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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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사도행전 5:27-32/ 요한계시록 1:4-8/ 요한복음서 20:19-23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19-04-28 |
전주 | 내 영이 주를 찬양하나이다(F. Couperin) |
찬양1부 | 내 주님 어디 계시온지(J. Stainer)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부활절 찬송(R. Shephard)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하나님 하신 일, 모두 선하시다(F. Liszt) |
후주2부 | 즐겁도다 이 날(L. Smith) |
성경본문 |
사도행전 5:27-32 그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공의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신문하였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소.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여러분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분을 높이시어 자기 오른쪽에 앉히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4-8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서 20:19-23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1. 요한계시록은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난해하고,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이 수많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고, 복음서와 바울신학에 대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신비적 열광주의자들과 종말론자들, 분파주의자들이 즐겨 활용한 책이었다는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한계시록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도 결코 작지 않습니다.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중요한 인물이자,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삼일독립선언에 참여한 길선주 목사(1869-1935)는 요한계시록을 1만 번 읽었다고 합니다. 삼일운동으로 투옥되었을 때도 그는 낮에는 성경을 읽고 밤에는 요한계시록을 암송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로 말세론과 재림신앙으로 이루어진 그의 부흥회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지만, 신앙의 내면화, 비정치화에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심판과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종말론적 신앙은 마치 양면에 날이 선 칼처럼,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묵시’, ‘아포칼륍시스’는 ‘덮여 있는 것을 제거하는 것’, ‘비밀을 폭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의를 미리 알려주는 미래의 책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저자와 독자가 처한 역사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현재의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4장부터 11장까지, 12장부터 22장까지, 그리고 후대에 덧붙여진 1장부터 3장까지, 그리고 22장 16절 상반절과 20절 하반절, 21절이 그것입니다.
4장부터 11장까지는 구전 형태로 세례자 요한 시대나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에 유포되었던 유대 묵시문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장부터 11장까지가 포괄하는 시기는 기근, 전염병, 지진 등의 재앙만이 아니라, 내란이 일어난 때였습니다. 이 내란은 주후 41년부터 54년에 로마 영토에서 발생했던 전쟁, 더 중요한 69년에 로마에 세 명의 황제가 등극했다가 쫓겨나고 마침내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기원후 9-79)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사건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사건을 어린 양의 펼쳐진 두루마리(재앙), 붉은 말을 탄 자(내란을 의미), 검은 말을 탄 자(기근을 의미), 청황색 말을 탄 자(전쟁과 기근으로 이어지는 재앙 혹은 죽음을 의미), 독수리(로마 제국의 군대) 등의 상징을 이용하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통치기의 재앙과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지요.
12장부터 22장까지는 유대 독립전쟁이 일어나려던 때인 주후 60년대 중반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때는 많은 사람들이 피난처를 찾기 위해 유대 광야로 도망했던 시기입니다. 정신 이상자였던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 재위 기원후 41-54)가 자신의 조각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라고 명령했던 시기입니다. 황제 혹은 우상 숭배의 위협은 두 짐승의 환상에 반영되어 있는데,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로마 황제이고(계 13,1),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배교한 지역의 사제와 지도자(계 13,11)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흰 말을 탄 자가 이방 나라를 파괴하고, 천 년 동안의 통치와 새 예루살렘이 계시됩니다. 이것은 주후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패망한 후, 얌니아에서 번성했던 정통 유대교가 새로운 형태로 이루어낸 성과를 반영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서문과 마지막 부분, 곧 1장부터 3장까지와 22장 16절, 20절과 21절은 이보다 후기에 기록된, 정확한 기록 연대를 설정하기는 어려운, 후기 그리스도교의 첨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누구일까요?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계 1,4). 저자의 이름은 ‘요한’, 후에 ‘요한계시록’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 책은 사실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라는 것이지요. 그 외에 저자가 자신에 대하여 언급한 말에 의하면,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요, 예수 안에서 환난과 그 나라와 인내에 함께 참여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언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게 되었다’(계 1,9)고 합니다.
밧모 섬은 길이가 약 16km, 너비가 약 8km의 화산언덕으로 이루어진 바위섬입니다. 밀레도의 남서쪽 60km 정도에 떨어진 이카리안 해스포라데스 제도에 있습니다. 당시 밧모 섬은 로마인들에 의해 정치범 유배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언자 요한이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한 것은 그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무슨 목적으로 기록되었을까요? 초대 교회 교부였던 이레네우스(Irenaeus, 기원후 130-202)는 요한계시록이 도미티아누스(기원후 51-96)황제가 즉위하던 시기(기원후 81-96년)에 기록되었다고 보도합니다. 박해는 이미 지나갔지만,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 앞에는 새로운 고통과 로마당국과의 첨예한 갈등이 놓여있었습니다. 그것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황제들 가운데 첫 번째로 자신을 ‘주님이자 신’(dominus et deus)으로 숭배할 것을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황제숭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했고, 이 때 예언자 요한은 심하게 억압받고 있는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위로와 경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계시록을 작성한 것이지요.
예언자 요한은 역경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소아시아의 교회들을 향해 로마 제국의 황제가 절대 권력을 가진 폭력적인 통치자이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이 이 시대와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진정한 통치자이심을 확증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두려움 없이 그들의 신앙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증언’은 법적 용어입니다. 진리에 대한 공적인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필연적으로 박해를 불러옵니다. 위임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하며 심지어는 죽임을 당해야 했던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자들인 증인들도 그들의 증언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통치자로 나타나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기 때문에, 박해와 억압 가운데서 엄습해 오는 우상(힘)숭배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신앙 가운데 굳게 서서 충실히 그 날이 도래하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입니다.
2.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이 표상하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곧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계 1,4; 1,8; 4,8; 11,17; 16,5)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언자 요한은 ‘전에도 계셨던 하나님’으로서, 창조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계약을 맺어 구원하신 과거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은 ‘지금도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박해받고 고난 받는 자녀들과 함께 계시는 현재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마지막 표상이, ‘미래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이런 표상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숭고함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지만, 미래에도 그러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고자 하시는 대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렇게 있으라고 하는 대로, 우리가 그렇게 있기를 바라는 대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각과 기대, 이성을 뛰어 넘어 스스로 계시는 분,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세 개의 서술어와 함께 언급됩니다. 이 세 개의 서술어는 ‘죽다 – 부활하시다 – 들리우시다’입니다. 주님은 진리를 증언하는 증인이었으며(요 18,37), 십자가에 죽기까지 신실하신 분이셨습니다(계 2,13). 주님의 부활은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의 시작을 의미합니다(고전 15,20; 골 1,18). 그래서 그는 죽은 사람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끝으로 주님은 ‘들리우신 자’로서 땅 위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가 되십니다. 그는 모든 힘과 권세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마 28,19; 빌 2,11; 엡 1,20).
그렇습니다. 예언자 요한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셨고, 하나님에 의해서 들리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왕들 가운데 왕이요, 이제 얼마 있지 않아 그가 모든 세계를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의 책 머리말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님을 살리셔서, 높이셨고, 하나님 오른쪽에 앉히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셨습니다(행 5,30-31). 하나님이 높이신 분, 하나님에 의해서 들리우신 자는 하나님 때문에 낮아지신 분입니다. 자기를 낮추시되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셨다는 제자들의 증언은 대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을 격분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 제자들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행 5,33).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은 자신을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시작이며 끝이다.’(계 22,13)고 다시 한번 확증하십니다.
이 말은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의 흐름을 결정하시고,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에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증입니다. 사실 이런 사상은 구약성서의 이사야서(41,4; 44,6; 48,12)에서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알파와 오메가’라는 헬라어 철자 상징은 헬레니즘 세계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는데, 후에 유대교로 스며들어간 것이지요. 예언자 요한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표현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전권을 ‘창조자와 구원자’로 묘사하기 위해 차용한 것입니다. 헬라어 ‘알파’와 ‘오메가’는 히브리어로 ‘알렙’(aleph)과 ‘타우’(taw)인데, 알렙은 ‘우림’(Urim)을, 타우는 ‘둠밈’(Thummim)을 상징합니다. ‘우림’과 ‘둠밈’은 대제사장의 신성한 제비뽑기에서 매우 중대한 국가적 사안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데 사용되었고, 이는 ‘모두를 품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전통적으로 중세 종말론과 개신교의 근대 종말론은 개인의 희망, 특히 죽음 이후의 심판에 대한 희망을 중심문제로 삼았습니다. 다시 말해, 죽음과 최후심판 다음에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즉 개인의 영혼구원이 중심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의 구원, 세계와 우주의 구원은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위르겐 몰트만이 말했듯이,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희망이 죽음의 피안에 있는 영혼의 구원문제로만 위축된다면, 그것은 삶을 변혁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과 구원을 우주적 지평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죽음 이후의 심판과 영혼구원에 관한 전망을 계시하는 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진정한 주제는 ‘종말’이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의 ‘새로운 창조’입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계 21,5).
하나님은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죽음 후의 심판과 구원이라는 무기를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라는 생각은 우리를 소심한 크리스천으로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혼인잔치에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도둑처럼 하나님 나라가 오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우리 시대 고통 받는 이웃의 신음소리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온갖 폐기물로 오염되고 파괴되는 산과 바다, 물과 공기 같은 온생명의 아픔을 우리 몸으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구원의 전망 혹은 선교는 개인만이 아니라, 세계와 우주적 차원, 모든 피조세계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예언자 요한이 보았던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세계 안으로 친히 임재하시어,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다 사라진 현실입니다(계 21,3-4). 또한 요한이 보았던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은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강 양쪽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데 쓰이는 도시,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도성, 하나님께서 비추시기 때문에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는 공간입니다(계 22,1-5).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 우리와 함께 만들고자 하시는 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아직도 분단현실, 불의와 가난과 차별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 전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쳐 먹고, 찜 쪄 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 먹고 진짜 징하게 해쳐 먹는다’고 ‘세월호’ 희생자 가족만이 아니라 온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는 세상에,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기분 나쁘다고, 화가 난다고 ‘묻지마 살인’을 하고, 종교의 이름으로 테러가 행해지는 세상, 민족의 이름으로 학살과 인종청소가 그치지 않는 세상, 돈이 되면 전쟁도 불사하는 세계, 이념과 색깔론으로 분열되어 증오에 가까운 대립으로만 치닫는 광화문 광장 어디에, ‘민족들을 치료하는데 쓰이는 생명나무’는 있는 것일까요?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로 파멸이 가시적으로 가까이 오고 있는 지구를 구할 수 있는, 해와 달이 없어도 도성을 밝혀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계 21,23)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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