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넷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조회수   764
설교제목 마리아-하나님의 어머니
성경구절 사무엘기하 7:1-7/ 로마서 16:25-27/ 누가복음서 1:26-38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12-20
전주 오소서 온 인류의 구세주여(J. S. Bach)
찬양1부 기뻐하라(H. H. Woodward) 특송: 안채연 교우, 조에스더 교우, 임건묵 교우, 이민준 교우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지휘자
반주자
후주1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E. S. Barns)
후주2부
성경본문 사무엘기하 7:1-7
주님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원수에게서 다윗 왕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으므로, 왕은 이제 자기의 왕궁에서 살게 되었다. 하루는, 왕이 예언자 나단에게 말하였다. "나는 백향목 왕궁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있습니다." 나단이 왕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슨 일이든지 계획하신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바로 그 날 밤에 주님께서 나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않고, 오직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지냈다. 내가 이스라엘 온 자손과 함께 옮겨 다닌 모든 곳에서,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한 이스라엘 그 어느 지파에게라도, 나에게 백향목 집을 지어 주지 않은 것을 두고 말한 적이 있느냐?'

로마서 16:25-27
하나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선포로 여러분을 능히 튼튼히 세워주십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 두셨던 비밀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비밀이 지금은 예언자들의 글로 환히 공개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그들이 믿고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한 분이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누가복음서 1:26-38
그 뒤로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로 보내시어, 다윗의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한 처녀에게 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라,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궁금히 여겼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는 위대하게 되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그는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 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보아라,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1.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후(삼후 1,1), 다윗은 정통성 주장에 힘이 될 만한 사울의 딸이자 자기 아내였던 미갈을 되찾아 옵니다(삼하 3,13-15). 그 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법궤를 모심으로써(삼하 6,1-12) 예루살렘을 새로운 왕조의 수도이자, 열두 지파 연맹의 중심 성소로서 그 위치를 확립하지요. 다윗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명실상부한 군주로서 자신의 기반을 튼튼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호화로운 왕궁에서 살면서, 법궤를 천막에 안치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다윗은 예언자 나단에게 성전 건축의 뜻을 전합니다. 예루살렘 출신의 예언자 나단은 기꺼이 동의하면서, 다윗의 계획을 적극 지지하지요(삼하 7,3).

그런데 바로 그 날 밤에 하나님은 나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종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않고, 오직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지냈다. 내가 이스라엘 온 자손과 함께 옮겨 다닌 모든 곳에서,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한 이스라엘 그 어느 지파에게라도, 나에게 백향목 집을 지어 주지 않은 것을 두고 말한 적이 있느냐?’(삼하 7,4-7).

 

그렇습니다. 이집트 제국 신전 건축을 위해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셔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하나님은 한 번도 자기가 살 거룩하고 웅대한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법궤의 거주지도 집이 아니라 천막이었고, 제물을 바치는 제단도 흙으로 쌓아야 했습니다(20,24).

 

하나님은 집이 없는 분입니다. 설령 왕이 지어줄 수 있는 웅대한 성전일지라도 그곳에 거주하시는 분이 아니지요. 다윗 왕도 한낱 하나님의 종일뿐입니다.(삼하 7,5). 출애굽 이후, 하나님은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않고, 옮겨 다니며 지내셨습니다(삼하 7,6). 하나님은 한 곳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의 권능과 자유와 무제한성을 제한하려는 모든 인간적이고, 제의적인 시도를 거부하시는 야훼입니다.

 

집이 없으신 하나님, 인간이 그 어디에도 가두어 둘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갈릴리의 이름 없는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아기 예수로 태어나신 것,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비밀, 오랜 세월동안 감추어 두셨으나, 이제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게 된 하나님의 비밀입니다(16,25-26).

 

2. 그러나 성탄절의 놀라운 기적은 처녀가 아기를 낳은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절이면 제기되는 오래된, 그리고 지금도 제기되는 문제의 하나는 동정녀 탄생입니다. 어떻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가 아기를 낳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일종의 과학적 질문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복음서의 처녀탄생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누가복음서 저자처럼,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1,37)는 주장으로 처녀탄생을 변호하려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탄절을 둘러싼 또 다른 신학적 논쟁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고, 만물의 제1원인이신데, 어떻게 어머니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냐는 논쟁은 사실 그리스도론 논쟁 때문에 제기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가 낳은 예수님이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라는 고백이 그 배경에 있는 것이지요. 마리아는 예수를 낳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시니,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이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이 여러 기도문들 가운데 등장한 것은 주후 3세기부터였습니다. 교회는 이 문제를 에베소 공의회(431)에서 의제로 다루기 시작했고, 433년에 안티오키아의 주교 요한이 모든 동방 주교의 이름으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로 부르는 것을 승인한 후,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그 결정을 재확인했습니다. 그 후,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는 동정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예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천주의 성모로 또 구세주의 참 어머니로 인정받으시고 공경을 받으신다.”(교회헌장, 53)고 규정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이해하는 교리 외에도, ‘동정녀 탄생’,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Immacolata Conception), ‘하늘에 오르신 분’(Assumptio)으로 이해하는 네 개의 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4가지 교리를 종합하면, 성모 마리아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모든 신앙인의 어머니’, ‘원죄없는 잉태로 구원사에 동참한 인간’, ‘하나님께 순명한 신앙의 모범이자, ‘승천을 통해 구원의 희망을 전한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교리는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매우 낯설지요. 그래서 일부 보수적 근본주의자들은 가톨릭교회가 마리아를 숭배하니 이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와의 신학적 대화를 해 온 가톨릭 교의학자 심상태 교수(수원 가톨릭대학교)는 마리아 공경의 타당성을 하나님의 어머니로서, 온 인류와 세계를 위한 구원사적 기능을 수행한 데서 찾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 성육신 사건에 어머니로 참여했고, 하나님의 구원 사업에 자의적으로 적극 협력했으며,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順命)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했다. 따라서 교회가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께 바치는 공경인 흠숭지례(欽崇之禮)보다 낮으나 일반 성인들에게 바치는 공경지례(恭敬之禮)보다 한층 높은 상경지례(上敬之禮)로 마리아를 각별히 공경함이 지당하다는 것이지요.

 

세계교회협의회(WCC)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칭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마리아의 완전한 의탁, 마리아의 활동적 신앙의 반응, 그리고 마리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가 교회의 유형과 모범으로 여겨진 것이 그 배경이었다고 해석하면서, 마리아 교리를 긍정적으로 받아드립니다. 특별히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에서 마리아는 믿음의 삶, 고난 속에 있는 희망의 상징으로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3. 그러나 오늘 우리는 교리 속의 마리아가 아니라, 신약성경 자체가 증언하는 마리아는 과연 어떤 인물일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리아 이야기는 마태와 누가복음서에만 등장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 저자는 비록 짧지만 오히려 요셉을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주역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약혼 중에 자기 자식이 아닌 아기를 임신한 마리아를 지키지 않았더라면,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부장제가 지배하고, 율법의 엄격한 준수가 도덕적 행동의 규범이었던 당시 유대사회에서 요셉의 태도는 분명히 이해하기 어렵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물론 천사가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1,20-21)라고 말한 것이, 약혼녀 마리아가 간음한 것은 아닌지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고, 격분했을 요셉의 마음을 돌이켰음을 추정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가만히 파혼하려고 생각한’(1,20) 이 후의 일입니다.

 

우리 말 성경은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영역은 ‘as he considered this’, 독일어는 ‘als er das noch bedachte’로 번역하여, ‘파혼을 고려하다, 숙고하다는 의미로 번역했지만,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의 어근, ‘thymos’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서에 단 한 번 등장하는데, 회당에서 회중이 일어나 예수님을 돌로 치려 할 때, 회중이 품었던 격노를 묘사하는데 사용됩니다(4,28). 신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이 말을 동사로 사용한 사례는 단 한번, 동방에서 온 세 박사들이 아기가 태어난 곳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 베들레헴을 떠난 것을 알고 헤롯이 몹시 노하였다는 말에서 나옵니다(2,16).

 

그렇다면 약혼녀인 마리아가 자신의 아기가 아닌 다른 아기를 임신했다는 것을 들은 요셉이 조용히 앉아 이 문제를 생각하거나, 숙고했다는 것보다, 깊이 상심한 채 분노했다는 것이 헬라어 원문을 오히려 더 정확히 번역하는 것이고, 요셉의 인간적인 모습을 더 잘 포착한 번역이라고 주장하는 케네스 베일리는 정당하다고 하겠습니다.

 

불같이 일어나는 의혹과 상심, 남편으로서 짓밟힌 체면과 분노를 요셉은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마태는 단지 그가 의로운 사람인지라,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고 하였다고 전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의로운 사람은 일반적으로 율법에 순종하고, 규칙을 공평하게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신명기 2223절과 24절이 규정한 율법에 따라, ‘한 남자와 약혼한 처녀를 다른 남자가 성 안에서 만나서 정을 통하였을 경우에, 두 사람을 다 성문 밖으로 끌어다 놓고,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는 율법을 시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를 다르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를 율법이 기대한 윤리를 뛰어넘어,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푸는주님(42,2-3)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에게 는 남편으로서의 자기 권리의 주장이 아니라, 보호받을 권리를 박탈당한 여성, 상처입고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보호를 의미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우유부단하고, 할 말도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하고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습니다. 파혼할 권리도 있었고, 약혼녀를 고소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온 동네의 반대를 물리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을 만큼 담대함과 배포와 용기와 굳센 인격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율법적 규범을 뛰어 넘을 만큼 사랑에서 비롯된 강한 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타인에게는 끝없이 엄격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한 없이 관대한 사람, 그가 의로운 사람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사회적, 법적 권리의 관철이 아니라,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약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약혼녀, 임신한 마리아에 대한 배려는 호적등록 이야기에서도 드러납니다. 일반적으로 중동에서는 공식적이거나 율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남자가 자기 집을 대표합니다. 요셉은 호적 등록을 하러 베들레헴으로 혼자 가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마리아와 함께 간 것은, 나사렛에 홀로 남아있을 마리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설득력 있는 설명입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주변부로 밀려난, 메시아 탄생 이야기의 조역에 머물러 있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사랑과 대담한 용기가 없었다면, 아마도 마리아는 돌아 맞아 처형되었을 것이고, 예수님은 태어나지도 못하셨을 것입니다.

 

4. 그런데 마태복음서 저자가 마리아를 스스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수동적으로만 등장하는 인물로 그린 반면, 누가복음서 저자는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를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주역으로 전면에 등장시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수태 고지를 요셉이 아니라, 그의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합니다. 임신을 못하는 나이 많은 엘리사벳에게 수태고지는 축복이었지만,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는 참으로 위험한 저주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녀의 목숨을 어떻게 위협할 것인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마리아는 다만 순종합니다. 마리아의 목숨을 건 순종, 이로써 마리아는 아브라함을 이어 또 다른 믿음의 조상, 신앙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아들 예수가 지혜와 키가 자라면서 튼튼하고, 총명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는 아들로 성장하는 것을 보는(2,40; 2,52),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자랑스럽고 뿌듯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정결예식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갔을 때 그녀가 만난 시므온의 예언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아들이 하나님 나라 운동에 나섰다가 로마 제국의 정치범으로, 저주받은 자의 한 사람으로 처형당하는 십자가 아래에서 비로소, 마리아는 시므온의 예언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장차 이 아들의 일로 마치 칼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2,34-35).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자녀들 때문에 얻는 기쁨과 자녀들 때문에 겪는 고통의 전형입니다. 첫 아들을 얻은 기쁨도 잠시, 마리아는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고, 자기 아기 때문에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들이 모두 헤롯에 의해 살해당한 것을 들어야했습니다(2,16). 그리고 마침내 자기보다 앞서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지요.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해마다 축하하는 것처럼 그렇게 목가적이고, 행복한 사건이 아닙니다. 평화와 정의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폭력과 살육의 사건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아주 작은 마을에 평범한 여자에게서 갓 태어난 맨손의 발가벗은 아기가, 당대 최고 권력을 가지고 칼을 손에 든 헤롯 대왕과 마주섰고, 헤롯은 그 아기를 두려워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아기의 삶의 마지막도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탄생과 죽음의 사건에서 드러나는 이 잔혹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구속하러 오신 악의 깊이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예언자 시므온의 예언은 어머니 마리아가 자신이 겪은 고난을 통해 반드시 구속받아야 할 악을 드러내는데 동참하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아니,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악을 구속하는 길, 그것은 더 큰 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철저한 자기 비움,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사렛의 비천한 여종의 몸을 빌려 인간이 되신 하나님, 인간의 모든 한계와 죄와 악함을 스스로 짊어지신 하나님, 고통 받는 하나님만이 악을 구속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 맨손의 갓난 아기가 칼을 가진 최고 권력자에게 두려움을 주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역설이자 기적입니다.

 

동정녀가 아기를 낳을 수 있느냐는 질문은 오늘도 제기되는 과학적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 마리아 자신이 수태를 고지한 천사 가브리엘에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던진 질문이고(1,34), 누가복음서 저자는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대답한 질문이기도 합니다(1,37).

 

그렇지요,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지요.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진정한 기적은 불가능의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의 놀라운 기적은 동정녀 탄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흥미롭고 기적적인 수많은 탄생설화들이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의 탄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는 것, 그것도 로마 제국의 공주 혹은 유대 왕의 딸의 몸이 아니라,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의 한 처녀의 몸을 통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교회의 교리로 주장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어머니, 동정녀 탄생,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 하늘에 오르신 분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신앙의 어머니로 고백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신앙의 어머니로 고백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목숨을 건 순종,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어머니이기에 겪는 고통과 고난을 대표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자식을 먼저 가슴에 묻어야 했던 모든 어머니들의 슬픈 대속자입니다. 2014년 세월호 희생자들의 어머니, 2016년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20대 여성의 어머니, 구의역 참사로 목숨을 잃은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어머니, 2018년 태안 화력 산재로 목숨을 잃은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짊어진 어머니, 그녀가 바로 마리아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견뎌야 했던 마리아가 가슴에 묻은 아들 예수가 바로 고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 자신이셨다고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이고, 이 땅에서 고통 받는 모든 어머니의 어머니입니다.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예배일 절기 설교제목 설교자
1301 2025-06-29 성령강림 후 셋째 주일 성령이 인도하시는 삶 임영섭 목사
1300 2025-06-22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임영섭 목사
1299 2025-06-15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서울주교좌성당)    누구를 위한 상속인가? 임영섭 목사
1298 2025-06-15 성령강림 후 첫째 주일(경동교회)    주님과 함께 춤을... 박성순 신부
1297 2025-06-08 성령강림주일    하나님 안에서 임영섭 목사
1296 2025-06-01 부활절 일곱째 주일    하나님의 의 임영섭 목사
1295 2025-05-25 부활절 여섯째 주일    그 빛 가운데로 다닐 것이요 임영섭 목사
1294 2025-05-18 부활절 다섯째 주일    하나님의 집 임영섭 목사
1293 2025-05-11 부활절 넷째 주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 임영섭 목사
1292 2025-05-04 부활절 셋째 주일    한 아이와 하나님 나라 김진 목사
1291 2025-04-27 부활절 둘째 주일    복음의 대가 임영섭 목사
1290 2025-04-20 부활주일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임영섭 목사
1289 2025-04-13 종려주일    장애를 가진 하나님 임영섭 목사
1288 2025-04-06 사순절 다섯째 주일    이웃을 위한 향유 임영섭 목사
1287 2025-03-30 사순절 넷째 주일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 임영섭 목사
1 2 3 4 5 6 7 8 9 10 ... 87
전체 메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