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하나님의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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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예레미야서 31:10-14/ 에베소서 1:10-14/ 요한복음서 1:10-18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1-01-03 |
전주 | 인류의 소망 되시는 예수(J. S. Bach) |
찬양1부 | 참 좋으신 주님(김기영 곡) 특송: 김홍태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
지휘자 | |
반주자 | |
후주1부 | 오 아름다운 아침(J. Sibelius) |
후주2부 | |
성경본문 |
예레미야서 31:10-14 "뭇 민족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듣고, 먼 해안지역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이 그들을 지켜 주신다.' 그렇다. 나 주가 야곱을 속량하여 주고, 야곱보다 더 강한 자의 손에서 그를 구원해 냈다. 그들은 돌아와서 시온 산 꼭대기에서 찬송을 부르고, 주의 좋은 선물,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양 새끼와 송아지들을 받고 기뻐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은 물 댄 동산과 같아서, 다시는 기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 때에는 처녀가 춤을 추며 기뻐하고,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고, 그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그들이 근심에서 벗어나서 기뻐할 것이다. 그 때에는 내가 기름진 것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것이며, 내 좋은 선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에베소서 1:10-14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서 1:10-18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은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쳤다. "이분이 내가 말씀드린 바로 그분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이분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
2021년 ‘신축년’(辛丑年), 이른바 ‘흰 소의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직하면서도 근면 성실한 이미지를 가진 소, 하품 밖에는 버릴 게 없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우리 일상생활에 소중한 동물이지요. 또 소는 성질이 온순해 웬만한 일에 쉽게 놀라거나 흔들리지 않지만, 화가 나면 무섭게 돌변하기도 합니다. 소와 관련된 우화나 속담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불교의 초기 경전, ‘숫타니파타’ – 수타(sutta)는 팔리어로 경(經)이란 말이고, 니파타(nipata)는 모음(集)을 의미하여 부처님의 설법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 71편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시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무소’는 뿔이 하나 뿐인 코뿔소로 인도와 아프리카에만 있는 소이지요. 그 어떤 소리에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진정한 자유인으로, 세상 한 복판에서 결코 세속적이지 않게, 소처럼 우직하고 곧은 마음과 행동의 수행자가 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2020년이 끝나기 전에 비록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고, 치료약도 개발 중이라고 하지만, 2021년 새 해의 전망도 결코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우리의 과학적 노력을 무위로 돌려보낼 수 있는 바이러스 변이가 일어날 수 있고,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이 언제 다가올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코로나로 인한 장기적인 경기침체는 사회적 양극화와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 분명하고, 사회적 약자들, 특히 도시에 거주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더 많은 타격과 희생을 당할 것입니다.
새 해는 어쩌면 인류에게 모든 것을 그 마지막에서부터 바라보고, 그 근본에서부터 성찰하고, 새로운 문명사적 전환을 준비하도록 압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어떤 평판과 가짜뉴스에도 놀라지 않는 사자 같은 용맹함,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자유로움,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 같은 고결함을 간직하고, 무소의 뿔처럼, 그렇게 우직하게, 흔들리지 않고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는 믿음’일 것입니다.
이런 믿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새 해를 소망을 안고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한 해를 마칠 때에는,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이 우리를 지켜주신 주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좋은 선물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셨다고(렘 31,10-14), 모두 함께 고백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1.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비통한 시대의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기원전 627년 요시야 왕 재위 13년부터, 기원전 587년까지, 40년 동안, 점차 쇠락해가는 유다 왕국이 마침내 바빌론 제국에 의해 비참하게 몰락하는 암울한 역사를 살아야 했습니다.
종교개혁과 국가 부흥운동을 추진했던 요시야 왕이 기원전 609년,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의 손에 갑자기 요절하면서부터, 유다는 먼저 이집트 손에, 다음에는 바빌론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바빌론은 유다를 세 차례에 걸쳐 침공했는데(기원전 597년, 588년, 582년), 기원전 587년, 두 번째 침공 말미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은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폐허가 되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자기 아들들이 목전에서 처형당하는 것을 본 후, 자신의 두 눈을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가야 했습니다(렘 39,6-7).
예레미야를 슬픔의 예언자로 만든 것은 계속된 외세의 침략과 자기 조국의 몰락이라는 현실만이 아니었습니다. 40년 동안, 자기 조국의 파멸을 예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역할 수도, 피해갈 수도 없는 주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했던 예언자로서의 운명이 그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고향에서 낯선 이방인, 자기 백성에게 치욕과 모욕을 받고, 자기 나라에서 추방당한 지식인의 전형입니다(렘 20,7-9).
예레미야는 스스로 예언자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시 예언자 학교도 있었고, 직업적 예언자들도 많이 있었지만, 예레미야는 예언자가 되기를 스스로 원했던 인물이 아닙니다. 선택의 주체는 온전히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레미야는 단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결과에 개의치 않고 선포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한 일도 아닌데, 해야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도 아닌데, 해야만 하는, 그것도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파국과 파멸을 말해야 하는 것이 예언자의 숙명입니다(렘 20,14-18).
그러나 예레미야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바빌론의 침공이나, 자신을 죽이겠다는 동족의 위협만이 아닙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데, 정작 나라를 책임지고, 백성을 지켜야 할 유다 왕국의 왕과 고관들, 지식인들인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오히려 국가적 위기를 기회삼아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야 김 왕은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으며, 동족을 고용하고도, 품삯을 주지 않습니다. 그의 눈과 마음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것과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과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만 쏠려 있었습니다.’(렘 22,13-17). 시드기야 왕은 유약하기 짝이 없어 대신들의 서로 다른 전략적 판단에 이리 저리 흔들리기만 합니다. 이집트에 붙을 것인지, 바빌론에 붙을 것인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면서 지조도 없이 흔들렸습니다.’(렘 2,36).
왕과 지도층은 그렇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될 제사장들과 예언자들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힘 있는 자든, 힘 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을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읍니다.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입니다. 제사장들은 심지어 성전 안에서도 악행을 저질렀고, 서기관들은 거짓된 붓으로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 놓았으며(렘 8,8), 예언자들은 만사형통을 선포하면서 거짓말로 예언을 합니다(렘 23,17, 25). 그들은 전쟁과 기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거짓 평화를 약속합니다(렘 14,13). 거짓된 환상과 허황된 점괘와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을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백성에게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은 선포하지 않았고, 백성은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느냐?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 그래서 내가 이제 너희를 버리겠다.’(렘 23,33).
어쩔 수 없다며 현실을 탓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우리를 버리신다는 것이 예레미야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렇게 자기 백성, 유다를 버리셨습니다. 주님의 소유로 선택하셨던 자기 백성을 포기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한 백성을 그들의 원수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렘 12,7). 하나님의 심판은 이민족의 침략과 나라의 멸망에서 현실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신 것은 유다를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다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렘 1,10).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은 사실 심판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회복과 구원은 오직 회개할 때 주어집니다.: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뿌리를 뽑아내거나, 그들을 부수거나 멸망시키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그 민족이 내가 경고한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려고 생각한 재앙을 거둔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서, 각기 자신의 사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너희의 행동과 행실을 고쳐라’(렘 18,7-11).
파국과 파멸에 직면한 한 나라를 회복하고 구원하는 길은 회개에 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들과 어리석은 백성이 사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행동과 행실을 고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과 백성이 잘못을 깨닫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갈 때, 다가온 재앙을 피할 수 있고, 하나님은 다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예언자 예레미야의 증언이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유다 백성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2.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신약성경 시대에 들어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로 확대되었고, 마침내 초대교회에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을 머리로 하여 우주적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되었습니다(엡 1,10).
사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일시키는 것을 모든 것을 다 똑 같게 만들어, 개인적 정체성이나 개별적 특성을 획일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를 그리스도교로 흡수하여 하나의 종교로 통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통일은 ‘다양성 안의 일치’로서, 양극화된 세상을 화해시키고, 불평등한 세상을 공의로운 세상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처럼, 멀리 떨어져 있고, 대립해 있는 두 세계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통일, 화해된 일치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울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할 때 가능하다고 합니다(엡 1,10).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실천의 기준으로 세워야 한다는 말이지요. 내 생각, 내 신념, 내 입장을 중심에 놓으면, 통일은커녕, 대화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생각과 판단과 실천의 중심에 세워야 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요한복음서 저자에 의하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신 말씀’(요 1,14)입니다.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는 참으로 낯선 주장입니다.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말씀(로고스)과 육신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어서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되었고, 물질세계로부터의 자유를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는 주장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세상 안에 계셨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를 맞아들이지도 않았다고 한 것이지요(요 1,10-11).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는데, 그 특권은 ‘혈통, 육정, 사람의 뜻에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에게서 났다’고 합니다(요 1,12-13).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같은 민족이거나 피부색이 같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계급과 계층이 같기 때문도 아니며, 추구하는 이념이나 가치가 같아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자녀가 되는 특권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신분 위에 구축된 특권이라는 신념 위에 오늘의 경제체제는 서 있습니다. 그래서 능력중심의 무한 경쟁이 공정하고, 어느 세상에나 ‘루저’는 있는 법이고,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하게 된 것이지요. 자본주의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명암, 다시 말해 엄청난 생산능력과 부의 축적, 그러나 동시에 빈곤의 확대와 양극화, 생태계 파괴와 기후위기 등 모든 현상이 드러났는데도,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삶을 선물이 아니라, 특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생각은 인간을 겸손하게 합니다. 겸손(humilitas)의 어원은 땅, 흙(humus)입니다. 우리는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는 것이 겸손이라는 말이지요. 자신의 한계를 깨달으며 – 그러나 동시에 영원의 숨결을 느끼면서 – 인간은 무한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무한하고 영원한 하늘을 감지할 때 비로소 우리 안에 겸손이 꽃피어날 수 있는 밭이 일구어지는 것이지요.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은 우리의 존재가 상처받을 수 있는 관계성 안에 있고,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것이 지구가 주는 무상의 선물이며, ‘온생명’의 관대함으로부터 단순히 거저 받은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지난 200년 동안 인류가 스스로의 손으로 이룬 문명이라는 것이 사실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지요. 세상은 우리의 거처이고, 우리를 감싸주며, 길러내고 삶의 토대가 되어 주지만, 우리가 집이라고 느끼는 이 지구 위에서 우리는 단지 손님과 순례자, 잠시 머무는 사람이며 일시적 점유자이고 나그네임을 가르쳐 줍니다.
3. 다행히 백신이 개발되어 접종이 부분적으로나마 시행되고 있습니다. 치료약도 개발 중이라니, 희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감염병과 죽음 앞에서도 평등하지 않습니다. 확진자들이 집단으로 나오는 곳은 가난한 지역이고, 기본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죽는 것보다 먼저 굶어죽게 생겼다’는 한숨도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과 함께 시작된 장기경기침체 때문입니다. 바이러스에 노출되기 쉬운 현장 노동자들, 생계가 위협받기 때문에 감염 위험에도 불구하고 일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감염병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R. H. 채프먼이 말한 것처럼 ‘세상 어디서든 인간이 바라는 것은 똑같습니다. 존재 자체로 존중받고, 하는 일에 합당한 인정을 받는 것이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움에 당면하면 우리는 묻습니다. 이런 시련과 어려움에 하나님의 무슨 숨은 뜻이 있는지, 이런 일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과연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합니다(엡 1,10). 그렇습니다. 하늘이 땅에서 먼 것만큼, 양극화가 확대되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세상, 상생에서 상극으로 치닫는 인간과 자연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화해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계획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자녀로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하나님의 신비한 뜻, 곧 성육신을 깨닫게 하셨습니다(엡 1,8-9). 더 이상 하늘과 땅, 말씀과 육신, 성과 속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말씀 속에서 육신을 보고, 육신 속에서 말씀을 듣는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서 우주를, 죽음에서 생명을 볼 수 있는 사람이지요.
우리는 이것을 ‘연민’(compassio)이라고 합니다. ‘연민’은 글자 그대로, ‘함께’(cum)와 ‘고통을 겪다’(pati)의 합성어로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감지하고 함께 나누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두를 위한 경제’를 추구하는 이탈리아 정치경제학자 루이지노 브루니가 말한 것처럼, ‘연민을 지닌 사람은 세상을 눈여겨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는 자기 곁을 스치는 사람들의 삶을 주의 깊게 바라볼 줄 아는 관심과 내적 침묵으로 충만합니다. 연민을 지닌 사람은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면서, 도시에서 들려오는 끝없는 부르짖음을 듣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들은 다음, 자신이 가던 길의 방향을 바꾸어 –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 이웃을 향해 다가가고, 그의 고통을 돌보아 주며 자발적으로 연민을 실행에 옮기도록 결정합니다. 연민을 가진 사람이 척박한 우리 삶의 터전의 도덕적 품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화해자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일시키는 것, 이것이 코비드-19 시대의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 계획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연민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상속자가 되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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