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공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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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이사야서 61:1-4/ 데살로니가전서 5:16-24/ 요한복음서 1:6-8, 19-28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12-13 |
전주 | |
찬양1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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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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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랑하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교회와 경동교회가 해마다 교환예배를 함께 드리기 시작한지 올해 꼭 20년이 되었습니다.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아니었으면, 마땅히 교환예배를 드렸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올해는 강단교류만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여러분 교회에 오게 되었고, 이 시간에 주낙현 주임신부님은 경동교회에서 설교말씀을 전해주시게 되었습니다. ‘코비드-19’ 백신과 치료약이 빨리 개발되어, 더 이상 목숨을 잃거나 고통 받는 사람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또 ‘코비드-19’의 여파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이들과 교회를 주님께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초대교회가 당면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냐는 문제였지요. 많은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환생한 엘리야(막 9,13), 혹은 세례와 같은 종말론적 행위를 하는 예언자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의 운동에 동의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막 1,9).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이 속했으리라고 추정되는 에세네파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추정도 두 사람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전승하고 있는 누가복음서 저자는 요한을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큰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눅 1,15-17). 아니, 예수님 자신도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눅 7,26),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눅 7,28)고 극찬하셨지요.
세례자 요한의 선포와 물세례, 큰 무리의 추종자들에게 놀란 백성들은 마음 속으로 요한이 ‘그리스도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눅 3,15).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요한은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눅 3,16)라며, 자신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 아니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며, 험한 길을 평탄하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합니다(눅 3,4-5).
신발 끈을 푸는 일은 노예나 하는 일이었던 당시의 관습을 생각하면, 우리는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졌는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요 1,8), ‘영원한 2인자’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들이 한 편으로는, 예수께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요한이 잡힌 후에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으며(막 1,14), 요한처럼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를 베푸셨고(요 3,22;3,26;4,1-2),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처럼 예수님도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고(눅 11,1),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생한 요한이라고 생각할 정도로(눅 9,19), 두 사람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전해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복음서들은 요한의 세례와 회개운동을 ‘율법과 예언의 시대’의 종결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열린 사건으로 선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종말심판과 회개, 율법과 예언자 시대의 마지막 인물이었다면, 예수님은 은혜의 때, ‘질병과 고통과 악령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치유 받고’,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눅 7,21-22) 새로운 은혜의 시대를 연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서들, 특히 요한복음서 저자는 세례자 요한을 예수님에 비해 영원한 2인자로 묘사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눅 7,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을 자신보다 못한 영원한 2인자로 격하시키려는 의도의 말씀이 아닙니다. 또한 요한의 시대를 단절되어야 할 옛 시대로 평가절하하려는 숨은 뜻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요한을 모든 예언자들보다 더 한 자(마 11,9),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신 것은 그가 옛 시대(율법과 예언자 시대)와 새로운 시대(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의 경계선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나갈 시대와 오고 있는 시대의 경계에서, 다시 말해 격동의 전환기에 새 시대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이미’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고, 제자들은 미래에서부터 현재로 침입해오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이미’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기 때문에’(눅 7,22), 비록 가장 작은 자라 할지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장 작은 자’, 눈 멀고, 다리 절고, 나병에 걸리고, 귀먹고, 죽은 사람, 가난한 사람은 지금도 우리 시대 가장 작은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인정받은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게 인정받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이고,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나라라는 말이지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을 때, 그들은 요한이 스스로가 누구인지 말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모세와 같은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다시 요한을 압박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시오?’(요 1,22).
그러자 요한은 자신의 말로 답하지 않고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요 1,23). 자신은 빛도 아니고, 말씀도 아니며, 다만 이 모든 것이 되시는 그분을 증거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의 존재 이유는 그분에 대한 증인의 역할을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인용한 이사야서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부터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광야에 길을 내는 사자의 역할을 언급하는 것입니다(이 40,3-4).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오실 수 있는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곧게 하는 일은 죄를 자백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물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막 1,3-4).
예수님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요한과 마찬가지로 이사야서를 인용하셨습니다.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의 두루마리에서 이런 말씀을 찾아 읽으신 것이지요.: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시고,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눅 4,17-21)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 1절부터 2절까지의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자신의 정체성, 곧 자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선언하신 것인데, 예수님은 이사야서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라는 말씀을 뺐고, 요한이 물세례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준비하게 했다면, 예수님은 성령 세례로 은혜의 해를 준비하게 하신 것이지요. 주님께서 오시는 날, 이 날은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이 위로받는 날이요, 재 대신에 화관을 쓰는 날이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바르고,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되는 날’이니(이 61,3), ‘은혜의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 저자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공관복음서의 재료들을 개작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에 대한 지나친 존경심에 제동을 걸고, 요한을 영원한 2인자로 규정한 것입니다.
오래 전 한국사회에 유행했던 광고 카피가 있었습니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국의 재벌 기업 삼성의 그룹이미지 광고 카피였지요. 달에 첫 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Neil Alden Amstrong, 1930-2012)은 기억하지만, 암스트롱보다 15분 뒤에 발을 디딘 에드윈 올드린(Edwin Buss Aldrin, 1930- )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남극정복자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1872-1928)은 기억하지만, 그보다 한 달 늦게 도착한 로버트 스콧트(Robert Falcon Scott, 1868-1912)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거나, 찰스 린드버그(Charles A. Lindbergh, 1902-1974)보다 2주 늦게 대서양을 횡단한 클라런스 챔벌린(Clarence D. Chamberlin, 1893-1976)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무한경쟁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경고라고도 하겠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1등 지상주의’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을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예수님과 자기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자신을 낮추고, 자신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에 불과하다는 요한! 어찌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등급을 매길 수 있겠습니까? 율법의 시대에서 복음의 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전환기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모두 빛나는 별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1828-1910)는 말했습니다.: ‘별은 그 빛을 자랑하지 않는다. 장미꽃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듯이 꽃은 살아있지만 그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는다.’
참으로 빛나는 것,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빛나고 아름다운데 굳이 자신을 다른 것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2등이, 아니 소위 등수에도 못 들거나, 안 드는 사람들이 사는 법, 그것은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비교하지 않고, 굳이 자랑하지 않고도 스스로 빛나고,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스스로를 구세주도 아니고, 빛도 말씀도 아니며, 단지 그 빛을 증언하러 온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소리는 있으면서도 있지 않고, 있지 않으면서도 있는 것입니다. 있다가도 금방 사라지지만, 들리는 곳에는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분의 소리를 전하는 전령이라는 것이지요. 실로 요한은 그 겸손함 때문에, 옛 시대 안에서 새 시대를 준비했기 때문에,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누군가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물으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현재 직업을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정체는 그의 과거와 현재의 총체이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자기 혹은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자기의 집합, 아니면 되고 싶은 자기를 현재의 자기에 덧붙인 허상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는 분에 의해 규정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눈,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 규정당하는 정체성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지요. 되고 싶은 나의 미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현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오는 주님의 나라에서는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기 때문에’(눅 7,22), 비록 우리 시대의 가장 작은 자라 할지라도, 모두 요한보다 더 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고, 기도하기조차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으며, 감사할 조건이 없을 때에도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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