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후 둘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조회수   788
설교제목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
성경구절 열왕기상 19:1-7/ 갈라디아서 3:23-29/ 누가복음서 8:26-39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6-23
전주 사랑의 주여, 저희가 여기 있나이다(J. S. Bach)
찬양1부 두려워 말라(T. Tertius Noble)
지휘자 박수길 장로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시여(Felix Mendelssohn)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대니(A. S. Sullivan)
후주2부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대니(A. S. Sullivan)
성경본문 열왕기상 19:1-7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낱낱이 이세벨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였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 그 곳에 자기 시종을 남겨 두고,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 때에 한 천사가,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서, 그를 깨웠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그의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잠이 들었다. 주님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그를 깨우면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갈라디아서 3:23-29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개인교사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입니다.

누가복음서 8:26-39
그들은 갈릴리 맞은 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에 닿았다. 예수께서 뭍에 내리시니, 그 마을 출신으로서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집에서 살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서, 그 앞에 엎드려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귀신이 여러 번 그 사람을 붙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서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대답하였다. "군대입니다." 많은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마침 그 곳 산기슭에, 놓아 기르는 큰 돼지 떼가 있었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달아서 호수에 빠져서 죽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도망가서 읍내와 촌에 알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어난 그 일을 보러 나왔다.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귀신들이 나가버린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귀신 들렸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낫게 되었는가를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거라사 주위의 고을 주민들은 모두 예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되돌아가시는데, 귀신이 나간 그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네게 하신 일을 다 이야기하여라." 그 사람이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낱낱이 온 읍내에 알렸다.

1. 지난 주일 오후(616), 우리 교회 장년부와 담임목사와의 대화 시간이 있었습니다. 주제는 ‘well aging - 행복한 노후와 신앙생활이었습니다. ‘well aging’, 잘 나이 든다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건강하게 사는 것, 병으로 아파 가족이나 자녀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 일정한 수입이 있어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 자녀들과 후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하고 싶은 취미생활을 하는 것, 너무 오래 아파 누워 지내면서 가족을 힘들게 하지 않고, 고통 없이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 등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사 내 마음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지요. 앙드레 지드(Andre Gide/1869-1951)가 말했던 것처럼, ‘늙기는 쉬워도 아름답게 늙기는 어렵습니다.’

 

아름답지 않게 나이 드는 사람을 비속어로 흔히 꼰대라고 합니다. ‘꼰대라는 단어는 1960년대 나이 많은 걸인과 하층민 남자를 가리키는 또는 단지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키는 은어였습니다. 1970년대 들어와서는 선생님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 유행했는데, 지금은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억지로 가르치고,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스럽게 강요하는 어른을 낮추어 부르는 은어가 되었습니다.

 

꼰대의 어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번데기의 경상도, 전라도 방언인 꼰데기에서 유래했다는 설, 노인이 되면 얼굴과 목, 손등의 주름이 많아지는 것을 번데기에 빗댄 것 같습니다. 다른 설은 프랑스어 콩테(comte·백작)’의 일본식 발음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공신(功臣)에게 백작, 공작 등 작위를 수여했는데, 일제강점기엔 조선의 친일파도 이 작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에 아첨하면서 살아간 친일파들이 콩테가 된 것이지요. 권력에 아첨하면서 뻔뻔하게 살면서,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자에게는 무한히 강한 콩테꼰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꼰대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꼰대는 자기중심적이고,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서열을 중시하고, 젊은이들에게 어딜 감히!’, ‘네가 해 봤어? 내가 해봐서 아는데를 입에 달고 다닙니다. ‘요즘 애들은...’하면서 젊은이들은 언제나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면서, ‘내가 너만 했을 때는 말이야...’, ‘왕년에 나는 말이지....’, ‘내 자식 같아서 하는 말인데....’,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같은 말을 쉬지 않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옳은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상명하복식 사고방식에 젖어 있고, 아무에게나 다짜고짜 반말을 하면서, 여성차별을 밥 먹듯이 하는 것도 그들의 특징입니다.

 

어쨌든 추하게 늙지 않으려면 젊은이들로부터 꼰대소리 듣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꼰대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꼰대에 반대되는 말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사전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 2018320일자 JTBC 뉴스에서 손석희 앵커는 흥미롭게도 꼰대의 반대말이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Jr, 1922-2007)이라고 말했습니다. 커트 보니것은 미국의 수필가이자 소설가인데, 그가 1994년 시라큐스 대학 졸업식에서 축사한 것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무엇에 대해서든 절대 사과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끔찍하고 엉망진창인 이 행성의 상태에 대해 사과합니다. 그러나 여긴 언제나 엉망이었죠. 좋았던 옛날은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손석희 앵커는 이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책임은 언제나 기성세대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과할 줄 모르는 늙은이들을 꼰대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커트 보니것은 분명 이 지구행성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데 그렇게 큰 책임을 져야할 인물은 아닙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갖은 고생 끝에 해방되었습니다. 전후 미국 최고의 수필가로 존경을 받았으나 권력으로부터 끊임없이 검열당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말, 강변, 혹은 젊은이들에 대한 꾸짖음 대신에 사과를 선택한 것이지요. 지구행성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것에 대하여 사과하고 책임지는 사람, 그가 꼰대에 반대되는 사람이겠지요.

 

그러나 굳이 꼰대의 반대말을 찾는다면,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건달이 적합한 것 같습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건달’(乾達)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거나 게으름을 부리는 짓, 또는 그러한 사람이라는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건달은 하늘 건(), 이를 달(), 하늘에 이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늘 천()은 하늘의 형체를 그린 글자라면, 하늘 건()은 주역 64괘 가운데 첫 번째 괘로서 하늘의 성격과 본질적 기능을 의미하여, 만물을 창조하는 생명력의 근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달’, 하늘에 이른 사람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간다르바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16세기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건달은 본래 불교에서 팔부중의 하나로 음악을 맡아보는 신()간다르바를 한자로 음역한 건달바(乾闥婆)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그는 술과 육식을 하지 않고 오직 세상의 향기만을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천명의 나이에 이른 어른, 그러나 하는 일 없이 놀거나 게으름을 부릴 수 있는 노년의 특징은 건달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돈벌이가 되는 반듯한 직업을 갖고 있어야 겨우 사람 취급 받는 세상에서, 은퇴하여 돈벌이도 없고, 집에서 삼시 세끼 밥을 먹는 이른바 삼식이는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눈으로 보면 잉여인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건달은 돈벌이가 되는 직장으로 매일 출퇴근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는 일, 하고 싶은 일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직장인은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지만, 건달은 하고 싶은 일만 합니다. 목표와 성과에 사로잡혀 자신을 들볶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지요. 남은 물론 자기 자신도 괴롭히지 않으면서 스스로 즐거운 존재, 그가 건달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스스로 행복한 사람, 다른 사람의 시선, 인정이나 평가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이 건달입니다.

 

 

2. 그러니 건달’, 하늘에 이른 사람,’은 비록 발은 땅에 붙어 살지만, 마음은 하늘에 잇대어 사는 비현실적인 사람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이들이 건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고향 하란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일흔 다섯 살이었고(12,4), 그의 아내 사래는 임신을 하지 못하여 자식이 없었습니다(11,30). 아브라함과 사래는 자기 고향에서 인생의 끄트머리에 있었고,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하나님은 그를 약속의 땅으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미래로 부르셨고, 그는 하늘의 부르심에 순종함으로써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12,2).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쌍둥이 형 에서 보다 조금 늦게 세상에 나왔다고 영원한 차남의 운명을 숙명적으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던 그는, 운명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불가역적인 생물학적 질서를 뛰어넘었습니다. 장남에게만 모든 권한이 계승되는 시대, 하나님은 차남인 야곱을 구원사의 계승자로 만드신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혹시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신 예수님도 건달이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분이니 건달임이 분명합니다(8,20). 예수님은 방랑하시면서 매일 필요한 양식을 구해야 하셨지만’(주님의 기도/6,11),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 잔치 자리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2,1-11), 얼마나 먹고 마시기를 즐기셨던지 적대자들은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11,19)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2,27)고 하시면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사람들과 밀 이삭을 잘라 먹으심으로써, 어떤 종교적 제도와 사회적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시는 동안 목수직도 내려놓으셨기에, 예수님은 마땅한 수입이 없어 생활을 몇몇 여인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정 먹을 것이 없으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기도 했지요. 그러니 사람들 눈에, 특히 제도권에서 교육을 받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엄격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분명 건달로 보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3,27). 이렇게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그리스도인은 그가 유대인이건 그리스인이건, 종이건 자유인이건, 남자건 여자건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피부색, 종교, 인종과 민족, , 장애, 소유를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세상이 죽었고, 그런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6,14), 그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유대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 등의 차별구조로 사람을 나누었는데, 유독 노인과 젊은이, 곧 세대 간 차별구조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노인이 차별받지 않았거나, 지금처럼 세대 간 갈등이 크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이 들어 힘이 없고 생산능력이 없어 부양받아야 할 처지에 놓인 노인들, 특히 병든 노인들이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났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사실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운 사람,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아는 사람,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빌립보서 4,11-12).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운 사람’, 이런 사람이 건달’, ‘하늘에 잇대어 사는 사람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건달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믿음 없이는 될 수 없습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 믿음’, 하늘 아버지께서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입히신다는 믿음, 들의 백합화를 솔로몬의 영화보다 더 아름답게 보는 믿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믿음(마태복음 6,25-34), 이런 믿음 없이는 건달’, ‘하늘에 이른 사람이라고 일컬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입지 않고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지요.

 

 

3. 그런데 사도행전은 성령임재의 표징을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2,17-18)라고 보도합니다. 아들과 딸, 젊은이, 늙은이, 남종과 여종들, 이들은 모두 삶의 중심부가 아니라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젊은이는 너무 젊다고, 늙은이는 이미 늙었다고, 종들은 자유가 없다는 이유로 소외당하고 차별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어,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늙은이들이 꿈을 꾼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노년의 특징의 하나는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꿈을 꾸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회상과 현실에 대한 불만, 미래에 대한 불안만이 지배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늙은이들이 꿈을 꾸기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초대교회에서 노인들은 성령을 받고 무슨 꿈을 꾸었을까요?

 

사도행전 성령강림사건은 구약성서 요엘서를 근간으로 한 것입니다(요엘서 2,28-32). 예언자 요엘은 주전 4세기, 자기 조국 유다가 충격적인 자연재해로 시달리고 있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불볕에 광야의 풀이 모두 타 죽고, 들의 나무가 이글거리는 불꽃에 모두 타버렸습니다. 시내에도 물이 마르고 광야의 초원이 다 말라서, 들짐승도 주님께 부르짖습니다.’(요엘서 1,19-20). 밭에는 말라비틀어진 풀만 남았는데, ‘풀무치가 쓸고 지나가니, 이어서 메뚜기가 갉아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누리가 썰어먹고, 누리가 남긴 것은 황충이 말끔히 먹어 버렸습니다.’(요엘서 1,4). ‘밭이 황폐해지고 곡식이 다 죽으니 땅이 통곡하고 백성의 기쁨이 모두 사라졌습니다.’(요엘서 1,10-12).

 

그런데 요엘은 이런 충격적인 자연재해를 오고 있는 주님의 날의 표징, 곧 파멸의 날로 선포합니다(요엘서 1,15). 자연재해로 인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회개입니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 백성이 주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하나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영을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여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인데,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님의 영을 부어 주겠다는 것입니다.’(요엘서 2,28-29).

 

아들딸들의 예언, 노인들의 꿈, 젊은이들의 환상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을까요? 요엘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심으로써, 노인들이 꾸었던 꿈, 젊은이들이 보았던 환상은 회복된 나라였습니다: ‘때가 되어 그 날이 오면,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회복시켜서 번영하게 하겠다.’(요엘서 3,1).

 

노인들은 바벨론에 의해 파멸된 예루살렘과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이 회복되는 꿈을 꾼 것이지요. 아직 너무 젊다는 이유로,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세상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난 이들이 나라가 회복되는 꿈을 꾸었고, 이들을 통해 하나님은 산마다 새 포도주가 넘쳐흐르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며, 개울마다 물이 가득 차고, 주의 성전에서 샘물이 흘러 나와 싯딤 골짜기에 물을 대어 주는’(요엘서 3,18) 나라로 회복시키신다는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꿈꾸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성령은 세상이 볼 때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젊은이와 늙은이, 여종과 남종이 환상을 보고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는 내가 죽고, 내게는 세상이 죽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늘에 잇대어 사는 사람들이지요.

그런 그리스도인들, 특히 성령을 받아 꿈을 꾸는 어른들이 오늘 우리 시대에 해야 할 일,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장 큰 형제전쟁을 겪고, 66년이 지난 지금까지 휴전상태로 분단된 민족의 화해, 단절된 관계의 회복입니다. 남과 북 사이는 물론, 남한 내 어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 진보와 보수 사이의 화해와 꽉 막히고 단절된 관계의 회복 말입니다. 독기어린 막말과 고집스런 자기주장만이 난무하는 꼰대들의 세상에서 화해와 회복의 건달이 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 성령 받은 어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예배일 절기 설교제목 설교자
489 2025-05-04 부활절 셋째 주일 한 아이와 하나님 나라 김진 목사
488 2025-04-27 부활절 둘째 주일 복음의 대가 임영섭 목사
487 2025-04-20 부활주일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임영섭 목사
486 2025-04-13 종려주일 장애를 가진 하나님 임영섭 목사
485 2025-04-06 사순절 다섯째 주일 이웃을 위한 향유 임영섭 목사
484 2025-03-30 사순절 넷째 주일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 임영섭 목사
483 2025-03-23 사순절 셋째 주일 새 이스라엘의 사명 임영섭 목사
482 2025-03-16 사순절 둘째 주일 전력을 다한 달음질 임영섭 목사
481 2025-03-09 사순절 첫째 주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임영섭 목사
480 2025-03-02 주현절 여덟째 주일 산 아래로 내려가라 임영섭 목사
479 2025-02-23 주현절 일곱째 주일 하나님이 나를 앞서서 보내셨다 임영섭 목사
478 2025-02-16 주현절 여섯째 주일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 임영섭 목사
477 2025-02-09 주현절 다섯째 주일 내가 만난 주님 임영섭 목사
476 2025-02-02 주현절 넷째 주일 사랑의 씨앗 임영섭 목사
475 2025-01-26 주현절 셋째 주일 거룩한 청취 임영섭 목사
1 2 3 4 5 6 7 8 9 10 ... 33
전체 메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