의 자아였습니다. 바울이 의도적으로 육와 몸을 분리하여 말하는 것은, 육을 폄훼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육이 물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전체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벗어나 인간중심적인 삶을 영위하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의미한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와 영혼, 사멸할 세상 안에서의 삶과 영원불멸한 영적 삶을 분리하는 관점을 거부합니다. 육은 몸을 구성하고, 몸은 육을 포함한 전인적 존재입니다. 아니 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을 모시는 성전입니다(고전 3,16-17). 우리의 몸이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 되는 것은 우리 몸이 더 이상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몸 전체가 하나님의 영의 통제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몸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소유권이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우리를 값을 치르고 사신 분, 곧 자기 목숨을 바쳐 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지요(고전 7,23). 이로써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철저한 개인주의를 반박하면서, 인간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과의 관계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인간의 자아는 몸으로 구현되는 것이었고, 삶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고 관계적이며 역사적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에게 구원은 몸적(전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으로부터의 개인적 초월이 아니라,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를 완성하는 것이며, 공동체적 연대성 안에서 사회적이고 몸적(전인적)인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몸으로 해야 할 일은 음행과 같이 우리 육체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고전 6,20).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 5,13)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개인적 욕망충족의 자유가 아니라, 섬김을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같은 편지에서,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은 우리가 전인격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사도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고전 9,12-18),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그들의 자유에 대한 자제와 권리에 대한 포기를 호소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권리의 포기는 약한 자들, 끈기가 없는 사람들, 끈질기지 못한 사람들,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이 취하는 비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권리의 포기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오직 진정으로 강하고 관대한 사람, 무슨 일이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고전 10,31).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는 주장은 단지 육체를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여기고, 자유를 방종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아닙니다. 우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주장은 금욕주의를 강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는 것은 우리의 몸은 하나님, 이웃, 자연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장회익 교수님의 주장처럼, 우리의 삶은 ‘온 생명’에 속해 있고, 생명의 그물망에 상보(相補)적, 상생(相生)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4. 오는 1월 20일이면, 우리나라에서 ‘코비드-19’ 확진자가 처음 나온 지 꼭 1년이 됩니다. 2021년 1월 16일 현재, 전 세계 총 감염자는 누적 94,263,851명,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수는 누적 2,016,290명으로 집계되었고, 우리나라 총 누적 감염자는 71,820명, 사망자는 1,236명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는 못하지만, 이 시간에 코비드-19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투병중인 환자들, 목숨을 걸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방역활동에 나선 의료진들과 공직자들, 방역에 동참하면서 경기침체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영세자영업자들, 과로로 쓰러지는 택배기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코비드-19’와 같은 이른바 인수공통감염병과 기후위기는 발전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자연파괴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것은 오만한 인간중심주의의 결과인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고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 되려고 했을 때, 인간은 죽음과 함께 지배하는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바울이 말했듯이(롬 5,17; 6,23), 인간이 하나님과 자연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자유를 무책임한 방식으로 행사하는 것은 결국 모든 피조세계의 파멸로 인도할 것입니다. ‘내 몸이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거나,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상관이냐’는 오만한 태도는 처음에는 자기 자신의 몸을, 나아가 생명의 관계망을, 그리고 마침내 하나 뿐인 지구행성을 파멸시킬 것입니다.
하나 뿐인 지구를 살리고, 파괴된 인간과 자연의 관계, 분열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길은, 우리 몸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겸손, 인간에게 배꼽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현실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도의 물리학자이자, 100만 명의 농부들과 유기농 농사를 일으키고 있는 반다나 시바는 ‘에고(ego)에서 에코(eco)로’를 제시합니다. 에고는 가장 궁극적인 자기중심적 사고이고, 스스로와 타인을 분리하면서 탐욕이 한정 없이 자라게 합니다. 그러므로 탐욕으로 움직이는 ‘자기중심적 세상’(egocentric world)에서 나와 지구의 삶을 평화로이 영위하는 ‘생태중심세상’(ecocentric world)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태중심세상에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의 것이 아닙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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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 | 2025-06-29 |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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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 | 2025-06-15 |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 | 누구를 위한 상속인가? | 임영섭 목사 |
494 | 2025-06-08 | 성령강림주일 | 하나님 안에서 | 임영섭 목사 |
493 | 2025-06-01 | 부활절 일곱째 주일 | 하나님의 의 | 임영섭 목사 |
492 | 2025-05-25 | 부활절 여섯째 주일 |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 임영섭 목사 |
491 | 2025-05-18 | 부활절 다섯째 주일 | 하나님의 집 | 임영섭 목사 |
490 | 2025-05-11 | 부활절 넷째 주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 | 임영섭 목사 |
489 | 2025-05-04 | 부활절 셋째 주일 | 한 아이와 하나님 나라 | 김진 목사 |
488 | 2025-04-27 | 부활절 둘째 주일 | 복음의 대가 | 임영섭 목사 |
487 | 2025-04-20 | 부활주일 |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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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 | 2025-04-06 | 사순절 다섯째 주일 | 이웃을 위한 향유 | 임영섭 목사 |
484 | 2025-03-30 | 사순절 넷째 주일 |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 | 임영섭 목사 |
483 | 2025-03-23 | 사순절 셋째 주일 | 새 이스라엘의 사명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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