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일곱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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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선교-세상이 믿고, 알게 하기
성경구절 사도행전 16:25-34/ 요한계시록 22:12-14, 16-17, 20-21/ 요한복음서 17:20-26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6-02
전주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셨다(D. Buxtehude)
찬양1부 영광 영원히(Sergei Rachmaninoff)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복음 전하는 사자들 아름답다(F. Mendelssohn)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구원의 소식을 널리 전하라(arr. D. Wyrtzen)
후주2부 구원의 소식을 널리 전하라(arr. D. Wyrtzen)
성경본문 사도행전 16:25-34
한밤쯤 되어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죄수들이 듣고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의 터전이 흔들렸다. 그리고 곧 문이 모두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갑이며 차꼬가 풀렸다. 간수가 잠에서 깨어서,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달아난 줄로 알고, 검을 빼어서 자결하려고 하였다. 그 때에 바울이 큰소리로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 하고 외쳤다. 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해서, 들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물었다.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수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그 밤 그 시각에, 간수는 그들을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 주었다. 그리고 그와 온 가족이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다. 간수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

요한계시록 22:12-14, 16-17, 20-21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시작이며 끝이다. 생명 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려고, 그리고 성문으로 해서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은 복이 있다.
나 예수는 나의 천사를 너희에게 보내어, 교회들에 주는 이 모든 증언을 전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그의 자손이요, 빛나는 샛별이다."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도 또한 "오십시오!" 하고 외치십시오. 목이 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받으십시오.
이 모든 계시를 증언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기를 빕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7:20-26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아버지를 알았으며,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1. ‘선교’(宣敎, Mission), ‘종교를 전하여 널리 퍼뜨리는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이 단어는 사실 성경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와 비슷한 개념들을 찾는다면, ‘부르심과 보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의 땅으로 보내신 사건에서부터, 사사들과 왕들과 예언자들을 부르시고 자기 백성에게 보내신 일이 그것이지요. 초대교회도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고 믿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도 자기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과제와 함께 약속의 말씀을 하셨다고 증언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28,18-20).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주님의 명령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으로 이해된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에 있는 이른바 대위임령은 오랫동안 서구 교회의 선교이해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말씀은 유럽의 역사에서 식민주의와 결합됨으로써, 서구 교회의 선교가 유럽 우월주의, 인종주의와 동일시되는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요.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런 부정적인 영향과 결과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에도,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으며’(딤후 2,9),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로워,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내는’(4,12), 힘찬 해방의 복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 모든 형태의 양극화와 차별이 극복되고, 진정한 자유와 평등, 사랑과 정의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역사적 경험들이 그 증거입니다.

 

 

2. 그런데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공관복음서와는 사뭇 다른 선교 이해를 듣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께서 배반당하시고 잡히시기 전에 하신 마지막 기도입니다. 이른바 대사제의 기도’(the high priestly prayer)로 알려진 이 기도는 세 단락으로 이어지는데, 첫 번째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두 번째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 세 번째는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앞으로 역사 속에서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근본은 제자들, 혹은 성도들 간의 일치, 하나 됨을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17,21).

 

여기서 일치’, ‘하나 됨교회의 조직적 통합이나, ‘그리스도인의 생각의 획일화’, 혹은 개념적, 교리적 통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분명하게 인성과 신성의 합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유대 크리스천 신비주의자로 추정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와 아들인 자기가 하나이듯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7,11; 7,21-23).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인은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어야 할까요? 그것은 세상의 미움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미워하는 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17,14).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 세상 밖에서, 세상을 초월하여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일찍 죽거나, 수도원에 들어가 혼자 사는 것이 가장 나은 길이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그렇게 살라고 제자들에게 요청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비록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지요.

 

결코 쉬운 삶이 아닙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과 다르게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면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을 지키기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는 제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17,17), 그리고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게 해달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시라고 기도하셨습니다(17,15).

 

물론 세상 안에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필연적으로 세상의 미움을 불러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권력이 된 종교는 오히려 출세, 기득권 유지의 방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것 자체, 소망교회 교인이라는 것 자체가 출세의 방편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세상과 충돌할 때, 세상으로부터의 박해와 미움을 피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기도를 통해 설명하려고 하는 믿음은 세상 밖으로 제자들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위험이 따를지라도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주어집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우리가 거룩해지는 그 때, 세상의 어떤 힘도 우리를 끝내 파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궁극적인 실재, 궁극적인 영원함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밖, 우주의 그 어딘가에 계신 실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생명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새로운 종교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존재, 하나님과의 신비한 합일을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되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냈다는 것을 세상이 믿고’,(17,21),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제자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은 세상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17,23).

 

선교란 무엇인가요? 선교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존재의 변화이지요. 선교를 그리스도인의 행동’(Doing)이나 다양한 활동으로(activity) 이해하는 전통에서 볼 때, 선교를 그리스도인의 존재’(Being)로 보는 요한의 선교이해는 낯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5,13)고 말씀하셨습니다.

짠맛과 소금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짠맛은 소금의 한 기능이나 역할이 아니라, 소금의 존재 자체입니다. 짠맛을 잃으면 그것은 이미 소금이 아니지요. 정체성을 잃으면 쓸모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쓸모(사용가치)가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이 쓸모(사용가치)를 규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사람들이 짓밟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된 것은, ‘메시지가 문제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메신저가 문제여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도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7,17-18).

 

존재가 행동을 결정하지, 행동이 존재를 모두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도 얼마든지 착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연쇄 살인범도 집 안에서는 착한 남편, 훌륭한 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독재자와 사기꾼도 교회 다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선교,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냈다는 것을 세상이 알고 믿게 하는 길은, 선교적 활동 프로그램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적 변화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활동들이 아니라, 우리 존재를 보고,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믿게 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안에 있기’, ‘하나님과 하나 되기는 우리가 무언가 신적인 존재,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자 온 생명이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몸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몸의 지체로서 다른 모든 피조물과 상보적 관계망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들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해산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8,22). 죽음을 슬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슬퍼하고, 생명의 충만함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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