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여섯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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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낙심하지 말아야
성경구절 이사야서 40:27-31/ 요한계시록 7:13-17/ 누가복음서 18:1-8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10-11
전주 주께 감사드리나이다(G. F. Händel)
찬양1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H. Smart) 특송: 박수길 장로, 최승태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H. Smart) 특송: 박수길 장로, 최승태 집사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다 감사드리자(S. Karg-Elert)
후주2부 다 감사드리자(S. Karg-Elert)
성경본문 이사야서 40:27-31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비록 젊은이들이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이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7:13-17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서 18:1-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느 고을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그 고을에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그 재판관에게 줄곧 찾아가서, '내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그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이렇게 혼자 말하였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1. 이른바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방 법정(니시비스)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모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 자료에 의하면, 재판정 입구 맞은 편에 재판관(카디)이 반쯤 쿠션에 묻혀 있고, 그의 주위에는 서기들이 둘러 앉아 있습니다. 법정 앞 부분에는 주민들이 몰려들어 각자 자기 사건을 먼저 처리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서기들과 귓속 말로 흥정을 하고 뇌물을 슬쩍 집어 넣어주면, 즉석에서 처리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 비유에 나오는 과부와 같은 가난한 여자가 큰 소리를 치면서 공정하게 취급할 것을 호소하면, 재판절차가 잠시 중단됩니다. 서기들은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고 엄명하고, 매일 와서 소란을 피우는 그녀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더 큰 소리로 외치면서, 재판관이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일 때까지 계속 올 것이라고 소리치지요. 참다못한 재판관은 법정 문을 닫기 직전에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습니다. 그녀는 외아들이 군대에 끌려갔는데도, 징세관이 그녀에게 납세를 강요했다고 호소합니다. 사건은 신속하게 판결됩니다. 가난한 여인의 끈기가 보답된 것이지요. 그러나 만일 그녀가 서기에게 돈을 주었다면, 재판은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고, 그녀는 승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지방법정에서 일어난 사건과 비슷합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사람들의 평판에 개의치 않는 오만한 인물임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한 과부가 자기 적대자에게서 자신의 권리를 찾아 달라고 졸라대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 적대자가 누구인지, 그녀가 무슨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법정에 호소하지 않고 재판관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으로 미루어, 우리는 이 사건이 아주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고, 금전적 채무 문제가 개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재판관이 그녀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그녀가 가난해서 법정 서기에게 선물을 할 수 없었거나, 그녀의 소송 상대자가 부유하고 유력한 남자였고, 재판관이 그에게서 뇌물을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집요함뿐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줄곧 재판관을 찾아가 졸랐습니다. 그러자 한동안 그녀의 호소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던 재판관은 집요하게 찾아와 못 견디게 할 것이 귀찮아 마침내 그녀의 권리를 찾아 줍니다(18,1-5). 여기서 그녀의 권리를 찾아주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그녀가 내게 와서 내 눈을 멍들게 만들지 않도록’, 혹은 반항하다는 뜻인데, 동사 히포피아제인’(hypopiazein)눈 아래를 때리다는 뜻으로 권투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가 재판관의 눈 아래를 때리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기에, 이 말은 상징적으로 얼굴을 어둡게 만들다’, ‘내 인격을 더럽히다’, 또는 내 얼굴에 먹칠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어쨌든 불의한 재판관은 가난한 과부의 끈질긴 요구를 들어줬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이 비유의 서두에서 이미 예수님이 밝히신 것처럼,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18,1). 그러면, 하물며 불의한 재판관도 그럴진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을 모른 체하고 내버려 두시지 않으며, 그들의 권리를 얼른 찾아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18,7-8).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듣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지요. 누가는 이 비유를 올바른 기도의 가르침으로 삼았음이 분명합니다. 기도가 금방 응답받지 않는다고 기도하기를 그치거나,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끈질기고 겸손해야 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던 비정한 재판관도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마침내 곤궁에 빠진 과부를 도와주었는데,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잘 도와주시겠는가! 하물며 스스로 선택하신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얼른자기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연히 이 비유는 다급하고 엄숙한 질문과 함께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18,8).

 

이 질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추방당하고, 모욕과 고발, 심문과 순교, 사탄이 나타날 때의 신앙의 마지막 시련의 시대에 대한 제자들의 근심과 불안이 이 비유를 말하게 된 동기임을 보여줍니다. 박해와 고난의 시대는 이미 시작된 것이지요. 누가 마지막까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견딜 수 있는가? 이 질문과 함께 예수님은 제자들이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끈질기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들으시고, 고난의 시대를 단축시킬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올바른 기도를 위한 길잡이라는 이 비유의 또 다른 의미는 가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청중에게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는 권리를 찾아주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자비는 동정이 아니라, 박탈당하거나 짓밟힌 권리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과부가 적대자에게 보복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의 회복을 요청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는 보복적 정의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임이 분명해집니다.

 

2.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환난을 겪고 있을 때, 밧모 섬에 갇혀 계시를 받은 요한이 주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이라고 말했을 때에도(7,17), 그는 보복적 정의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를 의미했음이 분명합니다. 박해자를 파멸시킴으로써 박해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생명의 샘물로 인도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십니다.

 

예언자 제2 이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주전 587), 새로 등장한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바벨론 제국이 붕괴되기까지(주전 539), 다윗 왕조의 종언과 바벨론 신들의 승리, 바벨론 포로생활을 목격해야 했던 제2 이사야 예언자도 절망한 자기 백성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희망이 사라진 곳에서 희망을 선포해야 했던 것이지요. 사정을 모르시거나 외면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에게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백성, 피곤하고 기운을 잃어 비틀거리는 백성에게, 예언자는 결코 피곤하지 않는 새 힘과 결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지혜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40,31).

 

그러나 우리의 인간적 경험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기도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적 약함, 게으름과 망각 때문일 수 있고, 의욕의 상실, 믿음과 용기의 부족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는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말하는 것처럼,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고’,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기도해야하고’(살전 5,1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뢰어야 한다’(4,6)는 말씀은, 기도를 꾸준히 해야 한다는 요구이자, 동시에 기도를 소흘히 하려는 인간적인 유혹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는 말씀입니다.

 

기도를 꾸준히 하는 것은 우리가 큰 위기에 빠졌을 때 필요합니다. 특히 크게 낙심했을 때에는 기도할 용기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당면한 위기와 불안이 우리를 기도하게 하지만, 정말 힘든 위기 상황에서 기도하기란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려고 할 때마다 마음 한 편에서 일어나는 의심, 모든 기도를 무력화시키는 현실, 기도하려는 마음을 압살하는 절망에 맞설 용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 용기가 필요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삶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셨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큰 소리로 부르짖으실 때에도(27,46),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은 기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절망에 탄식하시면서도, 예수님은 일생동안 그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과의 대화 가운데 여전히 머물러 계셨던 것이지요.

 

바로 이런 예수님을 하나님은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셨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약속이야말로, 우리가 기도하면서 결코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수그러들 전망이 보이지 않고 지속되는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가운데서, 한가위 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어느 해들보다도 두려움과 불안, 무력감과 원망을 마음에 안고 감사절을 맞이한 것이지요. 감사의 이유보다 불평과 불만의 근거가 더 많아진 현실에서 감사절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마다 크고 작은 감사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방역대책과 의료진의 헌신적인 노력, 국민의 협조로 전염병의 확산을 막고, 긴급재난구호로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한 사람도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감사할 일이지요.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감사할 것은,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믿음의 본질을, 교회의 공동체성을 진지하게 숙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실상인지, 아니면 허상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감사할 일이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보이지 않는 신앙인격의 증거인지, 아니면 위증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함께 모이지 못했고, 또 제한적으로만 모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비록 교회의 공동체성을 약화시키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 개인, 개인이 훨씬 더 책임적이고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게 했으니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과 성경읽기에 더 많은 시간을 내고, 자녀들을 위하여 가정예배를 드리고, 교회와 세계를 위해 더 많은 기도를 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의 도전과 위기는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이 기도하게 하게 했고, 믿음 없이는 기도할 수도, 감사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으니, 역설적이게도 코로나 위기 자체가 올 해, 감사절의 감사 이유가 되었습니다. 범사감사의 신앙은 모든 일이 잘 될 때만이 아니라, 모든 일이 어려워질 때, 그 진정성이 더욱 돋보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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