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제목 | 원수 갚기 |
|---|---|
| 성경구절 | 출애굽기 3:7-15/ 로마서 12:9-21/ 마태복음서 16:21-28 |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 예배일 | 2020-08-30 |
| 전주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D. Buxtehude) |
| 찬양1부 | 찬양의 노래(J. S. Bach) 특송: 송승연 집사 |
| 지휘자 |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 찬양2부 | |
| 지휘자 | |
| 반주자 | |
| 후주1부 |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갑니다(W. A. Mozart) |
| 후주2부 | |
| 성경본문 |
출애굽기 3:7-15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로마서 12:9-21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마태복음서 16:21-28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
1. 원수를 갚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특별히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개인이나 집단으로부터 억울하게 고통을 당한 이들에게 원수 갚기는 상처받은 자존심과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는 정당한 일일 뿐만 아니라, 무너진 정의를 다시 세우는 도덕적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대 근동에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lex talionis)이 있었고, 성경에도 원수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의 절규와 복수에 대한 탄원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곧 당한대로, 당한만큼 되갚아 주는 것이 ‘동태복수법의 원칙’입니다. ‘동태복수법’은 가장 오래된 법전의 하나인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3,700년 전)에도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런 동태복수원칙은 고대 이스라엘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출애굽기(21,23-25), 레위기(24,17-21), 신명기 등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법전에 의하면 거짓 증언을 한 증인에게는 그가 이웃을 해치려고 마음먹었던 대로 그 이웃에게 갚아 주어야 했고, ‘목숨에는 목숨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갚아야’했습니다(신 19,18-21).
그러나 공동체 밖에 있는 원수와의 관계에서는 달랐습니다. 성경도 원수에 대한 분노와 보복 의지를 전혀 숨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적대적이었던 부족들을 ‘쳐 죽여야 했고’(민 25,17), ‘보복하고 보응해야 했으며’(신 32,41), ‘원수들은 영원히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해야 했습니다.’(시 9,6). 특히 시편에는 원수에 대한 증오와 저주가 넘치고 있습니다. 시인들은 주님께서 원수를 불구덩이 속에 던지시고, 진노하셔서 그들을 불태우시고, 불이 그들을 삼키게 하시기를(시 21,9), 원수의 자손을 이 땅에서 끊어버리시고, 그들의 자손을 사람들 가운데서 씨를 말리시고 복수해 주실 것을 부르짖습니다(시 7,7; 143,12). 그리고 하나님은 ‘원수들에게 억눌려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사 2,18), ‘비천한 사람의 부르짖음도 들으시고, 온갖 재난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시 34,6)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형이상학적 관념이 아닙니다. 철학자들이 주장한 우주의 법칙이나 제1원인이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원수들에게서 고통 받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 원수들의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아시는 하나님’, 자기 백성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구하여,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출 3,7-8).
원수는 개인적, 사회적 관계에서 사람마다, 원인에 따라 서로 다르지만, 이스라엘의 집단적 원수도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출애굽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의 원수는 이집트 사람들이었지요. 그 후, 가나안 정복 시기에는 가나안 토착 원주민들, 왕정체제 수립 후에는 이웃의 강대국들,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제국 등이었습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 시대, 예수님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원수는 누구였을까요? 한 편으로는 그들을 박해한 유대교 지도자들, 곧 제사장집단과 율법학자들, 바리새파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폭력으로 황제 숭배를 강요한 식민지 종주국인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쓴 시기는 주후 57년 경, 그의 3차 선교여행이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궁극적인 행선지였던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 잠시 로마에 머물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스페인 선교여행 계획을 알리면서(롬 15,24,28), 동시에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제기되었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과 분쟁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선민의식을 가지고,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준수와 할례를 강조하지만(롬 2,17-20), 스스로는 정작 율법을 지키지 않아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는 데 있었습니다(롬 2,24-27).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눈먼 사람들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업신여긴 것이지요(롬 2,19). 로마 교회 안에서는 채식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도 심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채식만 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라고 업신여겼고, 채식주의자들은 무엇이든지 다 먹는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롬 14,1-3).
오늘 우리가 함께 들은 로마서 12장 9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일종의 교리문답형식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을 제시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권면은 로마 교회 안에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과 분열을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합니다(롬 12,10). 그리스도인에게 요청되는 존경은 상호성에 기반한 존경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받고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한테 잘하면 나도 잘해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존경은 무조건적이어야 하고, 먼저 다가가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어야 합니다.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롬 12,11)라고 권면합니다.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열심을 내어 주저하지 말고, 성령 안에서 불타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주저함은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교회’와 같은 태도입니다. 주님은 이런 교회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계 3,16).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라’고 권면합니다(롬 12,12). 여기서 소망은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 보다 나은 처지에 대한 기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소망은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소망은 미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러기에 소망은 기쁨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소망은 아직 보이지 않고, 아직 우리 손에 가지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즐거움, 곧 기쁨은 현재, 가지고 있음, 기다리지 않음, 이미 가짐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는 것’은 아직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비록 손에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바로 그 소망이기 때문입니다(롬 5,5).
그 외에도 바울은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대접하기를 힘쓰며’(롬 12,13),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롬 12,15),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합니다(롬 12,16).
공동체 안에서 실천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이자 실천되어야 할 덕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바울의 권면가운데, 원수와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롬 12,14),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롬 12,17).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롬 12,19),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롬 12,21)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저주하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화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요? 악에는 악으로 갚는 것이 동태복수법처럼,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고, 정의를 세우는 길이 아닐까요?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는 것은 비겁한 자기변명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나약하고 용기가 없어서 원수를 스스로 갚지 못하는 약한 자의 알리바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원수가 살아 있는 동안에 보복을 당해야 속이 시원할텐데, 심판을 죽음 이후로 유예하는 것은 악인들에게 교훈이 되지도 않고, 또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지만, 악은 너무 강한데,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얻을 수 있단 말일까요? 그뿐입니까? 바울은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원수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합니다(롬 12,20). 주리고 목말라 하는 원수를 보는 것이야말로 통쾌한 일인데,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라니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나마 조금 위로가 되는 것은 이 말씀 뒤에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롬 12,20)는 말씀이 덧붙여진 것입니다.
3.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이 권면,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롬 12,14)라는 말은,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눅 6,27-28; 마 5,43-44)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연상시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원수에 대한 권면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악에 대한 증오는 있을 수 있지만, 원수에 대한 저주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원수 사랑이 원수의 종말이 아니라, 증오의 종말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원수 사랑은 원수의 박해를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칫 비겁하고 용기 없는 자신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런 실천이 투쟁 없이 폭력적인 이 세상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행여 그런 태도가 원수의 마음에 무슨 감동을 주고, 원수를 부끄럽게 만들어(잠언 25,21-22절), 원수의 행동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을 기대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대, 지나치게 순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모르거나, 인간이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너무 과신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사랑이 증오를 극복하리라는, 비폭력적 행위가 폭력을 변화시키는데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이 십자가 죽음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모든 방법이 폐쇄된 곳에서 박해받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고,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마침내 악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한 가지 오해를 해서는 안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롬 12,20)는 바울의 권면은 자칫, 원수 사랑이 지옥불의 심판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겠지만, 그러나 이 말씀은 잠언 25장 21절과 22절의 인용입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 이렇게 하는 것은, 그의 낯을 뜨겁게 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너에게 상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최후심판과 지옥에서 불에 타는 형벌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원수의 ‘낯을 뜨겁게 하는 것’, 곧 원수를 부끄럽게 하는 것과 관계된 것입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곤궁함입니다. 배고프고 목마름에 원수와 친구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원수라고 할지라도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이 침해되는 것을 막고,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켜주라는 것이지요. 이런 태도가 원수를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상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은 우리의 선행을 통해 원수들이 변화될 것을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 5,45)는 것을 다만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악인이건 선인이건, 원수건 친구건, 모두 다 구원을 얻고 지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시고(딤전 2,4),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눅 20,38). 설령 그가 하나님을 모르고 있거나, 믿지 않고 있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언제든지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듯이, 지금의 원수가 언제든지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에 우리가 모두 열려 있다는 것을 다만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악은 악으로 갚는 것이 통쾌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라’고 권면합니다(롬 12,17).
왜냐하면,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또 다른 악을 불러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개인적,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가 증오하는 바로 그것이 됩니다. 무언가, 누구인가를 증오한다는 행위 자체가 그 대상을 우리들 자신에게 끌어오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속설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 이것은 단지 속설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바울은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합니다(롬 12,21).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야말로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악이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데서 악은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을 이기는 것은 악이 아니라 선입니다. 거짓 없는 사랑만이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이지요. 거짓 없는 사랑은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는 것’(롬 12,9)입니다. 악한 것을 덮어주거나, 외면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악을 싫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랑만이 선을 붙들 힘을 가지고 있고, 오직 사랑만이 선행을 통하여 악을 극복합니다. 그러므로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신 32,35)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우리는 다만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롬 12,21),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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