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일곱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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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영생'은 무엇인가?
성경구절 사도행전 1:6-11/ 베드로전서 4:12-14, 5:6-11/ 요한복음서 17:1-3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05-24
전주 너희 영혼을 아름답게 하여라(J. S. Bach)
찬양1부 그 옛날 주가 걸으신(Geoffrey O'Hara) 특송: 유희업 집사, 조에스더 교우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H. D. Clarke) 특송: 김준홍 교우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하늘나라 향하여 가리라(Leoni)
후주2부 하늘나라 향하여 가리라(Leoni)
성경본문 사도행전 1:6-11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그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올라가시니, 구름에 싸여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예수께서 떠나가실 때에, 그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너희가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전서 4:12-14, 5:6-11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권세가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7:1-3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1.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하신 마지막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기도를 시작하십니다(17,1).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기도하는 것은 유대인이 일반적으로 기도하는 태도로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께만 마음을 올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문화전통에서 볼 때, 대단히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한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아버지를 신성한 언어인 히브리어 아브가 아니라, 세속적인 일상어인 아람어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할 때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교 전통과 달리, 예수님께서 세속어인 아람어, ‘아빠로 하나님을 부르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때가 왔다.’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신의 삶의 목적,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10,10)는 목적이 이루어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목적’(17,2)이 그의 죽음과 함께 성취될 때가 왔다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7장은 전통적으로 대제사장적 기도로 명명되었는데, 그것은 이 기도가 중재의 기도이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는 대제사장이라고 제24대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키릴로스(375년경-444)5세기에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세 단락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들이신 예수님과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간구, 곧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 혹은 친교의 기도입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 세 번째는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기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고기도하십니다. 요한이 말하는 영광’(doxa)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구약성경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능하신 행동으로 자신의 위대함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내실 때 드러납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이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표적들, 사역을 통해서, 그리고 마침내 부활 후에도 영광이 드러났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표적은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매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은 우리에게 무언가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 연예인들이 상을 받을 때 흔히 공개적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른 것이지요. 요한은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다’(17,4)고 증언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는 것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그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17,6).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요한의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이름은 나는 .... 이다’(에고 에이미/ego eimi)입니다. ‘에고 에이미는 단순히 나다혹은 내가 그이다와 같은 일반적인 문장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모세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기 위해 떠나기 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이름,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3,14)는 말씀에 나타난 신성 사자’(tetragrammaton, YHWH)의 헬라어 번역입니다.

야훼’, 나는 나다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름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야훼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현존에 대한 진술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강조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예수님에게 주셨기 때문에(17,11), 예수님은 그의 생애 동안에 일곱 번 비유적으로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15,1)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요한은 에고 에이미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님의 이름과 결합시킴으로써,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이시며(10,30), 아버지의 생명을 주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5,21)을 표현한 것이지요.

 

2. 아버지와 하나이신 아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는 교회일치를 위한 성경적 전거로 오랫동안 인용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분열된 교회의 일치는 성취되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이미 주어진 일치라는 것이 요한의 증언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일치는 교회들의 기구적 통합이나, 교리적, 신학적 합의, 혹은 공동의 과제와 활동을 중심으로 한 연대가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는 일치는 요한복음서의 일관된 주제이기도 한, 인간과 신성의 합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합일의 신비한 체험을 요한은 영생이라고 표현했고, 이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17,3).

 

요한은 하나님을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표현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이교신들이나 우상들과 구별하기 위해 적용되었으나, 요한은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곧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알려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고백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서 요한이 영지주의와 다른 점이 드러납니다. 영지주의에게 영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지식은 영적인 지식에 있었지만, 요한에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지식이, 죄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합니다. 요한에게 영생은 이 땅에서 주어집니다. 이것은 실제로 역사와 분리되어 있고, 이 세상과 육체를 떠남으로써 생명을 얻게 된다고 믿는 영지주의와 요한의 차이점입니다.

물론 요한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객관적 지식이나 깨달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안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친밀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4,1)고 우리말로 번역되었으나, 히브리어 원문은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를 알았더니’(erkennen)입니다. 히브리적 사유에 의하면 안다는 것은 가장 깊은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며,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사랑의 교제를 포함합니다.

 

제자들을 위한 두 번째 기도는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아버지의 말씀을 받은 제자들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17,14).

 

베드로전서 저자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은 것은 그들이 속한 세상적 가치와 질서에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으니,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들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벧전 4, 13-14).

 

그런데 예수님은 박해받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17,15). 인간이라면 누구도 세상을 벗어나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세상을 초월해서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처한 현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악한 자는 악마입니다.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악마에 맞서 그리스도인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 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하나님께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베드로전서 저자는 권면합니다(벧전 5,7-10).

 

믿음이란 고통과 위험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믿음은 고통과 위험이 계속되더라도 무너지지 않은 채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외부의 어떤 세력도 우리를 끝내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궁극적인 실재, 궁극적인 영원함, 곧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 다시 말해 미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들 미래의 제자들도 하나가 되어서,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게 됨으로써,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고(17,21),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17,23).

여기서 말하는 미래의 제자들은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써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아니, 인간을 분리하고 차별하는 모든 장벽이 무너진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두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한 울타리 안에 모인 양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물었을 때, 누가는 제자들의 임박한 종말기대와 국가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바가 아니다.’(1,7). 그러나 제자들은 성령을 받게 될 것이고, 그들은 땅 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1,8). 이 말씀은 명령이자 동시에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수행해야 할 임무를 부여하는데, 그것은 곧 세계 선교였습니다. 세계선교는 구원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입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라는 말은 단지 지리적 의미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제자들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아들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기 위함입니다. 교회의 일치는 폐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공동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세상으로 들어가는데 있지, 세상과 분리되어 홀로 자족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존재이유는 세상을 구원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서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세상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새로운 종교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새로운 신비한 합일을 향한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요한은 영생을 지상에서 죽지 않는 것, 혹은 죽음 이후에 누릴 영적인 삶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언제나 영원한 현재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11,25-26).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요한의 해석은, 생명의 본질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때 발견된다는 것, 사랑은 사랑의 행위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써,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영생에 이르는 길임을 보여주셨고, 또 제자들도 그 길을 걸음으로써 영생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고, 믿게 해야 할 과제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도 죽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죽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서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삶과 죽음은 우리가 이해하는 육체적 죽음과 육체적 불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예수님 안에서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삶을 찾은 것을 의미합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이지요. ‘조문도석가사의’(朝聞道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공자가 논어의 이인편에서 한 말처럼, 죽음과 바꿔도 후회가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삶이 영생, 영원한 현재입니다. 영생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와 하나가 된 신비한 합일의 삶,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신 삶을 의미합니다. 지상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 영생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잇대어 사는 삶이 영생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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