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여덟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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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듣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성경구절 욥기 42:1-6/ 히브리서 7:23-28/ 마가복음서 10:46-52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1-10-24
전주 하나님 말씀 안에 살게 하소서(D. Buxtehude)
찬양1부 예수 나를 오라 하네(J. S. Norris) 특송: 김준홍 교우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예수 나를 오라 하네(J. S. Norris) 특송: 김준홍 교우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P. P. Bliss)
후주2부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P. P. Bliss)
성경본문 욥기 42:1-6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히브리서 7:23-28
또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그 직무를 계속할 수 없어서, 그 수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영원히 계시는 분이므로, 제사장직을 영구히 간직하십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십니다. 예수는 이러한 제사장으로 우리에게 적격이십니다. 그는 거룩하시고, 순진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구별되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입니다. 그는 다른 대제사장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리고, 그 다음에 백성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치셔서 단 한 번에 이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약점이 있어도 율법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지만, 율법이 생긴 이후에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마가복음서 10:46-52
그들은 여리고에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1. 여리고에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 주전 9,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 당시에도 여리고는 아주 오래된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사해의 북방 해안선에서 10마일 북쪽,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동쪽으로 겨우 12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여리고는 지금도 성지 순례 길에 꼭 들리는 장소입니다.

여리고는 주전 6세기 바벨론의 공격으로 파괴되었으나, 그 후 복원되어 주전 140년에 세워진 하스모니안 왕조와 헤롯 대왕의 겨울 휴양지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로마 삼두정치의 한 통치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BC 83- BC 30)는 아열대성 기후로 아름다웠던 이 도시를 클레오파트라에게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역사적 기억에 남아 있는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여호수아의 진두지휘를 받으면서, 점령한 가나안의 첫 번째 도시라는 것입니다. 여리고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전쟁의 교두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마가복음서 저자가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 이야기를 예수님이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로 들어가셨다가 나오셔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 배치한 것은 매우 의도적인 편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을 구원할 새로운 여호수아인 예수님이 수도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도중에 여리고를 지나감으로써, 새로운 영적 전쟁의 시작을 선언하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 영적 전쟁은, 시각장애인 바디매오, 디매오의 아들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디매오’(Timaios)는 흔히 사용되는 헬라 이름으로서 가치 있는, 영예로운을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시각장애를 가진 거지가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데요, 아마도 바디매오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닌, 부유했으나, 후에 시각을 상실함으로써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졌고, 거지가 된 사람임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사해 문서들 가운데 일부는 시각 장애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들을 종말론적 공동체의 일원에서 배제했고, 심지어는 예루살렘 출입을 금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입성 할 때, 눈 먼 사람들이 왕궁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고, 그들을 쳐 죽이라고 명령하기도 했습니다(삼하 5,8). 이것은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고(21,18), 눈이 먼 짐승은 제물로 바칠 수 없다(22,22)는 레위기의 율법을 근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의 눈을 여리고를 떠나면서, 뜨게 하시고, 눈을 뜬 바디매오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은 단지 한 장애인의 이적적인 치유사건으로 축소해석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다른 모든 이적 사건들이 그렇듯이, 이 사건도 장애를 배제와 차별의 근거로 악용했던 사회체제에 대한 예수님의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도전이었던 것이지요. 그것은 예수님을 일찍이 따라나섰던 제자들에게는 물론, 보지 못했던 바디매오에게도 혁명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 놀라운 상징적 사건을 제자들은 눈을 뜨고도 보지 못했고, 보지 못해 길 가에 앉아서 구걸하던 눈 먼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에게서 다른 길을 보았고,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길이 되려고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곳,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을 따라 나섰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라나선 많은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크게 외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꾸짖으면 꾸짖을수록, 바디매오는 더욱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신다는 나사렛 사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데, 자칫하면 고침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있는데, 어찌 큰 소리로 외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볼 수도 없으니, 그저 사방에 대고 집요하게 악을 쓰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렇습니다. 절박한 사람이 어찌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절박하지 않은 사람은 외칠 일도, 외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의지할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인 사람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부르짖는 것 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탄식과 부르짖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의 하나님을 향한 마지막 언어이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전까지 그를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던 사람들이 그에게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놀란 바디매오,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고 합니다. 겉옷은 보지 못하는 거지 바디매오의 유일한 재산이었습니다. 겉옷은 추위에서 몸을 지키고, 구걸할 때에는 땅바닥에 펼쳐놓는 자루이자, 밤에는 이불의 기능을 하는, 그에게는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겉옷은 바디매오가 가진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에게로 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십니다. 사실 이 질문은 이 사건 직전에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자기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를 바란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던지신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10,35-36).

그 때, 제자들은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자리다툼을 했는데, 지금 바디매오는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간구합니다. 제자들은 눈은 뜨고 있으면서도 영적으로는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영적인 눈으로 이미 자기 앞에 계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볼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고, 바디매오는 곧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두 사건 안에서, 선명하게 다른 두 제자집단을 봅니다. 내부자 집단으로 볼 수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고난을 예고하시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낮추는 섬김의 길에 동참하라고 요청했지만,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제자집단이 한 집단이라면, 다른 편에는 지금까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던 외부자인 바디매오가 대조적으로 서 있는 것이지요.

 

너무 가까이 있으면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내부자 집단에 속한 제자들이 스승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외부자이자 눈이 먼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역설적입니다.

 

제자들은 바디매오를 꾸짖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가던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제자집단 내부에 있는 사람이냐,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이냐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부에 있는 것을 대단한 특권이라고 생각했던 제자들은 바디매오를 꾸짖고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부르셨고, 그를 치유하여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디매오를 부르신 것은, 내부자로서 그동안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봐왔던 제자들은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거나 안 보는데, 오히려 외부자인 바디매오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영적으로는 보아야 할 것을 이미 보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눈 떴다고 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는 것이 아니지요. 본다고 하면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확증편향), 보지 못하지만,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이미 본 것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눈에 안경이나,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태조 이성계에게 한 무학 대사(1327-1405)의 말도 그런 뜻이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자기 겉옷을 벗어 던진 바디매오처럼, 모든 선입관과 기득권, 지금까지의 삶을 유지해온 모든 낡은 것을 벗어 던지는 사람만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법입니다.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기후위기는 우리가 지금까지 걸치고 있었던 낡은 겉옷을, 기존의 패러다임을, 벗어 던지지 않고서는 극복될 수 없고, 문명전환도, 새로운 세상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일깨우는 우리 시대의 표징입니다.

 

2.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후, 그동안 자신이 취했던 모든 태도와 자기가 한 모든 말이 쏟아지고, 녹아져 철저하게 부서진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었던 또 다른 인물은 욥입니다.

 

욥은 그가 살아오면서 듣고 알았던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무너진 후에야,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욥은 과거의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교리에 따라 죄 없는 자기에게 고통과 고난을 주신 하나님을 공정하지 못한 분으로 이해했다가, 이제 하나님을 새롭게 깨달은 것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주님의 뜻이 무엇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았다는 것을 의식한 것이지요. 그런 깨달음,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귀로만 들었다가, 자신의 눈으로 봄으로써 얻어진 것입니다.

 

듣는 것이 간접경험이라면, 보는 것은 직접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욥은 자기가 귀로 들어온 모든 인간적 지식과 지혜의 편협한 확신을 버리고,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했습니다.’(42,6).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개할 때 재를 머리에 뿌리거나 잿더미 위에 앉아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언제부터, 그리고 왜, 그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아담에게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3,19)는 말씀에 비추어, ‘도 인간적 삶의 무상함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우리의 삶에 끝이 있고, 그 끝은 한 줌의 재라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잘못된 자기주장을 거두어들이고, 새로운 길로 출발하는 행위에서 완성됩니다. 그래서 회개는 끝난 것 같으나 다시 시작하는 삶이고, 죽는 것 같으나 사실은 사는 길이지요.

 

3. 히브리서 저자는 자기 자신을 바치셔서, 단 한 번에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죽어서 사는 길을 가신 대제사장이시라고 고백합니다(7,27).

 

고대 이스라엘에는 크게 아론계열, 레위계열, 사독계열이라는 세 부류의 제사장 집단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의 지위와 역할은 역사적 단계에 따라 달랐습니다. 왕정시대, 레위계열 제사장들은 주로 지방 성소를 중심으로 제의와 성전과 관련된 업무, 그리고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일을 담당했고, 예루살렘 성전은 사독계열 제사장이 담당했습니다. 그 후, 중앙 성소를 강화하면서 종교개혁을 추진했던, 요시야 왕은 지방제사장이었던 레위계열 제사장들의 지위를 약화시켰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일에 주력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패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사독계열 제사장들은 포로지로 잡혀가고, 유다 땅에 남아있던 아론계열 제사장들이 제의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패망하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포로지에서 사독계열 제사장이 유다로 돌아오면서 제사장들 간의 계열별 갈등이 심해지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제사장 직이 역사적으로 부침하기는 했지만, 제사장의 역할은 제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고, 성전의 재정을 관리하고, 재판을 하는 것도 제사장의 기능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만군의 주 하나님의 특사로서(2,7)로서 실로 특권적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특권 못지않은 무거운 책임을 진 존재였지요. 하나님은 제사장과 생명과 평화가 약속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2,5). 제사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이름을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늘 참된 법을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을 도와서, 악한 길에서 돌아서게 해야 했습니다(2,6).

 

그러나 제사장들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율법을 편파적으로 적용했으며(2,9), 제단과 성소를 더럽힘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멸시했습니다(1,6). 구약성경의 말라기는 어떻게 제사장들이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듣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아 어떤 저주를 받는지를 소상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제사장들도 인간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레위 계열 사람들이 제사장직을 세습한 것은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 근거한 세습제도에 따라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맹세하신 말씀으로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모든 시련과 유혹을 이겨내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7,27), 하나님의 약속을 바탕으로 하여 세운 언약의 중재자가 되신 것입니다(8,6).

 

언약의 중재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언약의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중재자가 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교회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보이는 희망의 중재자가 되도록, 죽임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생명의 중재자가 되도록,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위로 초대받은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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