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주님이 인도하시는 발걸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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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잠언 16:1-9 / 고린도전서 9:19-21,24-25 / 마태복음서 5:33-37 |
설교자 | 임영섭 목사 |
예배일 | 2022-08-28 |
전주 | 주여,높이찬양받으소서(D.Buxtehude) |
찬양1부 | 오소서 하늘 아버지여(L. R. Dressler)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내 주 나의 목자(arr. W. Livingston)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J. Wyeth) |
후주2부 |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J. Wyeth) |
성경본문 |
잠언 16:1-9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경외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고린도전서 9:19-21,24-25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 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서 5:33-37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님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는 또한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 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
주님이 인도하시는 발걸음
우리가 신약성경 바울서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도바울의 삶과 신앙의 원칙은 매우 간단하고 뚜렷합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전서 9장 23절에 나오는 말씀 “나는 복음을 전하려고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복음 전파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진 자유와 권리를 기꺼이 포기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철저히 자신을 단련시키고 훈련시킨다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이 추구하는 그 한 가지 목표, 그것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 하나님의 뜻을 세상 가운데 펼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부름을 받아 사도로서 많은 일들을 했지만, 그가 자신의 전 인생을 걸고 전력을 다한 일, 그가 행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최우선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삶과 신앙을 설명하기 위해서 당시 고린도 사람들에게 익숙했던 운동경기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고린도에서는 고대올림픽 같은 이스미안 경기대회가 2년마다 열리고 있었는데, 창던지기나 레슬링을 비롯하여 여섯 종목의 경기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는 길이 얼마나 치열한지 설명하기 위해서 복싱 경기를 예로 듭니다. 그리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자신의 복음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 달리기 경기를 은유로 사용합니다.
바울은 단 하나의 목표, 바로 복음을 향해 달려 나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 질주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이러한 복싱경기나 달리기는 누군가와의 경쟁을 통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때려눕히는 것을 얘기하기보다 자신의 몸을 “쳐서” 굴복시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의 몸을 친다고 할 때, 그 치다, 라는 말이 헬라어, 휘포피아제인, 바로 권투경기에서 주먹으로 때린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에게 자신이 달려가는 인생길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자신의 힘을 키워서 내 힘과 능력으로 성취하는 삶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쳐서 굴복시킴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삶, 그것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굴복시키는 순종의 삶을 가리킵니다.
사도바울의 달리기는 나의 힘과 스피드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예수께서 주시는 힘으로 달리는 경주,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달리기, 이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늘 고린도전서와 함께 읽은 잠언과 복음서의 말씀도, 우리의 인생과 신앙이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구약성경에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내가 새로운 가르침을 주겠다. 그것은 아예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고 땅은 하나님의 발판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당시에는 자신이 무엇인가 거짓이 들통날 수 있거나,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때, 맹세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큰 맹세는 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명세였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만약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순간, 그것은 내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내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도구로 삼고 수단으로 삼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는 인간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는 것이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고 명료하게, 하나님을 도구가 아닌 주인으로 인정하며, 그분께 예, 아니요, 순종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인생길을, 우리의 믿음의 길을, 달려가든지 걸어가든지, 그 길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길이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일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약성경에서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씀이 오늘 함께 읽은 잠언 16장 본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잠언 16장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우리가 늘 마음에 품고 자주 묵상하고 읖조리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도 교우들 중에 이제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이나 대학생활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무언가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하는 교우들에게 축하편지나 카드를 쓸 때, 종종 잠언 16장 9절 말씀을 격려의 말씀으로 전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이러한 내용은 16장 9절뿐 아니라 1절에서도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3절에서도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모든 일을 이루게 하시는 분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강조합니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성경을 기록할 때 여러 가지 문학적인 규칙이나 관습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일반적인 것이 가장 중요 말씀은, 가장 중요한 내용은 본문의 중앙에, 가운데에 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 같은 이야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구절은 이야기의 중앙에 위치시킵니다.
그래서 바벨탑 이야기가 나오는 11장 1절부터 9절까지 말씀 중에서, 가운데에 위치한 11장 5절 “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이 구절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거대하고 화려하고 높은 탑을 건축하며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처럼 자랑스러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으셨고 직접 내려오셔서 봐야 했다. 바로 이것이 바벨탑 이야기의 핵심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을 보면 잠언 1장부터 9장까지는 서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10장 1절부터 22장 16절까지 잠언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솔로몬의 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의 잠언의 한가운데 위치한 것이 바로 오늘 잠언 16장 말씀입니다.
16장 앞에 나오는 내용과 구절이 약 180절이고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잠언 내용이 역시 약 180절 정도 됩니다.
따라서 오늘 16장 말씀은 우리에게 솔로몬의 잠언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지혜의 가르침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가장 중요한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야훼 하나님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절부터 9절까지를 보면,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주님이라고 나오는 단어가 8절을 제외하고 무려 8번이나 절마다 나옵니다.
1절에서는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시고, 2절에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 바로 우리의 심장을 꿰뚫어 보신다고 말씀합니다.
3절에서는 우리가 계획한 일을 이루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4절에서는 세상 모든 것을 쓰임에 맞게 만드신 분으로 주님을 고백합니다.
5절과 6절, 그리고 7절에서는 거만한 자를 심판하시고 어질고 진실된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또한 화목케 하시는 분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결국 주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오늘 솔로몬의 잠언의 중심에 있는, 가장 중요한 16장 1절부터 9절까지의 핵심은 바로 인간의 삶을 주관하시고 그것을 인도하시고 성취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는 구절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위의 주권자, 섭리자, 심판자,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고 강조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말씀을 보면서,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은 알겠는데, 왜 성경은 이토록 우리 인간의 역할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강조되고 있는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시더라도, 결국 그 길은 우리의 두 발로 걸어가야 하고, 우리의 힘과 의지도 그만큼 중요한데 왜 인간의 역할은 그토록 축소되고 있는가?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과 관련하여,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 특별히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보면, 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지, 우리 인간의 역할이라는 것이 그토록 보잘것없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가거나 뛰어갈 때, 우리의 과거는 우리 뒤에 있고, 현재는 지금 발밑에 있고, 미래는 저 멀리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본다, 이렇게 말하고, 지난 과거는 내다본다고 하지 않고 돌아본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몇 가지 영어 단어들을 보면, 이러한 우리의 생각과 다른 매우 독특한 의미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영어단어 중에 before라는 단어가 있고 반대로 after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주로 before는 –앞에 있는 걸 가리키고 after는 –뒤에 이런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before라는 단어를 자세히 보면 이 단어가 공간의 의미로는 우리 앞에 있는 걸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시간적으로 보면 “–하기 전에”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과거가 우리 등 뒤에 있는 걸로 생각하는데, 이 영어단어는 시간으로 과거를 가리키면서 공간적으로는 앞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생각은, 영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수천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과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리프네이”, 바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고, 미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하리트는 우리의 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미래와 내일이 우리 앞에 있지 않고 우리 뒤에 있습니다. 반대로 과거와 어제는 우리 뒤에 있지 않고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며 앞을 향해 걸어가고 뛰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등 뒤에 있는 미래를 향해 눈앞에 펼쳐지는 과거를 보며 뒷걸음치며 나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길이요 믿음의 길입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왜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권투경기를 하듯이 주먹질을 하며 자신을 낮추고 예수께 순종하려고 했는가?
육상경기를 하듯이 의의 면류관을 향해 달려가는 사도바울은 예수를 의지하지 않고는 그 길을 달려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의 달리기가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것인지는 우리가 운동장에서 뒤로 달리기를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오늘 잠언 말씀처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주님께 맡겨야 하는가? 왜 우리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우리는 당장 한 발자국 뒤에 놓인, 나를 넘어뜨릴 수 있는 어떤 장애물도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내일도 모레도, 아니 당장 이 예배가 끝난 한 시간 이후에도, 우리가 어떻게 될지, 내 등 뒤에 펼쳐지는 미래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꾸 과거에 있었던 출애굽 사건이나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기억하고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성경은 이토록 지금까지 지내온 것에 대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강조하고 있는가?
그것은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보이지 않는 캄캄한 미래를 힘 있게 갈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미래를 향해 뒷걸음치며 나아갈 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며, 그 발걸음을 밝혀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핵심적인 신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막연한 고백이 아니라, 캄캄한 등 뒤를 향해 뒷걸음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 우리의 모든 일과 발걸음을 주님께 맡겨야만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우리의 운명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기까지 우리가 지내온 것이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시고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우리 눈에 들어오는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뛰어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일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참으로 연약하고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처럼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굴복시키고 겸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의 손을 붙잡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목자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실 때, 우리가 달려갈 길을 모두 달려가, 주님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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