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희망이 사라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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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창세기 17:1-7/ 로마서 4:13-18/ 마가복음서 8:31-38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1-02-28 |
전주 | 이 때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아니하시면(D. Buxtehude) |
찬양1부 | 십자가와 나(신상우 곡) 특송: 김경원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십자가와 나(신상우 곡) 특송: 김경원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라(H. Rinck) |
후주2부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라(H. Rinck) |
성경본문 |
창세기 17:1-7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와 언약을 세우고 약속한다. 너는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내가 너와 세우는 언약은, 나와 너 사이에 맺는 것일 뿐 아니라,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도 대대로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로마서 4:13-18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약속은 헛된 것이 됩니다. 율법은 진노를 불러옵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은혜로 주셔서 이것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도, 곧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장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습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서 8:31-38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
1. 아브라함이 나이 아흔 아홉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와 계약을 맺으셨습니다(창 17,1). 그 계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면, 하나님은 몸소 언약을 세워, 그가 크게 번성하여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창 17,1-4). 그 때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지 23년이 지난 후였고(창 16,16),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창 12,2), 아기를 얻지 못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녀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은 지 13년이 경과한 후였습니다(창 16,16).
23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동안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는데, 다시 또 언약하시는 하나님을 과연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이해는커녕,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창 17,17).
아브라함의 회의, 불신앙은 이해할만합니다. 10년도 아니고, 23년이라는 세월동안 약속성취의 아무런 징후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고, 하나님 체면 상하게 해드리지 않을 요량으로 아브라함은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바랍니다.’(창 17,18).
자기와 아내 사라에게 오래 전에 한 약속은 성취되기를 바라지도 않겠으니, 그저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이나 잘 되게 해줘도 상관없다는 투이지요. 하나님 체면 살려주면서, 동시에 자신을 정당화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의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줄 것이다.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여라. 내가 그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그 언약은, 그의 뒤에 오는 자손에게도,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창 17,19).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는 선언이지요. 설령 가까운 시간 안에, 우리가 기대한 시기 안에, 약속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창 17,4)는 미래형 약속을 하신 다음에, 곧이어,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창 17,5)고 완료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에게는 미래형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완료형입니다. 인간에게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가 기도하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미 그것을 받은 줄로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막 11,24)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을 바꾸셨고, 그 표징으로 모두 할례를 받게 하시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의 이름도 주십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단지 사람을 가리켜 부르는 일컬음이나,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사물에 붙이는 일컬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름에 주어진 중요성과 이름 안에 담겨 있는 능력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존재의 본질과 운명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사람에게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는데,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창 2,19-20)고 합니다. 이로써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름은 그 이름을 준 신(神) 혹은 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규정합니다. 그래서 관계를 변화시키려고 할 때, 흔히 이름을 바꾸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정복군주들은 이스라엘 왕들의 이름을 바꿈으로써 예속관계를 분명히 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느고 왕은 유다 왕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바꿨고(왕하 23,34), 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왕의 환관장은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에게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을 새로 주었습니다(단 1,7).
개명은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바요나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면서(막 3,16), 교회의 반석이 되라고 하셨고(마 16,1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의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막 3,17).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이름을 주는 사람의 기대와 새 이름을 받는 사람의 새로운 정체성을 각인시키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을 잘 지키고, 그의 자손들도 잘 지켜야 한다는 언약의 표로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합니다(창 17,10). 할례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유럽과 아시아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세계의 고대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이집트, 가나안과 아랍 등지에서 시행되었는데, 감염방지, 몸의 청결, 결혼준비, 행운을 가져오거나 액땜을 위한 주술적인 기능, 신에 대한 헌신의 표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할례는 하나님과의 계약을 표시하는 징표이자(창 17,11), 계약 공동체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여겨졌습니다.
이렇게 언약의 표징을 몸에 남김으로써, 하나님은 언약의 영원함은 물론(창 17,13), 자기 백성이 언약을 구체적이고 반복적으로 기억하게 하신 것이지요. 마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지만, 몸에 남겨진 흔적은 사라지지 않으니,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전승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가 받은 온갖 수모와 수고와 고통이 그의 몸에 남긴 흔적을 ‘예수의 상처 자국’이라고 표현했고(갈 6,17), 그가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다.’고 고백했습니다(고후 4,10). 사도 바울에게도 몸에 남은 상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생명을 영원히 상기시키는 언약의 표징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후의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한창 더운 대낮에, 세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할 때,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립니다.: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창 18,10-12).
우리는 사라의 의심과 회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흔 살의 나이에, 월경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라가(창 18,11)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인간적 가능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웃었는데(창 17,17), 이제는 그의 아내 사라도 웃습니다(창 18,13).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아브라함 집안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았지만(창 17,27), 하나님의 언약은 현실성도 없고, 실현가능성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2. 그렇습니다. 할례의 실행 자체가 약속이 성취될 것을 보장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는다는 표시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야 한다.’(창 17,1)는 것을 일깨워주는 표시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롬 4,13)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할례로 구현된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롬 4,17) 약속을 보장하신다는 것이지요.
할례만 의지했다면, 아브라함은 모든 육체적, 인간적 가능성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의 언약도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기 때문에’(롬 4,18), ‘그의 나이가 백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에’(롬 4,19), ‘하나님은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롬 4,21), 마침내, 의롭다고 여겨졌고,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약속을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3. 오늘은 한국교회가 삼일독립만세운동 102주년 기념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해마다 삼일독립만세운동 기념일이 오면, 우리는 역사를 돌이켜보고, 왜 우리가 일제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41년 동안의 식민통치기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1904년 8월에 한-일협약을 시점으로 계산/이 협약으로 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외교와 재무고문을 받아들여, 외국과의 외교는 일본정부와 협의해야 한다는 내용을 강요받았습니다), 1945년 해방되었지만, 지금의 한일관계는 어떤지, 우리는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독립 국가인지, 이런 저런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친일파 논쟁, 독도 영유권분쟁,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문제 등이 남아있고, 이 때문에 나라가 분열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의 성경말씀과 연관하여 생각할 주제의 하나는 친일파 문제입니다. 과연 무엇이 친일이며 어디까지가 친일인지부터, 적극적 친일과 소극적 친일, 자발적 친일과 강요된 친일 등 그 규범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모두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윤치호(1865-1945),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지도자였고, 독립신문 2대 사장이자 신민회 지도자로 적극적으로 일제통치에 저항하던 그가, 점차 소극적 저항으로, 마침내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출감하면서 매일신보사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 조선 민족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피아의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힘쓸 필요가 있는 줄로 생각하고……이후부터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하여서 일선(日鮮) 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든지 일선 양 민족의 동화에 대한 계획에는... 힘이 미치는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 볼 생각이다’(매일신보, 1915.3.14)고 말한 것이나, ‘인종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 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저열하고 무능한 조선의 민족성으로는 자치를 손에 쥐어준다고 해도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법은 없지만,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우리의 선택지도 우리 선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선택에 대한 확실한 신념과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윤치호도 해방 후, 친일파 청산문제가 거론되자, ‘한 노인의 명상록’이라는 편지에서 ‘역사의 불가항력’을 역설했습니다.: ‘일본의 신민으로서 조선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들에게 일본 정권의 명령과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는 어떤 대안이 있었겠습니까? 우리의 아들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딸들을 공장에 보내야만 했는데, 무슨 수로 군국주의자들의 명령과 요구를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변명입니다. 그러나 틀린 말입니다. 동시대를 살았으나, 윤치호와 다른 길을 선택한 독립 운동가들도 많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므로 선택은 역사의 불가항력의 강요가 아닙니다. 윤치호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고, 저열하고 무능한 민족성을 가진 한국 사람은 자치권을 주어도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갑자기 해방이 올 줄 몰랐다고 항변한 것이지요. 일제식민통치가 오래 가지 않을 것이고, 해방이 갑자기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친일했겠느냐, 두려운 협박과 달콤한 회유를 과연 누가 이겨낼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지요.
‘후에 태어난 세대의 은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히틀러 나치 정권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지 못한 독일의 후 세대들이,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유대인 학살과 전쟁에도 책임이 없는데, 왜 지금도 과거사에 책임을 져야하느냐는 반발이 있을 때, 독일의 제6대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제커(Richard von Weizsaecker, 1920-2015)가 한 말이지요.
1985년 5월, 세계대전 종전 40주년을 기념하는 의회 연설에서, 그는 ‘우리 모두는 죄가 있든 없든, 젊었든 나이 들었든, 과거를 받아들이고 책임을 져야 한다.’며 ‘독일인들은 꾸밈과 왜곡 없이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기억하지 않고는 화해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전쟁 책임이 없는 오늘의 ‘독일 젊은이들은 단지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참회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는 (나치 만행을)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해묵은 친일파 문제를 재론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 그 시대를 살았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자신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후세대의 은총을 빗대어, 역사를 망각하고, 친일파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는 값싼 은혜를 베풀어도 안됩니다. 현재의 한일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말은 쉽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지요. 반일과 혐한을 극복하고, 화해와 협력, 공존과 공영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 참으로 지난한 일로 보입니다. 그리고 미중관계가 악화되면서, 가까운 시기 안에 한일관계가 전향적으로 변할 가능성도 보이지 않습니다.
4.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지 23년이나 지났지만, 아직 아들을 얻지 못했고, 이제 100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아브라함 같은 처지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막 8,31),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들이 스승에게 걸었던 희망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사흘 후 부활 언약도 제자들에게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전에 그들이 당하고 감당해야 할 끔찍한 공포와 고난에 대한 적합한 보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습니다.’(막 8,32). 베드로는 예수님의 메시아 직이 왕권, 권력과 승리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여기서 ‘꾸짖다’는 말은 단순히 나무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마가는 이 단어를 귀신을 쫒아내는 데 주로 사용했는데, 이로써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는 사건은 신적인 계시와 악마적인 저항 사이의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사탄이어서가 아니라, 사탄과 같은 생각, 곧 예수님을 처음 시험했던 사탄의 기대와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공생애 처음에,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을 시험했지요(마 4,8-10).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 곧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사람의 일, 영광의 길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꾸짖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막 8,34-35)고 말씀하십니다. 스승인 예수님의 길과 제자의 길이 다를 수 없지요. 스승의 제자에 대한 기대, 제자의 스승에 대한 희망이 다르면, 같은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고 하심으로써, 죽음으로 끝나는 길, 모든 희망이 사라진 때, 생명이 시작되고, 희망이 드러나는 역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를 음란하고 죄가 많은 세대로 규정하십니다(막 8,38). 맘몬을 숭배하고, 권력과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명을 폭력적으로 파괴하는 현실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올 때, 돈과 권력이 없다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긴 사람을 주님도 부끄럽게 여길 것이고, 십자가의 길을 부끄럽게 여긴 세상을 주님도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막 8,38).
그런데 이 약속, 지금 여기 서 있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 실현되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와 있는 것을 볼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막 9,1). 하나님의 언약은 미래시제가 아닙니다. 현재완료시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는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희망할 수 있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미래를 현재로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이 크리스천인 것이지요. 아직 오지 않은 새로운 세상, 이미 온 것처럼, 우리 삶 안에서 이미 구현된 것처럼 사는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일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2년이 지났는데도, 과연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독립국가인가라고 회의(懷疑)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를 탓하고, 현재를 안타까워하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독립국가로 당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우리가 진정한 독립국가임을 세계에 증명하는 것이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시대에 취할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들불처럼, 사랑이 햇빛처럼 퍼지는 하나님의 통치가 능력으로 임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소망해야 할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현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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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 | 2025-04-20 | 부활주일 |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 임영섭 목사 |
1289 | 2025-04-13 | 종려주일 | 장애를 가진 하나님 | 임영섭 목사 |
1288 | 2025-04-06 | 사순절 다섯째 주일 | 이웃을 위한 향유 | 임영섭 목사 |
1287 | 2025-03-30 | 사순절 넷째 주일 |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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