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하나님의 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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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민수기 21:4-9/ 에베소서 2:1-10/ 요한복음서 3:14-21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1-03-14 |
전주 | 오, 너희 죄를 애통하여라(J. S. Bach) |
찬양1부 | 십자가의 전달자(민호기 곡) 특송: 김준홍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십자가의 전달자(민호기 곡) 특송: 김준홍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주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arr. J. C. Pardini) |
후주2부 | 주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arr. J. C. Pardini) |
성경본문 |
민수기 21:4-9 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사람을 무니,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죽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하였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에,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에베소서 2:1-10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3:14-21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
1. 구약성경 민수기는 오경의 네 번 째 책인데, ‘칠십인 역’과 라틴어 ‘불가타’(Vulgata) 번역을 따라, ‘인구조사를 전하는 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민수기 1장과 26장에 두 번에 걸친 인구조사 이야기가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은 민수기를 ‘베미드바르’라고 하는데, 이것은 ‘광야에서’라는 뜻입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의 시내 산을 떠나 요단 강 동편 모압 평지에 이르는 40여년에 걸친 전 여정을 ‘광야에서’라는 제목으로 압축시켜 놓은 것이지요.
거칠고 험한 광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의 행진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치게 했습니다. 특별히 부족한 물과 식량은 그들을 더욱 괴롭혔습니다. 해방과 자유의 기쁨도 잠시,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공짜로 먹던 고기와 생선,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했습니다’(민 11,4-5).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만나 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습니다.’(민 11,6). 백성은 심하게 불평하면서, 모세와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이들의 불평을 들으신 주님, 진노하시어, 그들 가운데 불을 놓아 진 언저리를 살라 버리시기도 했습니다. 놀란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었고, 모세는 주님께 기도드려, 간신히 화를 면했습니다(민 11,2).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추라기를 보내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백성은 닥치는 대로 메추라기를 모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에 크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극심한 재앙으로 그들을 치셨고,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붙였는데, 그것은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이었습니다.(민 11,33-34).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기간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지만, 그날그날 먹을 만큼 만 거두어들이게 하셨습니다(출 16,4). 누구도 더 적게, 혹은 더 많이 거둘 수 없었습니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출 16,18).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아침까지 남겨 둔 것에서는 벌레가 생기고 악취를 풍겼습니다(출 16,20).
내일을 위해 먹을 것을 비축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불안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서 비롯된 행동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그날그날 먹을 만큼 만 거두어들이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내일은 우리 것이 아니라고. 내일은 우리가 오늘 쌓아놓은 재산이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손 안에 있으므로,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고, 모든 탐욕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시 울면서 모세를 원망하면서 불평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습니까?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까?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것도 없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납니다.’(민 21,5).
진노하신 하나님, 백성들에게 ‘불 뱀’, 곧 ‘독이 있는 뱀들’을 보내,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했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구합니다. ‘주님과 어른을 원망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민 21,7).
백성의 요구를 들은 모세, 하나님께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은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에게 물린 사람이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고 합니다(민 21,8-9).
고대 아시아에서 뱀은 한편으로 음부에서 온 악한 힘, 혼돈을 상징했습니다. 독이 있는 뱀은 치명적인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뱀은 다른 한 편으로 다산, 생명, 치유를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독이 약으로도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신앙은 뱀에 대한 마술적 관습에 관심이 없습니다. 모세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단 것은 구리로 만든 뱀 자체가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치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일어납니다.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아난다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만 살아났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민 21,9).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구리로 만든 뱀 자체가 신성하거나 주술적인 능력을 지닌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이지요.
2. 출애굽 후, 광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요한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3,14-15)고 말한 것입니다. 모세가 구리로 만든 뱀을 높이 든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에 의해 하늘로 올려 지셨고,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치유 받은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십자가 죽음에 넘겨주신 것은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 3,16).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요 3,17).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뿐인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실 만큼 사랑하셨고, 하나 뿐인 그 아들을 죽인 바로 그런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지요. 요한은 세상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외아들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 1,10-1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고, 온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악과 불신앙 때문에 좌절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만 실현됩니다.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사랑은 심판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도 현세에서의 파멸이나, 죽음 이후의 지옥심판이 아닙니다. 요한은 믿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심판받은 것이라고 합니다(요 3,18). 믿지 않기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고,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 삶,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 그 자체가 심판이라는 말이지요. 심판은 하나님의 빛에로의 초대를 거절했기 때문에 받는 형벌이 아니라, 거절 그 자체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심판은 헬라어로 ‘크리시스’(krisis)입니다. 여기서 영어의 ‘위기’(crisis)라는 말이 유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둠을 선택할 것인지, 빛을 선택할 것인지, 결단해야 하는 상황은 언제나 위기입니다. 중립은 불가능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빛 가운데 살 것인지, 아니면 불순종하고 어둠 속에서 살 것인지 결단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그 믿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 인간은 예수님의 활동과 인격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의해 심판받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 그 자체가 심판입니다.
3.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엡 2,9),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그렇다면 믿음은 필요 없다는 이야기일까요? 은총을 강조하면 인간의 신앙적 응답과 책임적인 행동을 약화시키고, 믿음을 강조하면 구원을 인간의 성취로 여기고 자만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요?(엡 2,9).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말한 ‘오직 믿음’과 ‘오직 은총’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요? 구원은 믿음의 확고함에 달려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나의 믿음과 상관없이 은총으로 값없이 받는 것인가요? 오직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면 굳이 선하게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요? 실컷 내 맘대로 살다가 죽기 전에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받는 것이 더 남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의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믿음을 통하여(durch den Glauben/through faith), 은혜로(aus Gnade/by grace) 구원을 얻었다’(엡 2,8)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이 상호작용하는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믿음은 결코 명사가 아닙니다. 요한도 믿음을 언제나 동사로 사용합니다. 믿음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또는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와 같은 명제에 대한 의식적 긍정이나 공적인 인정만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응답이자, 실천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에게 신앙의 반대말은 불신앙이 아니고 불순종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믿음에 앞서고, 믿음은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비롯된 순종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먼저입니다. 행위는 구원의 전제가 아니고, 결과일 뿐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이전에 ‘허물과 죄 가운데서,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엡 2,1-3).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마음 속에 불순종을 부추기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도록 충동하는 악한 영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사실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은 크신 사랑으로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다고 합니다(엡 2,6). ‘진노의 자식’이(엡 2,3) ‘하나님의 작품’이(엡 2,10) 된 것이지요.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작품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作品)입니다. 영어 성경은 ‘work of Art/ Masterpiece’로 번역했습니다. 예술가가 만든 강력하고 창조적인 걸작(傑作)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품’이라는 단어입니다. 가슴둘레, 수고, 태도 등을 의미하지만, 사람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性品)을 표현하는 품격, 품위, 기품에도 사용되고, 명품(名品)을 표현할 때도 사용됩니다. 그리고 작품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분신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창 1,26-27). 그러니 인간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이 인간을 작품으로 만드신 이유는 에덴 동산을 맡아서 돌보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창 2,15).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작품으로 만드신 것은 ‘선한 일을 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엡 2,10).
그렇다면,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 하나님의 작품인 크리스천은 마땅히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선한 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보전입니다. 기후위기에 처한 푸른 행성인 지구를 살리는 일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 살지 않고,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탐욕이라는 악령에 사로잡힌 통치자들이 국민을 학살하는 미얀마의 군부독재를 끝내는 일입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진영논리로만 판단하고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양극화된 세상을 화해시키고 평화를 일구는 일입니다. 혐오와 배제와 차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 어른들의 폭력에 아이들이 희생당하지 않는 세상 만드는 일,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받은 크리스천, 하나님의 작품인 크리스천이 해야 할 선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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