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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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출애굽기 33:18-23/ 데살로니가전서 1:1-7/ 마태복음서 22:15-22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10-18 |
전주 | 복된 삶을 위해 기도하나이다(D. Buxtehude) |
찬양1부 | 내가 산을 향하여(Allen Pote) 특송: 이예랑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내가 산을 향하여(Allen Pote) 특송: 이예랑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W. J. Kirkpatrick) |
후주2부 |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A. Jordan) |
성경본문 |
출애굽기 33:18-23 그 때에 모세가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집어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1:1-7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여 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하여,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서 22:15-22 그 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트집을 잡아서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다 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탄복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남겨 두고 떠나갔다. |
1.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 말은 오랫동안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성서적 전거로 널리 인용되었습니다. 황제로 상징되는 정치와 하나님으로 상징되는 종교, 이 두 영역은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정교분리의 출발은 미국의 수정 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부인한데서 시작된 것인데, 국가는 세속적, 현세적 생활에만 관여할 수 있고, 내면적이고 신앙적인 생활은 국민의 자율에 맡겨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 비종교성을 법제화한 것이지요.
그러나 정교분리는 정치의 종교에 대한 불간섭이건, 종교의 정치에 대한 불간섭이건,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국가권력과 교회의 관계는 훨씬 더 오래 전부터 문제가 되었습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272-337)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박해가 종식되고, 그리스도교가 국가 종교로 공인된 후,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수도를 비잔틴으로 옮기고, 이름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면서 시작된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가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만인들에 의해 멸망당한 서로마제국에서는 로마교회의 주교가 실질적인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교회가 국가권력 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지요. 이런 관계는 유럽에서 근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고 하겠습니다.
한국에서 정교분리는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 교회의 대정부비판과 민주화 운동, 인권운동을 막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정부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적극적인 유착관계를 통하여 혜택을 받은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었습니다. 그들은 루터의 ‘두 왕국론’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세상의 나라와 영적인 나라를 분리하고, 교회는 세상일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독재권력 비판을 오히려 비난하면서, 독재 권력과의 유착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970년대, ‘한기총’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정부에 비판적인 한교협(KNCC)과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용공(容共)이라고 낙인찍으면서, 탄압하고, 한국교회를 분열시킨 것이 그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는 오히려 정치권력이 종교권력의 눈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들이나 국회의원들이 대형교회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것에서부터,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실로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하는 목사와 앞 다투어 사진을 찍고, 굽신거리는 정치인들을 보면, 대한민국은 확실히 종교권력이 정치권력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는, 아니 정치인들을 지배하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종교가 국민의 신뢰와 종교인들이 존경을 받는 결과라면, 비난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러나 오직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서로 이용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정교일치를 넘어 정교유착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정교분리’는 누가, 어느 입장에서 주장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과 방향이 사뭇 달라지는 것입니다. 종교의 비판과 감시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권력도 정교분리를 주장하고, 권력의 부당한 간섭과 탄압을 받는 종교도 정교분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정교분리건,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는 말씀을 정교분리의 대강령처럼 인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말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정치권력이 무슨 일을 저지르든지, 종교는 세상나라와 하늘나라를 분리하고, 성속을 구별하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올바르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종교는 정치권력과 유착관계를 맺든지, 아니면 비판과 견제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2. 예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의 콘텍스트를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말로 트집을 잡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대화를 시작했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뜻을 정확하게 전하기 위한 대화가 아니라, 트집을 잡아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것은 이미 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간교하고 악한 음모일 뿐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직접 나서지도 않고,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합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마 22,15-16)
언뜻 칭찬과 존경처럼 들리지만, 대부분의 대화가 그렇듯이 처음에 칭찬과 존경의 말이 나오면, 그 다음에는 부정적이고, 비판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 보통 있는 일입니다. ‘당신은 진실하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고,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다.’는 말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지금 질문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을 의식하지 말고, 그리고 질문에서 드러나겠지만, 로마의 황제나 조세저항운동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젤롯파도 의식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대답하라는 것이지요. 이들은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아니다’라는 대답을 기다렸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마 22,17). 질문한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를 세금 거부를 지지하는 진술로 유도함으로써, 그를 점령군에 저항하는 폭도로, 황제를 모욕한 대역죄로 고발하려고 했던 것이 명백합니다. 예수님은 난처한 상황에 빠지셨습니다. 만일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로마 제국에 대한 조세저항운동을 벌리고 있던 급진적 저항 운동가들에게 친(親)로마적이라고 비난을 받을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반(反)로마적인 저항운동가들 편이라고 고발을 당할 터이니 말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의 이런 간악한 생각을 아신 예수님은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다 드렸습니다.(마 22,18-19).
예수께서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른 것은 이미 그들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과 그들의 숨은 의도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을 후견인으로 삼은 헤롯 당원들은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으니, 당연히 황제에게 세금을 내고 있었고, 바리새파 사람들도 - 아주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 대부분 세금을 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대 전쟁 후, 이들이 유대교를 재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거두는 직접세는 곡식 수확의 일부를 바치는 지세(地稅)와 수입이 있거나 일할 능력을 갖춘 성인이면 누구나 바쳐야 했던 인두세(人頭稅)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금은 오직 ‘데나리온’으로 내야 했습니다. 납세용 동전이었던 ‘데나리온’은 로마의 힘과 주권의 상징이었습니다. 특히 당시 유통되던 동전에는 월계관을 쓴 티베리우스의 두상이 그려져 있고, 그 주위로 ‘티(베리우스) 카에사르 디비 아우(구스투스)’, 다시 말해 ‘티베리우스 시저,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그 자신도 아우구스투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비문은 동전의 반대 면에서도 계속되는데, 뒷면에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곧 ‘대제사장’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그 주위로 ‘평화’(pax)의 여신, 즉 로마 제국이 구가하는 평화의 화신을 상징하는 여인의 좌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그가 쓰고 있는 월계관은 그를 아폴로와 제우스 신과 연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제에게 세금을 낸다는 것은 단지 식민지 종주국에게 충성하면서, 거룩한 땅에 대한 로마인들의 주권을 용인하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이런 종류의 동전으로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요구에 유대인들이 분개한 것은 이유 있는 행동이었지요. 데나리온 동전은 단순히 세금을 내기 위한 경제적 도구이거나, 유대인들이 정치적으로 로마의 식민지라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통치자 제의의 일부,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제의였습니다.
그러니 거룩한 땅과 백성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하고, 이스라엘은 다른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젤롯파가 조세거부를 촉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젤롯파는 마침내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드디어 유대전쟁(66년부터 70년)이 일어났지만, 결과는 유대 역사의 종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서들이 유대 전쟁 후에 기록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세금을 둘러싼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수님의 긴장과 대결에는 바로 세금문제로 촉발된 유대전쟁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다는 것이지요. 잘못 대답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예수님이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질문자로 하여금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데나리온을 꺼내게 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질문자들이 이미 황제에게 세금을 내고 있고, 로마 식민지 당국과 협조 혹은 유착관계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전 위에 새겨진 글자와 초상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묻습니다. 그들이 ‘황제의 것이다’고 답하자, 예수님은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해칠지도 모르는 ‘아니다’라는 대답에 말려들어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단순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만 말하지 않고,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마 22,21).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 한 말씀으로 예수님은 적대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 로마제국의 식민지배에 기생하면서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믿는 너희는 도대체 누구 편에 있는 것이냐는 것이지요. 적대자들은 예수가 납세거부를 말하게 함으로써 그를 젤롯파와 같은 반란자로 고발하려고 했으나,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식민지종주국 로마 제국과 타협한 집단이라고 도전하신 것입니다. 로마 제국을 위한 납세를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고 유도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했던 사람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느냐고 문제를 던짐으로써, 이들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정체가 오히려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지만,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낼 능력이 사실상 없었습니다. 자기 소유의 토지도 없고, 자신의 직업에 무관심했던 목수(막 6,3), 특정한 벌이가 없는 방랑의 설교자, 그물과 배를 바다에 방치해둔 어부(막 1,16-20), 직장을 떠난 세리(마 2,14) 등은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지배자로부터 세금을 추징당하지도 않았습니다. 로마 관청도 그들에게 세금을 강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는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도, 현실적인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질문을 던진 적대자들이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느냐’는 질문을 받게 된 것이지요.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고’,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는 계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라는 너희들이 황제의 돈을 사용하고, 세금을 낸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부딪친 것이지요. 이제는 예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라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이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지요. 로마 제국의 황제인지, 아니면 하나님이신지를.
예수님은 젤롯파가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에 대한 납세거부와 폭력적인 저항을 선동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눅 16,13; 마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로마 황제가 그려진 동전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께서 빌라도 앞으로 끌려갔을 때, 무리들이 고발하는 말,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우리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눅 23,1-2)는 말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고, 또 내지도 않았는데,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했다고 고발당하신 것이지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거나, 믿고 싶은 말만 듣는가 봅니다. 납세거부운동을 선동하신 적도 없고, 폭력적으로 로마식민지 종주국에 저항하지도 않으셨지만, 예수님은 그런 인물로 고발당해 마침내 정치범의 한 사람으로 십자가 죽음을 죽으셨으니 말입니다.
3.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 말씀은 오늘의 한국교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민주주의가 정착된 오늘의 현실에서, 국가나 정치권력이 교회를 억압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국가가 종교의 눈치를 보거나, 지원과 협력을 통하여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정교분리는 교회가 정치권력으로부터 간섭이나 억압을 받아서도 안 되지만, 교회가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예속 혹은 유착관계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국가가 표를 의식하여, 교회의 눈치를 보면서, 공권력을 무너뜨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못해서도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어야 할 황제의 것이 신격화된 황제의 모습이 새겨진 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교분리는 정치권력과 종교 사이가 아니라, 신이 된 돈, 곧 맘몬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말씀은 오늘의 교회에게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양적 성장, 초대형교회를 지향하면서, 급성장한 한국교회는 이제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코비드-19 확산의 주범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문제지만, 도덕성 추락과 공신력 상실, 퇴행적 의식과 극단적 행태는 ‘가나안 성도’들을 더 양산할 것이고, 세상은 교회를 더 등질 것입니다. 게다가 8개월째 모이지 못하자, 교회마다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수많은 교회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서서히 생기고 있습니다.
교회의 정체성이 도전받는 시대에 우리는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가 그의 삶의 끝자락에서 한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감리교 운동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1786년의 소논문, 감리교에 대한 고찰).: ‘나는 감리교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경건의 능력 없이 경건의 모양만 지닌 채 죽은 교파로만 존재하게 되는 일입니다. 감리교를 일으켜 세운 그 교리(doctrine), 영(spirit), 규칙(discipline)을 굳게 잡지 않는다면 분명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창시한 감리교가 죽어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예수 없는 감리교가 살아남는 것이 두렵다는 말이지요. 어찌 18세기 감리교회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코로나의 도전으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죽어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예수 없는 한국교회가 오히려 살아남는 것이, 예수 정신 없는 교회들이 오히려 잘나가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지요.
하나님과 맘몬, 예수님과 황제를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기왕이면 함께 섬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양다리 걸치기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길인 것 같습니다. 아니,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신(출 20,3),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허락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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