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이생과 영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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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아모스서 7:10-17/ 골로새서 1:7-14/ 누가복음서 10:25-37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19-07-14 |
전주 | 주님께 기도 드리나이다(F. von Hiller) |
찬양1부 | 복의 근원 강림하사(Carrie B. Adams)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Howard Goodall) |
지휘자 | 이용식 장로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주 하나님, 그 거룩하신 이름 늘 높이네(Leoni) |
후주2부 | 주 하나님, 그 거룩하신 이름 늘 높이네(Leoni) |
성경본문 |
아모스서 7:10-17 베델의 아마샤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에게 사람을 보내서 알렸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나라 한가운데서 임금님께 대한 반란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이 나라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아모스는 '여로보암은 칼에 찔려 죽고, 이스라엘 백성은 틀림없이 사로잡혀서, 그 살던 땅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말하였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마시오. 이 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양 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하셨소. 이제 그대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오. 그대는 나더러 '이스라엘을 치는 예언을 하지 말고, 이삭의 집을 치는 설교를 하지 말라'고 말하였소.그대가 바로 그런 말을 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네 아내는 이 도성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은 칼에 찔려 죽고, 네 땅은 남들이 측량하여 나누어 차지하고, 너는 사로잡혀 간 그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꼼짝없이 사로잡혀 제가 살던 땅에서 떠날 것이다.'" 골로새서 1:7-14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와 함께 종이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해서 일하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그 날부터, 우리도 여러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받을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여러분이 빛 속에서 감사를 드리게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서 10:25-37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
1.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너무 잘 알려져서 새로운 해석이 있을 수 없을 만큼 유명한 예수님의 비유이지요. 지금까지 알려진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분리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또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둘째,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오래된 역사적, 집단적 적대관계를 고려하면, 사마리아인이 유대인과 접촉하는 것은 물론,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접촉하는 것이 불경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 이 비유는 하나님 사랑과 결합된 이웃사랑은 모든 형태의 역사적, 집단적 혹은 개인적 적대관계의 장벽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의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여관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면서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는 깊은 배려처럼, 이웃 사랑은 일회적이거나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총체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넷째, 1970년대 강원용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중요한 것은 개인적 차원의 시혜적 자선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해결이라는 것이지요. 개인적 차원에서의 사랑 행위는 밑 빠진 독에 물 붙는 격이기 때문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에 이르는 길목에 경찰을 배치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제도적 장치가 모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조악의 극복에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더 적합하다는 논리입니다.
다섯째, 율법학자가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에 대해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너는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되물으신 것은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을 대상화하거나 추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학자는 지금까지 유대의 한 율법교사로서 실천해온 자비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신학적 논쟁으로 만듬으로써 사랑을 추상화하거나 관념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제를 허공 속에서 끌어내려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에 있는 어느 위험한 계곡에서 강도를 만나 반죽음이 된 ‘어떤 사람’ 위에 갖다 놓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들이 사랑해야 할 이웃은 유대인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되물음으로써 유대인에게만 제한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유대교적 이웃사랑의 한계를 철폐하신 것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아야 할 이웃은 삶의 길목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쓰러져 있는 모든 사람입니다. 그는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흑인도 백인도 황인종도 아니며 부자도 가난한 자도 아닙니다. 그는 여리고로 가는 길, 곧 지극히 평범한 삶의 길 위에서 상처받고 쓰러져 있는 모든 사람인 것입니다.
여섯째,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일어나서 질문한 율법학자는 교육받은, 자격을 갖춘 학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교육받고 자격을 갖춘 전문적인 율법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면서 비웃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율법학자의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 곧 영생,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전형적인 유대교적 답변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신 6,5).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레 19,18)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종교적 질문을 했는데, 예수님은 단지 그렇게 하면 살 것이라고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속적으로 답변하신 것입니다. 이생과 영생은 구별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이생에서 사랑의 실천 없이 죽음 이후의 영생에 이르는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대충 이런 다양한 시각과 강조점에서 이 비유는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강도들에게 맞고 옷을 빼앗겨 거의 죽게 된 채 버려진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 사람’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강도만나 죽게 된 사람을 피하여 지나간 것은 특별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남을 돕지 않거나, 강도만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기 때문이거나(복음서에 따르면 그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자기도 강도 만날 것이 두렵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들이 피하여 지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체를 만지는 것은 부정을 탄다고 규정한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말할 것도 없고, 사제보다 약간 신분이 낮지만 특권층에 속하는 종교 제사직 관리였던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강도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간 것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2. 2015년에 상영된, 폴 앤드류 윌리엄스 감독이 제작한 영화, ‘아이히만 쇼’가 있습니다. 600만 명의 유대인 추방과 학살을 주도한 나치 전범 칼 아돌프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 1906-1962), 전후 신분을 세탁하고 아르헨티나로 도주했으나, 15년 동안의 도피생활 끝에 이스라엘 모사드에 의해 1960년에 체포, 1961년 4월 11일부터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세기의 재판을 다큐멘트와 영화를 섞어 만든 영화이지요. 4개월 동안 이어진 재판과정을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중개하고 기록에 남긴 인물은 감독 레오 허위츠, 프로듀서 밀튼 프루트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나치 독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주면서,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왜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그 원인을 사회구조와 인간성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세기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살아남은 목격자들의 참혹한 증언이 이어지고, 검사들의 칼끝 같은 질문이 제기되어도, 놀랍게도 아이히만의 표정에는 털끝만한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 아이히만은 미동도 없이 대답합니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권한이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하나의 인간이며 관리였을 뿐입니다.’ 만일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일이 있다면, ‘월급을 받으면서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 때’였을 것이라고 답변합니다.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입니다. 그는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거라는 점을 완전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란 수백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상당한 열정과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으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 추방하고 학살한 아이히만이 ‘살인에 대한 위험하고 탐욕스러운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이며, ‘도착적이고 가학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 특별히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나 열광적인 반유대주의 세뇌교육을 받은 사람, 아니면 흉악한 얼굴을 한 뿔 달린 악마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는 여느 독일의 평범한 중년의 아저씨와 똑 같았습니다.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명령한 아이히만,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독일 어느 도시나 농촌에서 만날 수 있는 착하고 근면한 동네 아저씨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기의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여 기록한 한 유대인 여성 정치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녀는 피고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해에 태어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입니다. 그녀가 본 아이히만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중년의 남성이었습니다. 그렇게 평범한 그를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증언입니다.
아이히만은 검사의 심문에서 유대 민족에 대해 자행된 그의 범죄의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후회도, 어떠한 가책의 감정도 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읽었습니다. ‘악의 평범성’, 이것은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징은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아이히만의 경우이지요.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도 악마적인 행위를 한 사람들이 결코 악마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악마는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악은 악마적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에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데서 온다’고 한나 아렌트는 지적합니다. 이런 무사유가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에서 배운 교훈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이 검사의 심문과 재판 과정에서 동일한 선전문구와 상투어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반복한 것은 ‘그가 말하는 데 무능했기 때문이고(inability to speak), 그런 말하는 데 있어서의 무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있어서의 무능함(inability to think),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있어서의 무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이히만과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는 그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다른 사람들의 현존을 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reality as such)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현실 자체를 보지 못하게 막는 튼튼한 벽, 아이히만에게 그것은 말하기의 무능, 생각의 무능, 행동의 무능,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 없음, 그리고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실천하는 맹목적인 근면함이었습니다. 무식하고 부지런한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파괴적인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이히만의 경우인 것이지요.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말했습니다: ‘아이히만은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3. 이제, 다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돌아오겠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아이히만처럼 말을 못하는 사람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도, 게으른 사람도, 양심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아이히만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공통된 것은 그들이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는 것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당당하게 지나쳐 갈 수 있었습니다. 율법 때문이지요. 그들은 죽은 사람을 만지지 말아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상처를 입고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돕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율법교사는 오직 같은 유대인 이웃만을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실천해온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은 이웃이 누구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은 다만 이웃의 현실적 필요에 응하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에 따라 사랑의 행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유대인이면 하고 이방인이면 안 해도 되는 것이 하나님 사랑과 결합된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은 율법교사에게 예수님은 ‘가서 너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웃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누구든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되기가 진정한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영생은 이생에서의 사랑의 실천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 시대에 강도만난 사람들의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과 고난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강도만난 사람들의 현실을 본 그리스도인은 예언자 아모스처럼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설령 자기 나라를 치고, 자기 백성을 치는 예언이고 설교일지라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아모스 7,16).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언제나 자기 나라에서 반역자였고, 자기 백성 안에서 이방인이었습니다. 왕의 신변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 성소 베델의 제사장 아마샤는 한편으로는 여로보암 왕에게 아모스가 반역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고발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아모스를 회유하면서 유다 땅으로 피해서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라고 합니다(아모스서 7,12). 국가 성소 베델의 제사장인 아마샤는 왕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왕과 지도자들만 보였지 백성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직업적 예언자도,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었습니다. 들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였습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그는 백성의 현실을 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주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소명을 받은 아모스는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어떠한 세속적 권력과 힘도 하나님의 행동을 저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언자 아모스의 운명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가 없습니다. 베델에서 추방당함으로써 그의 공식적인 활동은 강압적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언자로서의 자기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언은 그 후 50년도 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습니다. 지도층 인사들의 사치와 부정부패(아모스서 6,4-8), 의로운 사람을 학대하고 뇌물을 받고 법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여 무너진 사법정의(아모스서 5,12), 폭력과 강탈로 탈취한 재물을 요새 안에 쌓아둔 지배층의 타락으로(아모스서 2,6-8), 마침내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한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국가 성소 베델의 제사장인 아마샤를 비롯한 지도층이 강도만난 자기 나라의 현실, 고통 받는 백성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이 망한 것입니다. ‘악의 평범성’은 충격적인 악이 뜻밖에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시스템 안에 갇혀 무엇이 악인지를 보지 못하는 곳, 악한 시스템이 너무 강력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곳에서도, 우리는 ‘악의 평범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악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이 집단적으로 무디어 가는 곳, 그 곳에 ‘악의 평범성’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 두렵고 떨리는 것은 우리도 언제든지 아이히만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골로새서 1,9). 그리하여 헛된 속임수나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골로새서 2,8). 이것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는 길이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골로새서 1,10).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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