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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그리스도는 재림하시는가?
성경구절 여호수아기 24:14-18/ 데살로니가전서 4:13-18/ 마태복음서 25:1-13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11-08
전주 깨어 있어라, 우리를 부르시네(J. S. Bach)
찬양1부 이 세상의 친구들(A. A. Luther) 특송: 유희업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주안에서 기뻐하여라(F. Schubert) 특송: 이예랑 교우, 김유정 집사, 김호 집사, 김준홍 교우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J. M. Black)
후주2부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J. M. Black)
성경본문 여호수아기 24:14-18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당신들은 이제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를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섬기십시오.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백성들이 대답하였다. "주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은 우리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을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우리가 이리로 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고, 우리가 여러 민족들 사이를 뚫고 지나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모든 민족을, 이 땅에 사는 아모리 사람까지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잠든 사람의 문제를 모르고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소망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이미 잠든 사람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십시오.

마태복음서 25:1-13
"그런데,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불은 가졌으나, 기름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자기들의 등불과 함께 통에 기름도 마련하였다. 신랑이 늦어지니,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보아라, 신랑이다. 나와서 맞이하여라.' 그 때에 그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서, 제 등불을 손질하였다.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의 기름을 좀 나누어 다오' 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답을 하였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나 너희에게나 다 모자랄 터이니, 안 된다. 차라리 기름 장수들에게 가서, 사서 써라.'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그 뒤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신랑이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 지난 19921028일에 휴거’(携擧) 현상이 일어나고, 1999년에 세계의 종말이 온다는 다미선교회시한부 종말론’, 이른바 휴거 종말론이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장림이라는 교주가 어니스트 앵글리(Ernest Angley)의 예수 재림소설, ‘Raptured’(‘황홀한이라는 뜻)를 의역하여 만들어낸 휴거는 물론 일어나지 않았고, 세상의 종말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척 가운데 이 휴거 종말론에 빠져 재산을 다 바치고, 가정마저 망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정된 날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휴거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시 가족과 교회로 돌아오겠다고 했으나, 이장림이 사기죄로 구속당해 징역 1년과 26,000달러 몰수형을 당했지만, 그녀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 휴거파 종말론자들 뿐이겠습니까? 유난히도 우리나라에는 그리스도교와 관계된 이단, 사이비 종파들이 난립하여 교회는 물론, 세상을 어지럽게 한 사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전신학대학 허호익 교수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자칭 재림 예수라고 하는 교주들이 50명이 넘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2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문선명에서부터 전도관(한국천부교전도관)의 박태선, 재림예수교회초막절회관의 구인회, 영생교(세계연합승리재단)의 조희성, 하나님의 교회의 안상홍, JMS(기독교복음선교회), 천국복음전도회, 광주삼천년성교회, 에덴문화원, 신천지의 이만희 등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신격화하여 추종자들을 모으고, 그들의 헌신을 이용하여 재산을 갈취한 범죄들이 드러나도, 여전히 추종자들이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2002년 현재 한국에서 종교를 표방하며 활동하고 있는 신흥종교는 약 500, 이 가운데 이단, 사이비로 규정된 곳은 150-200, 시한부 종말론 주장단체는 70-80, 이단, 사이비 종교로 인한 직간접적인 피해자는 약 2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런 신흥종교 교주들의 특징은 이들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교주들만이 아닙니다. 신도들 가운데서도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범죄를 정당화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지난 1014일 경기도 남양주시 소재 한 사찰에 40대의 여성 기독교인이 방화를 했는데, 경찰에서 그녀는 신의 계시를 받아서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사실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20161월 경북 김천에서는 60대 남성이 가톨릭 성당과 사찰에 들어가 성모상과 불상 등을 훼손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남성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엘살바도르의 산티아고 산체스라는 남성은 수 십 년 전에 굴을 파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는데, 지금까지 굴을 판다고 합니다. 사찰을 불태우라고 계시한 신보다는 착한 신입니다. 필리핀에서는 신의 계시에 따라 누가 대통령이 될지 발표하겠다는 목사도 있었고, 한국에서는 신의 계시를 받아 주식투자에 성공한다며 수백억 원을 가로챈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21세기, 대명천지(大明天地)에 도대체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사회적 아노미(anomie) 현상,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의 가치나 도덕 기준을 잃은 혼돈 상태’, 사회적 혼란과 불확실성에서, 또는 제도권 종교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데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2. 그러나 역사의 종말에 대한 믿음은 사실 언제나 있었습니다. 비록 그 형태와 시기에 대한 주장들은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났고, 대부분의 종말론자들이 사기꾼이거나 사이비 종교인이었음이 드러났지만, 종말론, 역사와 우주의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요한 한 기둥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도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속에서 살고 행동하셨습니다(1,15). 그리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는데(24,51; 1,9),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1,11).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은 그 후, 세례를 받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고백해야할 신경이 되었는데, 이것이 사도신경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다만 언제 오실지 그 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시며, 그의 재림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이 사도신경의 고백이지요. 예수님 자신도 부활하신 후, 승천 전에,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라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바가 아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1,7).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때와 시기에 대해서도 확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도둑처럼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살전 5,2; 벧후 3,10; 16,15).

 

3. 그런데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이 문제에 봉착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신도들은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겠지만, 이미 죽은 신도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에 부딪친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물론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임박한 재림 기대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연대적으로 가까운 시대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재림하여 현재의 세계질서에 종언을 고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있는 성도들은 주님을 영접하겠지만, 이미 죽은 성도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 제기된 것이지요.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예수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이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 남아 있는 성도들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다고 말합니다(살전 4,14-17).

 

이른바 휴거 종말론자들은 바울의 이 증언 가운데서, 죽은 자의 구원이 아니라, 재림 사건의 형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데살로니가 공동체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성도들이 구름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일이 과연 어떻게 과학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은 자들의 부활과 이른바 휴거는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죽지 않고 산채로 하늘로 이끌려 올라 간 인물들을 알고 있습니다. 에녹(5,24)과 엘리야(왕하 2,11)가 그런 인물이지요. 예수님 시대에도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었고, 바리새파 사람이었던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고(9,3-6), 심지어 환상과 계시 가운데서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가기도 했습니다(고후 12,1-2).

 

그러므로 죽은 자들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일어날 휴거는 과학시대의 인간에게는 문제될지 몰라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문제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항상 주님과 함께 있는 것’(살전 4,17)이고,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었습니다(살전 5,10). 그리고 그것이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습니다(살전 4,18).

 

역사의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관심은 현재에서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고난의 현실에서 영광의 미래를 보는 것이 위로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는 임박한 재림과 종말 심판 설교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이 있었고(살전 3,5),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살전 2,5), 종말에 대한 믿음 때문에 오히려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살전 5,14). 종말신앙이 한편으로는 열광주의로 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한 것이지요.

 

그러나 종말신앙은 현재에서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현재를 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주님의 기도).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에게 오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신앙은 현재를 외면하고, 현실을 초월해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책임적으로 충실하고, 현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세상으로 만들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하며, 바깥 사람을 대하여 품위 있게 살아야 하고,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권면한 것입니다(살전 4,11-12).

 

4.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할지, 부활하신 주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그 때와 시기를 모를 뿐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살전 5,2).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이른바 열 처녀의 비유’(25,1-13)도 하늘나라 임재의 때에 관한 교훈입니다. 비유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고, 슬기로운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기 때문에 신랑이 늦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등불을 밝히고 춤추며 즐거워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유대인의 혼인풍습을 아는 사람은 곧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처녀들의 미련함이나 슬기로움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슬기로운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갈 수 있다는 확대된 비유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슬기와 미련함 같은 인간의 지적 능력은 하나님 나라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아닙니다.

 

혼인식이 밤에 진행될 경우, 처녀들이 횃불을 켜들고 춤을 추는 것은 관례였습니다. 나무 몽둥이에 질긴 천을 감고 올리브기름을 칠한 횃불은 약 15분 정도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름이 떨어지면 다시 기름을 발라 불을 밝힐 수 있는 여러 번 사용이 가능한 횃불이었습니다. 열 처녀 모두 기름을 칠한 횃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련한 처녀 다섯만이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신랑의 도착이 늦어져 혼인잔치가 지연되는 것은 빈번한 일은 아니었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애타게 기다리는 신랑이 오지 않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열 처녀 모두 잠이 듭니다. 이른바 미련한 다섯 처녀들만이 아니라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도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 잠이 흔히 준비 없는 삶을 표현하는 경우가 성경에 나타나지만(살전 5,6; 13,11; 5,14), 이 비유에서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밤중에 갑자기 신랑이 온다는 연락이 옵니다. 열 처녀는 모두 횃불을 밝히고 신랑을 맞이합니다. 곧 다섯 처녀가 가진 횃불에 기름이 떨어져 불이 꺼져갑니다. 그들은 다른 다섯 처녀, 곧 기름이 떨어질 것에 대비해 더 많은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에게 기름을 빌려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다른 다섯 처녀들은 있는 기름을 나누어 쓰면 모두에게 모자랄 터이니 가게에 가서 사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혼인식이 열리는 유대 마을 어디에서나 동네 모든 사람들이 자지 않고 함께 축하하기 때문에 가게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고 기름을 사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섯 처녀가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고 신랑은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을 가지고 있는 다섯 처녀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잔치 집 문이 닫힙니다. 뒤늦게 기름을 구해 달려온 다섯 처녀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잔치 집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신랑은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며 외면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거워해야 할, 한 사람도 소외되어서는 안 될 혼인 잔치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잔치 식탁에는 모든 사람들이 초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초대에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까닭은 그들이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유는 그래서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라는 경고와 함께 끝을 맺습니다.

 

5. 하늘나라는 언제 어떻게 오는가? 이 질문은 박해받는 초대교회가 직면한 문제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열 처녀의 비유는 사이비 종말론을 경계하면서,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잠들어 있다는 것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5절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도 잠 들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깨어있음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시간을 초월해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관계없는 미래에만 집착하는 것은 깨어있는 자의 태도가 아니라 꿈꾸는 자의 태도입니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이런 의미에서 밤에 꾸는 꿈낮에 꾸는 꿈과 구별했습니다. ‘밤에 꾸는 꿈이 억압된 의식의 재현이라면 낮에 꾸는 꿈은 깨어있는 사람의 꿈입니다. 현재 안에서, 현재로부터 미래를 지향하며 사는 삶이 깨어있는 자의 삶입니다.

 

시간과 계절의 변화는 옛 날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변하는 것은 사람 자신인데, 사람들은 시간이 가고 또 온다고도 말합니다. 해가 변한다고 해서 시간 자체가 새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깨어있지 않은 자에게 시간은 관습의 기계적 반복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은 오늘의 연속일 뿐입니다. 깨어있지 않은 자에게 변화란 기껏 우연이거나 운명, 또는 재수일 뿐입니다. 일이 잘되면 우연히 재수가 좋은 것이고, 일이 잘 안되면 어쩔 수 없는 운명이거니 생각합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자에게 시간은 가능성입니다. 시간, 즉 때와 때 사이에서, 바로 그 때가 올 것을 예상한 책임적 계획과 결단을 포함한 것이 깨어 있는 자의 시간입니다. 깨어 있지 않는 자는 시간을 묻지 않습니다. 그는 시간, 곧 때와 때 사이의 기계적 반복에 자신을 수동적으로 맡길 뿐입니다.

그러나 삶의 미래는 열려 있고, 나에게 그 결정적인 때가 언제일지를 알 수 없습니다. 미래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사건들이 닥쳐올지,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래는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것입니다. 미래가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다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잡아매고 있는 과거와 현재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미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의 근거는 우리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미래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미래, 불확실한 시간의 중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러므로 깨어 있는 일입니다. 깨어 있어야 우리는 과거를 반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과거의 반성은 책임전가와 책망, 자신에 대한 실망 혹은 자기정당화로 끝나는 수가 많습니다. 희망을 갖지 않은 사람은 과거를 돌이켜 역사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만이 어제로부터 배우고, 오늘을 계획하고, 내일을 준비합니다. 하나님의 미래에 희망을 건 사람은 무책임하게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의 미래이고, 하나님의 미래가 우리의 미래라고 믿는 사람들은 과거의 자신을 용납하고, 현재의 자신을 진지하게 받아드립니다. 하나님의 미래가 소중하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미래에로 용납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과 함께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 칠뿐입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3, 12이하)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과 기후위기는 지구 종말이 단지 사이비 종말론자들의 사기(詐欺)가 아니라, 가까이 다가온 현실임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자세히 알고 있듯이(살전 5,2), 우리도 언제, 어떻게 지구 종말이 올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기후위기와 함께 모든 지옥문이 열리고 있다고 경고한 것도 알고 있고, 인류가 최후를 맞게 될 시간이(지구종말시계) 자정 100초 전으로 다가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2050년에 90억 명에 이를 인류는 지구평균온도가 섭씨 4도 상승할 때, 5억 명 정도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섭씨 2도 상승할 경우, 해수면은 지금보다 25미터 상승하고, 섭씨 2.5도 상승하면 50미터까지 상승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표면토 유실, 사막화, 경작지 감소, 지하수 고갈, 식량위기도 알고 있고, ‘코비드-19’가 왜 생겨났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이런 기후위기에 직면하게 된 원인도 우리는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가까이 다가오는 지구 종말 앞에서 인류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는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요청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섬길 것인지, 이집트 땅에서 친히 해방하신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한 것이지요. 그리고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이다’(24,15)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자연을 약탈하고 인간을 억압하면서 소수의 풍요를 약속하는 우상을 섬길 것인지, 창조를 보전하시고 인간을 해방하시는 생명의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이 되겠지만, 그 심판이 재앙이 될지, 구원이 될지는 전적으로 인류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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