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넷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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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성경구절 사도행전 4:5-12/ 요한1서 3:16-24/ 요한복음서 10:11-18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1-04-25
전주 그리스도여 우리와 함께하소서(G. Böhm)
찬양1부 주 이름을 크게 높여 찬양(J. P. Scholfield)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주 예수 다스리시리(E. Thiman)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우리 서로 받은 기쁨(C. A. Miles)
후주2부 모퉁이 돌이 되신 주님(G. Young)
성경본문 사도행전 4:5-12
이튿날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해서,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였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 놓고서 물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그 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요한1서 3:16-2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우리는 압니다.

요한복음서 10:11-18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의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를 흩어 버린다. -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1.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리는 문 곁에,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나이가 마흔 살이 넘었다고 하니(4,22), 그는 40년 이상을 걷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아온 것이지요. 그런데 성전으로 들어가려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을 하는 그를 눈여겨 본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는 즉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3,3-8).

 

이 소식을 들은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와 사도들을 붙잡아 가두어 두었고(4,1-3), 이튿날 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하여(안나스는 주후 6년에서 15년까지 대제사장직을 맡았음), 가야바(요셉이라고도 불린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 주후 17년에서 36년까지 대제사장직을 맡았음)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의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신문했습니다(4,5-6). 당시 예루살렘의 최고위층이자,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적대자들이라고 할 만한 무리가 다 모인 것이지요.

 

그들은 반원으로 둘러앉아서, 사도들을 가운데에 세워놓고,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물었습니다. 유대 최고 의회 의원이었던 그들은 사실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4,13). 갈릴리 촌놈들이니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가방끈이 짧아 학력도 없고, 사회적 지위는 더욱 없을 터이니, 어쩌면 악령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런 이적을 행했을지 모른다는 강한 의혹을 품고(12,24), 경멸하는 태도로 질문을 던진 것이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우리가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과 또 그가 누구의 힘으로 낫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면,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4,8-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착한 일 했다고 법정에서 신문하고 재판하는 일이 있을까요? 상을 주고 칭찬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최고법정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신문한 것은 그들이 나면서부터 40여 년 동안 걷지 못하고 구걸하는 걸인을 치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와 구원은 당시 제사장들의 독점적 권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특권이 배운 것도 없고, 이름도 없는 시골뜨기들에 의해 침해당했다는 모독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한 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4,10), 그 장애인이 낫게 되었다는 베드로의 증언이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십자가형을 집행할 권력을 가진 로마 총독의 이름도 아니고, 속죄 권한을 가진 대제사장의 이름도 아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구원했다니,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참을 수는 더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나,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을 수 없는경험은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의 보편적인 특징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더 큰 충격에 빠뜨린 것은,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다.’(4,12)는 베드로의 증언이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이름은 로마 제국의 황제도,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니, 하늘 아래, 그 어떤 이름도, 설령 그것이 돈이거나, 권력이나 명예, 또는 종교나 신()들의 이름일지라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만이,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돌이지만, 머릿돌이 되신 예수만이(4,11),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유대 최고법정 앞에서 경의를 표하면서도 솔직하고 담대한 베드로의 증언과 병 고침을 받은 증인 앞에서, 그들은 더 이상 트집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명령했습니다(4,17-18).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단호하게 말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4,19-20). 권력자들의 엄중한 경고와 명령과 위협(4,17-21)도 제자들의 입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 없는 이런 담대함,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지요.

 

2. 요한복음서 저자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삯꾼인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대립시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마카비 혁명(주전 166-143)과 하스몬 왕조의 통치 시대(주전 142-63)에 실제적인 도둑과 강도였습니다. 요한은 선한 목자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지만, 도둑이고 강도인 삯꾼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한다고 합니다(10,8).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지만,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는 것입니다(10,11-12).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빗대는 전통은 족장시대와 팔레스타인 정복 때까지 이스라엘이 주로 목축업을 한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후에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을 때에도, 목축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었고, 하나님은 양떼의 목자로 인식되었습니다(49,24; 23; 78,52-53). 족장들과 모세, 다윗도 모두 목자였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를 목자로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은 고대 근동지방의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 특히 불경건한 왕들은 악한 목자로 비난을 받았는데(왕상 22,17; 10,21; 23,1-2), 특히 에스겔 예언자는 하나님의 양떼인 백성을 돌보지 않고, 착취하며, 약한 자를 무시하고, 그릇된 길로 가는 목자들 혹은 지도자들을 질책합니다.:

 

목자들이란 양 떼를 먹이는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기는 하면서도, 양 때를 먹이지는 않았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34,2-4).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양떼를 사악한 목자들로부터 보호하시며, 스스로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실 것을 약속합니다.:

 

내가 나의 양 떼를 찾아서 돌보아주겠다. 양 떼가 흩어졌을 때에 목자가 자기의 양들을 찾는 것처럼, 나도 내 양 떼를 찾겠다. 캄캄하게 구름 낀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하여 내겠다....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들겠다.’(34,11-16).

 

이런 선한 목자 같은 지도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만 볼 수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에도 보기 힘듭니다. 도둑이고 강도인 삯꾼은 사실 어느 시대, 어디에나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 기업, 언론사, 지방의회와 국회, 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에도 많고 교회에도 널려 있습니다. 국민을 호구(護具)로 아는 집단,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라도 국민을 속이거나, 버리고, 팔아먹는 사람은 어느 영역에나 다 있지요.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기 양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기 때문이고, 자신의 양을 자세히 알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우리 안에 있는 양들만이 아니라, 자기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 곧 이방인들도 같은 우리 안으로 이끌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되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10,16).

 

그렇습니다.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아니 하나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두 집단,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선한 목자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교회가 다양한 인종과 성, 나이와 신분, 출신과 계급, 생각과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것도, 인간적 능력이나 교인들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양들을 알고,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이런 수직적 관계가 형제자매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규정하기 때문에,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도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요청하십니다.

3. 요한은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된 사랑은 타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라는 말이지요. 사랑의 형태도 셀 수 없지만,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도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진정성이 꼭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 )가 말한 것처럼,

 

사랑에는 오직 단 하나의 척도가 있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죽음이다.

모든 진정한 사랑의 끝에는 죽음이 서 있으며,

죽음으로 끝나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다.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항상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사랑을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기꺼이 불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사랑,

사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랑만이 진실하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형제자매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의 실천으로 응답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합니다(요일 3,16).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함석헌(1901-1989) 선생님이 쓰신 이런 시가 있습니다.: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칭찬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그런 사람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가진 시대도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행복한 시대이지요. 우리는 세월호희생자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침몰해가는 세월호’ 5층 교사실에서 학생들이 있는 4층으로 내려가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내어주며 탈출하라고 소리치다 물속으로 사라져, 지금까지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9명의 희생자 가운데 한 분인 양승진 선생, 사고 직후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아이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연락이 두절, 참사 한 달 만인 519, 구명조끼도 입지 못한 채 주검으로 발견된 전수영 선생, 사고 직후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구명조끼를 착용시키다가, 마지막 학생에게 자기 구명조끼를 벗어 주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비상구 쪽으로 향하다가 실종, 선실 후미에서 발견된 남윤철 선생, 사고 직후, 같이 밖으로 나가자고 하는 학생들에게 걱정하지마, 너희들부터 나가고 선생님은 나중에 나갈게.’ 말을 남기고 구조를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달려갔다가 목숨을 잃은 2년차 새내기 교사 최혜정 선생, 이런 분들이 하나님에게서 난 사랑이 무엇인지(요일 4,7),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말이나 혀가 아니라, 행동과 진실함으로 증명한 것이지요(요일 3,18).

 

목숨을 걸고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적 가능성이 아니기에, 요한은 그런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안다고 한 것입니다(요일 4,7).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니, 말이나 혀가 아니라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요일 3,17)는 권고입니다.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말하다가, 갑자기 재물의 나눔으로 가는 것은 사랑의 강도가 약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는 재물을 나누는 것이 조금 더 쉬운 길이니,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제시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목숨을 버리는 사랑과 재물을 나누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사랑은 자기희생이라는 본질에 있어서 결국 같은 것이라는 말일까요?

 

요한은 사랑이 우리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만 적용되는 계명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관련된 계명임을 확신했기에, 목숨을 버리는 사랑에 이어, 재물을 나누는 사랑을 동등하게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재물은 거창한 재산이 아니라, 생활필수품 이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재물(bios)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생계비를 말합니다. 재물이 남아돈다고해서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창한 인류애를 말하고, 인권을 외치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형제자매를 구체적으로 돕는 것이 사실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요한이 궁핍한 형제라는 단어를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사용한 것도, 자칫 추상화될 수 있는 이웃사랑을 구체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침몰해 가는 세월호 안에서 학생들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이들이 평소에는 자기만을 위해 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목숨을 건 사랑을 실천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참사 이전에도 일상적인 생활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요일 5,3).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죄 때문에, 마음에 가책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이라고(요일 3,20-22)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하는데 실패했을 때에도,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담대한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우물쭈물, 중언부언, 의심과 불안으로 흔들리는 기도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마음의 가책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고, 우리가 그런 소심하고 믿음 없는 인간인 것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에게 있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희망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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