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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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이사야서 40:1-8/ 베드로후서 3:8-10a/ 마가복음서 1:1-8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12-06 |
전주 | 곧 오소서 임마누엘(Plainsong) |
찬양1부 | 감사하라, 주님께(G. F. Händel) 특송: 정록기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Swedish Folk Melody) 특송: 김준홍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J. McGranahan) |
후주2부 |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J. McGranahan) |
성경본문 |
이사야서 40:1-8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 한 소리가 외친다. "너는 외쳐라." 그래서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베드로후서 3:8-10a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마가복음서 1:1-8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한 것과 같이,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
바빌론의 적대국이었던 메데 왕국의 왕, 아스튀아게스(주전 585년-553년)의 봉신인 고레스가 이란 남부에(과거에는 엘람) 위치한 안산(Anshan) 지방의 통치자로서, 주전 553년, 반란을 일으켜, 수도 엑바타나를 점령했을 때, 아무도 근동의 패권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강적이었던 메데 왕국의 약화를 은근히 기대했던 바빌론의 나보니두스 왕(주전 556년-539년)은 사실 뒤에서 고레스의 쿠테타를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쿠테타에 성공한 고레스는 여세를 몰아 주전 546년, 사르데스를 함락시키면서 영토 확장에 나섰습니다. 바빌론의 나보니두스 왕은 곧바로 이집트와 리디아와 동맹을 맺고, 고레스에게 대항했으나, 오히려 바빌론 내부에서 고레스를 해방자로 생각하는 마르둑 사제집단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바빌론 제국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는 사제 가문 출신이었고, 특히 ‘달의 신’인 ‘진’을 열렬히 숭배하여, 바빌론의 강력한 마르둑(Marduk) 사제집단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분과 바빌론 장수의 투항으로 힘을 얻은 고레스, 마침내 주전 539년, 바빌론 수도에 입성했고, 바빌론 제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제2이사야는 바로 이 시기, 바빌론 제국의 전성기와 붕괴, 페르시아 제국의 부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전환기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전혀 없고, 심지어는 그의 이름조차 몰라, 우리는 주전 8세기에 활동했던 같은 이름의 예언자와 구별하여, 그를 ‘제2이사야’라고 부르는데, 이사야서 40장부터 55장까지에 그의 활동과 선포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제2이사야는 바빌론에 의한 유다의 파멸로, 주전 597년, 587년 그리고 582년, 세 차례에 걸쳐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예레미야서에 의하면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모두 4,600명이라고 하는데(렘 52,30), 여인들과 아이들이 포함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만일 이들이 제외되었다면, 실제 숫자는 12,000명에서 15,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주로 지도층 인사들이 포로로 잡혀갔는데, 이들은 제한된 지역 안에서 집도 짓고 농사도 지으면서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고(렘 29,5-6),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집회를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포로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조국, 남북왕조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 다윗 왕조의 종언이 더 이상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지 않으시는 표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바빌론 제국의 종교와 제의를 받아드리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귀향을 기대하면서, 옛 전통을 고집하고 과거지향적으로 준수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포로기간은 너무 길었습니다. 나라는 바빌론 제국에 의해 파멸 당했고, 지금은 남의 땅 유배지에서 포로가 된 지 40년이 훌쩍 넘어, 고향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지고, 귀향에 대한 꿈도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빌론 제국은 여전히 패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희망 없는 곳에서 희망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사 40,1-2).
구원과 귀향의 희망은 바빌론 제국의 멸망 혹은 새로운 통치자의 정치적 결단이나 자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기로 결정하신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물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이 48년 동안의 강제노동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귀향하게 된 것은 주전 539년, 바빌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신흥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의 관대한 식민정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제2이사야는 정치적 사건과 종교적 사건이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2이사야는 그 어떤 세계사적 사건도 모두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비신앙적인 역사 이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2이사야는 개인의 죄와 그 죄에 대한 용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와 용서와 관계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용서는 세계사적 전환에 영향을 미친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제2의 출애굽과 같은 민족해방 사건이고, 세계사를 위해서는 제국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이자, 권력지형의 전환이었지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일어나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건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모든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시는(사 41,4), 역사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한 신흥 페르시아 제국의 왕 고레스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물론 고레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믿는 신이 한 줌도 안 되는 유대인 포로들이 믿는 야훼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신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2이사야는 고레스를 바빌론을 공격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그의 능력을 바빌로니아 사람 앞에서 드러내기 위하여 주님께서 불러내신 종일뿐이라고 여긴 것이지요(사 45,1-4; 48,14-15). 페르시아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強附會), 지나치게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역사 해석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2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부족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주님이시며, 역사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고 인간은 단지 진흙에 불과합니다. 평범한 사람이건, 최고 권력을 가진 영원이건 그들은 단지 진흙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제2이사야는 외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사 40,6-8).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친히 땅을 만드시고, 그 위에 인류를 창조하신 분, 손수 하늘을 펴셨고, 모든 별에게 명령을 내리신 주님으로서, 세계의 지배자들을 주님의 의의 도구로 일으키십니다(사 45,9-13). 주님에게 지상의 뭇 나라들은 고작해야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물이나, 저울 위의 티끌과 같을 뿐입니다(사 40,15).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에게(벧후 3,8), 인간의 삶은 입김과 같고(사 40,7), 제국은 마치 강풍에 날리는 검불과 같을 뿐입니다(사 40,24). 그리고 주님은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시는 분입니다(사 4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이사야는 자기 백성과 같은 절망적인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정치적 독립과 땅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정신과 생명력의 원천인 성전과 성전예배도 상실했고, 포로 생활은 이제 50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이런 상황에서는 그 어떤 말도 백성에게 위로가 될 수 없었고, 그 어떤 약속으로도 희망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소리가 들려온 것이지요. ‘너는 외쳐라!’ 놀란 제2이사야는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고 선포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사 40,8-9).
그렇습니다. ‘여기에 너희 하나님이 계신다!’는 선언보다 더 위로가 되는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때,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곳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바로 그곳에, 바로 그 때에 자기 백성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야말로 제2이사야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선포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이미 이루어진 희망입니다. 우리는 제2이사야가 완료형으로 선포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직 포로기가 끝난 것도 아닌데,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는 포로기가 끝났다고 완료형으로 선포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이루어진 희망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닙니다. 희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믿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막 11,24)고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한 것이지요(히 11,1). 바라는 것을 이미 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망을 보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코비드-19’ 제3차 대유행의 위협 속에서, 우리교회 창립 75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지나온 역사를 기억하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한 결의를 다지면서,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야 할 이 날에,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감염의 위험, 위협받는 생계, 교회는 교회대로 교인 감소와 재정난으로 인한 온갖 근심과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경동교회 성도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있고’(사 40,8),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여기에 여러분과 함께 계시니’(사 40,9)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목자와 같이 그의 양 떼를 먹이시고,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며, 조심스럽게 이끄시니’(사 40,11), 염려하지 마십시오.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살면 됩니다. 주님의 교회가 신자들 때문에 있거나, 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형편이 어려워지면 어느 공동체건 분란이 일어나고, 서로 손가락질 하면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하지 않겠습니까? 다르지 않다면 세상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집단이겠지요. 어두울 때 빛이 더욱 빛나는 것처럼, 어려울 때 믿음이 더욱 돋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당면한 위기를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더욱 새롭게 하고, 복음정신을 회복하고, 주님의 교회를 만세반석 위에 세울 수 있는 기회로 기쁘게 받아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마치 광야와 사막에 하나님께서 오실 큰 길을 곧게 내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드럽고 넓은 땅 위에 길을 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이미 만들어 놓은 길을 조금 더 넓히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광야와 사막에 길을, 그것도 하나님께서 오실 큰 길을, 곧게 내어야 합니다(사 40,4).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심부름꾼, 세례자 요한이 선포했던 것처럼(막 1,4),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과거로부터는 죽고 미래에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습관처럼 오던 평탄한 길, 과감히 방향 전환하여, 광야와 사막 같은 현실 위에, 거칠고 험한 곳에 하나님께서 오실 큰 길을, 곧게 내어야 합니다.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은 역설적이게도 교회창립 75주년을 기리는 우리에게 준 큰 선물이자 동시에 과제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과제를 주셨으니, 능히 감당할 힘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올 해 창립 75주년을 맞는 우리 경동교회가 ‘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시대의 도전과 위기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이겨내는 신앙공동체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교회, 한국교회의 희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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