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여섯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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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엘리야와 엘리사-스승과 제자
성경구절 열왕기하 2:7-12/ 고린도후서 4:3-6/ 마가복음서 9:2-9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1-02-14
전주 빛되신 주 예수(S. Scheidt)
찬양1부 시편 23편(이현철 곡) 특송: 이예랑 교우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찬양2부
지휘자
반주자
후주1부 햇빛을 받는 곳마다(J. Hatton)
후주2부
성경본문 열왕기하 2:7-12
예언자 수련생들 가운데서 쉰 명이 요단 강까지 그들을 따라갔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 강 가에 서니, 따르던 제자들도 멀찍이 멈추어 섰다. 그 때에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벗어 말아서, 그것으로 강물을 치니,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두 사람은 물이 마른 강바닥을 밟으며, 요단 강을 건너갔다. 요단 강 맞은쪽에 이르러,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느냐?"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엘리야가 말하였다. "너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구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네 소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 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라갔다. 엘리사가 이 광경을 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마병이시여!" 엘리사는 엘리야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엘리사는 슬픔에 겨워서, 자기의 겉옷을 힘껏 잡아당겨 두 조각으로 찢었다.

고린도후서 4:3-6
우리의 복음이 가려 있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가복음서 9:2-9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들이 문득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시어,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성경에는 여러 형태의 스승과 제자 관계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인 모세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젊은 부관으로(24,13), 모세와 함께, 그리고 모세 사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수많은 전투를 하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전사였습니다(1,1-3). 신약성경에서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의 관계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주전 9세기 예언자였던 엘리야(주전 900년 탄생, ‘나의 하나님은 야훼이시다는 뜻)와 엘리사(주전 790년 사망,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는 뜻),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1. 길르앗의 디셉 출신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 왕 아합(주전 876-854)과 아하시야 통치기에 활동한 인물입니다. 아합 왕과 그의 왕비 이세벨의 바알 숭배에 저항하면서 야훼 신앙의 본질을 지키려고 했던 엘리야는 수많은 이적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기름병과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했고, 그녀의 죽은 아들을 살려냈으며(왕상 17,8-24), 가뭄을 그치게 했습니다(왕상 18,41-46). 마침내 하늘에서 나타난 불병거와 불말이 회오리 바람과 함께 하늘로 데려간 엘리야는 살아서 승천한 인물입니다(왕하 2,11).

엘리야가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게 된 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너는 광야 길로 해서 다마스쿠스로 가거라. 거기에서 아벨므홀라 출신인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왕상 19,15-16)고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이전에 그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만남도 극적입니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엘리사의 곁을 지나가면서, 자신의 외투를 그에게 던져줍니다.

예언자가 자신이 선택한 후계자에게 자기 외투를 입혀주는 것은 접촉을 통한 주술의식의 하나였습니다. 외투는 입은 사람의 몸과의 절친한 접촉을 의미하기 때문에, 외투를 통해서 그의 인품과 능력이 함께 주입된다는 믿음이 당시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후에 엘리사가 엘리야가 떨어뜨린 외투로 요단강물을 쳐서 강물을 좌우로 갈라지게 한 이적도 예언자가 입었던 겉옷이 예언자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표징이라고 하겠습니다(왕하 2,13-15).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버려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서 말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린 뒤에,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돌아가거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그러느냐?’고 꾸짖습니다(왕상 19,20). 이 사건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의 태도를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즉각적이고도 주저함 없는 따름을 요청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타협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들은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고 소가 메던 멍에를 불살라서 그 고기를 삶고, 그것을 백성에게 주어서 먹게 한 후, 곧 엘리야를 따라가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왕상 19,19-21).

엘리사는 소가 메던 멍에를 불살랐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삶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을 상징하는 행위입니다. 삶은 고기를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한 것은 이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자신의 새로운 사명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만나면서, 삶이 근본에서 변화되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땅을 일구는 농부에서, 민족을 구원하는 예언자가 된 것이지요.

 

2. 신약성경에 나오는 스승과 제자 관계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제자들을 찾아내셨고, 그들과 함께 살면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그들과 함께,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축출과 치유사건에서 임한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에 동참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지막까지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면서 항의한 것이나(8,32), 두 번째 수난 예고 후에도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서로 다툰 것이나(9,33), 세 번째 수난 예고 후에도 야고보와 요한이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하면서,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10,35-37)라고 요청한 것으로 보아, 여전히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높은 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 이야기도 그 초점은 스승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는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새 하얗게 빛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고, 예수님과 말씀을 주고받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마가는 제자들이 겁에 질렸고,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름이 그들을 뒤덮으면서,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둘러보았으나, 엘리야와 모세는 없고 예수님만 홀로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변모 산 이야기는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24,9-18). 예수님의 새 하얀 옷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세상의 제국들을 심판하게 되는 천국 옥좌 이야기(7,9)를 연상시키고, 빈 무덤에 나타난 젊은이(16,5)뿐 아니라, 순교자들이 입고 있는 흰옷을 예시하고 있습니다(3,5; 4,4; 6,11; 7,13 ).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율법과 예언자 전통을 완성하신 분임을 암시합니다. 구름 속에서 들린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속에서 나오실 때, 들린 음성과 같습니다(1,11). 그래서 이 변모 이야기는 오랫동안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전거로 해석되어 왔지만, 사실 더 중요한 핵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임재사건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세와 엘리야를 능가하는 스승의 영광과 놀라운 신비에 동참하기 위해 초막 셋을 산 위에 세우고 머물러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제자들은 스승과 함께 영광의 산 정상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지만, 그들이 들어야 할 분의 말은 산을 내려가는 것’,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종교체험의 절정, 영광의 정상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하늘의 영광의 계시를 계속 견지하려는 희망을 피력했지만, 그러나 제자들은 산 아래로, 세상으로,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현실로 내려가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납득할만한 희망이지만, 스승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함께 지고 스승을 따라야 할 제자로서의 소명과는 상반되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능가하는 자신의 영광을 과시하려고 하지 않으셨고, 제자들에게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누릴 특권과 권력과 권위를 향상시키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를 통해, 제자들이 오해한 예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오래된 율법과 예언의 전통과 깊은 영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지만,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길을 통하여, 다시 말해 비폭력적인 사랑으로, 모든 율법과 예언을 성취하실 분이심을 증언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낮추시면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이라고(9,12)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는 모세와 엘리야를 능가하는 예수님의 신성을 과시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오해를 다시 확인하고, 모든 신비한 종교체험은 그 자체 안에 머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아래, 세상으로, 인간적인 일상의 세계로 내려오기 위한 것임을 일깨우고, 십자가는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이란 고난 자체를 신성시하거나, 영적인 유익으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와 악의 세상을 정화하려고 자살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악한 권세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악한 세력, 악의 악함을 비폭력적인 변화시키는 사랑으로 단호하게 극복하는 길입니다. 그 길, 스승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 제자들의 길이라는 것이 이 변모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카리스마를 매개로 한 민족의 구원자로서 청출어람의 사제관계를 형성했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매개로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사제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사람은 저마다 살면서, 자기 삶에 선한 영향을 끼친, 그래서 존경하고 마음으로 따르는 스승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반면교사(反面敎師)도 있듯이 나쁜 기억으로 남는 스승도 역설적으로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적어도 그런 사람은 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스승의 선한 영향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근본적으로 변한 경험을 한 사람은 누구나 압니다. 스승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힘이 되는 일인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스승이었던 사람도 압니다. 자기를 능가하는 제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흐뭇한 일인지. 순자(荀子, 기원전 298?-238?)는 그래서 청출어람’(靑出於藍)을 말했다지요.

 

우리는 우리 역사 속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 같이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로서만이 아니라, 연암 박지원과 아들 박종채 같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도, 자산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처럼 형과 아우 사이에서도, 백사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같은 친구 사이에서도, 신사임당과 이율곡 같이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도, 정몽주와 정도전 같이 선배와 후배 사이에도, 세종과 장영실처럼 임금과 신하 관계에서도 스승과 제자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교실에서 선생과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누구든지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고, 우리는 누군가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인물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여해 강원용 없이 선린회와 경동교회는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1987) 없이 여해(如海) 강원용(姜元龍, 1917-2006)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우(晩雨) 송창근(宋昌根, 1898-1951?) 없는 장공 김재준 역시 생각할 수 없고,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1935) 없이 만우 송창근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이런 인물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오늘의 기장, 한신대학교, 경동교회도 있을 수 없었겠지요.

 

강화도 진위대장, 항일독립운동가,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사회주의자,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그러나 무엇보다 대교육가이자 독실하고 헌신적인 기독교 전도자였던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1935)와 한국 장로교의 거목이었던, 만우(晩雨) 송창근(宋昌根, 1898-1951?)의 관계는 흥미롭습니다. 청년 송창근이 1910년 간도로 건너가 이동휘의 문하생일 때, 하루는 이동휘 선생이 그에게 독립운동자금이 필요하니, 내가 마적들에게 붙잡혀 갔는데 몸값을 요구한다고 소문을 내면 마을 주민들이 성금을 낼 터이니, 그것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이동휘 선생이 잠시 몸을 숨기고 송창근이 소문을 냈으나, 주민들은 오히려 몸을 사리고 돈은 한 푼도 모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산에서 내려온 이동휘 선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인간성이 변하지 않으면 독립운동도 할 수 없으니, 너는 서울로 가서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어 인간혁명을 해라. 나는 러시아로 가서 사회주의혁명을 하겠다고 간도를 떠났다고 합니다. 송창근은 그의 말대로 1916년 서울로 가 피어선(지금의 평택대학교)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합니다.

 

19193월 피어선 신학교를 졸업한 만우는 당시 남대문 교회 조사였던 함태영이 수감되자, 그의 후임으로 사역을 했는데, 그도 삼일독립만세운동 가담혐의로 구속, 6개월의 감옥생활을 합니다. 191912월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만우는 함북 웅산 고향에 내려갔다가 웅기에서 금융조합 서기를 하고 있던 두 살 아래의 청년 장공을 만나 그에게 신학공부를 강력하게 권합니다. 만우와의 만남 이후 장공은 사직서를 내고 아브라함처럼 고향을 떠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때부터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지요. 미국 유학 중에 생긴 일화가 있습니다. 1928년 웨스턴 신학교 시절, 어느 날 만우가 장공을 방문했는데, 우울해 있는 장공이 등록금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만우,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자기 등록금을 선뜻 내주고, 자신은 휴학을 했다고 합니다. 장로교 조사인 만우가 돈 한 푼 없이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로 유학을 준비할 때, 자기 집을 팔아서 선뜻 유학 여비를 대고, 너무 낡은 양복을 입고 있던 만우에게 자기 양복을 고쳐 입고 떠나게 했던 감리교 신비주의자였던 이용도 목사도 진실로 큰 인물이지요.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통쾌한 우정, 가슴이 뿌듯해지는 일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옹졸하고 도량이 좁은 저 같은 사람에게는 이용도와 송창근 이야기는 실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장공 없는 여해는 전혀 다른 여해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1932년 귀국 한 장공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간도 은진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청년 강원용을 만납니다. 당시 장공의 별명이 천지선생이었다고 합니다. 강의할 때 학생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노트와 교실 천장만 자주 보기만 해서 붙은 별명이었습니다. 늘 과묵하고, 시험시간에도 신문만 보고 감독을 하지 않아 존경받던 장공에게서 철저한 보수신앙과 근본주의적 기독교에 물들어 있던 여해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기독교 신앙과 성 프란체스코의 성빈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장공은 여해에게 일본 청산학원으로 유학을 권합니다. 그러나 완고한 부친은 격노하여 곧장 집으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 때 장공이 여해의 부친에게 한문 붓글씨 편지를 보냈는데, 어찌된 일인지 부친의 마음이 변해, 여해에게 유학의 길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이 때 여해가 고향으로 그냥 돌아갔더라면, 글쎄요, 한국교회가 큰 인물 한 사람을 잃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고 흔히 말합니다. 사회적 갈등을 중재하고 세상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지혜와 인품을 갖춘 스승이 없다는 말이지요.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 자기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들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는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걸어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살펴 스스로 고쳐야 한다.’고 했으니, 누구든지 나에게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스승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그런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스승이 될 수 있고, 누구든지 스승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스승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랍비(스승)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23,8)고 말씀하셨습니다.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지(23,3-7), 스승을 두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스승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배우는 평등한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인간의 수직적 관계로 형성되는 모든 사제관계를 해체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23,11-12)고 말씀하심으로써, 진정한 스승은 겸손하게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임을 선언하신 것이지요.

 

한국교회, 아니 우리 경동교회는 진실로 큰 인물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역사입니다. 스승이 없어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 모양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큰 스승들의 유지를 제대로 받들지 못하는 것이 죄송할 뿐이지요. 지금은 스승이 없다고, 우리 시대에 어른이 없다고 불평하고 한탄만 할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삼음으로써, 마침내 스스로 누군가에게 스승이 되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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