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새로운 피조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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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여호수아기 5:9-12/ 고린도후서 5:16-21/ 누가복음서 15:1-2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19-03-31 |
전주 | 오, 너희 죄를 애통하여라(J. S. Bach) |
찬양1부 | 양떼같이 헤매었네(G. H. Händel)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하나님 세상 사랑하사(Bob Chilcott)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주가 죽으신 십자가(L. Mason) |
후주2부 | 주가 죽으신 십자가(L. Mason) |
성경본문 |
여호수아기 5:9-12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고 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 달 열나흗날 저녁에 여리고 근방 평야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 다음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 날에, 그들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볶은 곡식을 먹었다.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쳐서,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 고린도후서 5:16-21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서 15:1-2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
1.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개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를 되찾은 비유, 그리고 이른바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제자가 되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가르치신 다음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의 청중은 두 집단인데, 세리와 죄인들이 한 집단이고,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다른 한 집단입니다. 예수님 시대 세리는 정식 공무원이었던 세금 징수원과 구별되었습니다. 세금 징수원은 주로 인두세와 토지세를 관장하는 정부 관리로서, 주민에게 세액을 할당하고,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세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특정한 지역의 통행세를 받을 권리를 가진 세관장에게 소속된 부하 직원이었습니다. 세관장은 예상 세입을 미리 로마 총독에게 지불해야 했고, 그 선불금에 덧붙여 경비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세리를 들볶았고, 세리는 그들에게 정해준 것보다 더 받아내려고 동족을 더욱 혹독하게 착취했습니다(눅 3,13). 이런 착취구조 때문에 세리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배신자로 낙인 찍혔고, 본인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도 이방인이나 죄인과 같은 부류로 백성의 미움과 경멸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몰려들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예수님이 같은 유대인들조차 가까이 하기를 꺼려했던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막 2,14-15). 또한 세리들의 우두머리인 키가 작은 삭개오에게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고 말씀하시고 그의 집에 묵으시면서(눅 19,1-10), 누구도 죄인이라고 차별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다른 세리들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리며 말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눅 15,2).
예수님에게 직접 항의하지 않고, 또 제자들에게 ‘당신들의 선생은’이라고도 하지 않고, ‘이 사람’이라는 지시 대명사(후토스)를 사용하면서, ‘투덜거리는’(새번역) 혹은 ‘수군거리는’(개역) 것은 예수님을 겨냥한 비겁하고도 경멸적인 표현입니다. 이런 사람들,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리고 ‘투덜거리거나’, ‘수군거리는’ 것은 ‘뒷담화’가 아니라, ‘옆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뒷담화’는 대상이 안 보이는 곳에서 하는 것이라면, ‘옆담화’는 간접적으로 은근히 들으라고 하는 방식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뒷담화’건 ‘옆담화’건, 자신을 드러내고 정당하게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투덜거리는 것은 아무튼 비겁한 행위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한 마리를 잃었다고 합니다. 양 백 마리를 가진 정도의 사람이라면 아주 큰 부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리자,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녔다’는 것입니다. 힘들게 찾다가 찾지 못하면 포기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녔다’는 것은 그의 끈질김을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지쳐 누워있는 양을 찾자,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지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길 잃은 양에 대한 목자의 배려를 보여주는 표현이지요.
두 번째 비유인 잃어버린 한 개의 드라크마를 찾은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크마는 고대 은전을 가리키는데 그 가치를 가늠하기가 어렵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은전 한 세겔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가치로 통용된 것으로 미루어 그렇게 큰 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큰 액수가 아닌 열 드라크마를 가지고 있던 이 여인은 가난한 여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한 드라크마를 잃었고, 그것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졌다’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를 잃은 주인이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나선 것처럼, 이 여인도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졌다는 것이지요. 이 여인의 절박함과 끈기를 보여주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들은 잃은 것을 찾아 나선 사람의 ‘절박함과 끈기’만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산하지 않는 무모함’과도 관계되어 있습니다. 한 마리 잃은 양을 찾겠다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들에 두고 나서는 것은 지혜롭지 않은, 아니 위험하고 무모한 행동입니다. 그 사이에 다른 양들이 피해를 입거나 또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드라크마는 그것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면서, 샅샅이 뒤질만큼 가치 있는 금액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노동을 해도 한 드라크마보다 더 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계산하지 않는 무모하신 분이십니다. 단 한 마리의 양, 단 한 개의 드라크마라도 찾을 때까지 찾아 나서는 하나님의 행동은 사람의 눈에는, 세상의 계산법으로는 참으로 무모하고 비현실적으로 비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한 생명을 온 세상(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요(마 16,26).
우리는 이 두 비유와 함께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잃은 양을 찾아 나선 목자처럼,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처럼, 잃은 자녀들을 찾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치고 힘이 들어 누워버린 길 잃은 양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버려져 꼭꼭 숨어있는 작은 동전처럼,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거나, 어쩔 수 없어서 하나님을 포기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잡은 손, 우리는 놓을 수 있어도, 우리를 잡으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이 비유들의 뜻을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눅 15,7).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들’, 그들은 이 비유를 함께 듣고 있었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엄격하게 율법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철저성은 나무랄 일이 아니지요. 그들은 요구되는 기준 이상으로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그들이 설정한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차별하며, 그들과의 접촉을 죄악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하고, 하나님의 천사들도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라고 합니다. ‘기뻐할 것’이라고 미래 시제로 말해진 것은 심판의 때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잃은 것을 찾은 기쁨과 축하가 사람 편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도 일어난다는 표현은,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나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랑이 회개를 가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의 핵심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기쁨’은 마지막 비유, 곧 돌아온 작은 아들 이야기에서 그 절정에 달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는 중요한 긴장이 있는데, 큰 아들과 작은 아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큰 아들은 집에서 아버지를 섬기면서,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습니다(눅 15,29). 하나님께 복종하면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유산을 챙겨 먼 지방으로 가서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낭비한 죄인입니다(눅 15,13). 궁핍해진 그는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돼지를 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굶어 죽게 될 지경에 이른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더 이상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품꾼의 하나로 삼아달라고 부탁할 생각으로 그는 집으로 향합니다. 그가 아직 먼 거리에서 집으로 오고 있는데, 그를 본 아버지는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불평하는 큰 아들에게 말했지요: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
하나님은 돌아온 탕자를 무조건 받아드린 아버지처럼, 자기 백성의 수치를 없애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Gilgal)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온 1세대가 다 죽고, 광야에서 태어나 할례를 받지 못한 후손들에게 할례를 베푼 것이지요. 이로써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없애버렸다는 뜻에서 그 곳 장소의 이름을 ‘길갈’(‘굴리다’, ‘없애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와 발음이 비슷함)이라고 했다고 합니다(수 5,9). 그리고 광야생활 40년 만에 처음으로 여리고 근방 평야에서 유월절을 지킨 다음 날,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서 나는 소출, 곧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볶은 곡식을 먹었는데, 그 때부터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수 5,12).
광야 40년 세월의 마감과 가나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할례라는 상징행위를 통해 각인시킨 것이지요.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과 광야 40년의 고통스런 여정에서 당한 자기 백성의 수치를 하나님이 없애셨다는 것입니다. 수치를 당한 경험은 개인적 기억이건 집단적 기억이건 오랫동안 남습니다. 어떤 것은 평생 기억을 지배하지요. 당한 수치는 수치로 되갚아줄 때 그나마 조금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복의 악순환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집트에 보복하심으로써가 아니라, 수치당한 이스라엘을 새로운 땅으로 인도하심으로써, 그들의 수치를 없애신 것이지요. 당한 수치는 보복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과 세상을 보는 눈과 관계가 변할 때 없어지는 것입니다.
2. 이 비유들의 또 다른 핵심은 하나님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많은 의인들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회개하는 죄인’을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육신의 잣대’로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고후 5,16). ‘육신의 잣대에 따라’ 사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로서, 육체적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육체를 가진 육체적 존재이고, 예수님도 육체적인 존재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잣대에 따라’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 한정되는 것에 중심을 두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잣대’는 왜곡된 인간본성입니다. 그것이 물질이기 때문에 왜곡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존재로서 인간중심적으로,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왜곡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가치는 오직 ‘육신의 잣대’에 의해서 규정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인간성의 황폐화, 극단의 시대에서부터 기후변화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집단 차원에서부터 지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뿌리 깊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뻔뻔함과 타자에 대한 무례함, 모든 다툼이 극단으로만 치닫는 사회적 갈등, 가까이 다가오는 지구적 재앙 등은, 사도 바울이 포괄적으로 표현한 것같이, 우리가 ‘육신의 잣대에 따라 살아온’ 결과입니다.
육신의 잣대로 세상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고후 5,16)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울의 무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고 자신의 사도권을 문제 삼은 다른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반박하고 자신의 사도직을 정당화하기 위한 발언이 아닙니다.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로 바울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기대를 그리스도에게 투영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거부하는 것은 자기 기대를 그리스도 상에 집어넣어 자기가 원하는 그리스도를 만들어내는 행위입니다. 자기가 믿는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그리스도라고 고집하면서 다른 그리스도는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지요. 또한 단순히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대한 축적된 지식 자체가 믿음을 이룬다는 생각입니다. 교회에 대한 지식이 곧 믿음이 아닌 것처럼, 믿음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in Christus)라는 말로 신인(神人)합일의 신비체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어떤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을 때, 다시 말해 회개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일어났던 새로운 창조가 실제로 그 사람에게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육신을 가진 인간 존재가 신적인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생각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영적인 것만 추구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렇게 변할 수 없습니다. 변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다만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서 얻어진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세상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변한 것 같지 않고, 세상 사람과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 같지만, 예전의 죄된 존재로서의 흔적들을 아직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옛 피조물들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사하신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맺는 새로운 관계는 ‘화해’입니다(고후 5,18-19). 화해의 주도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와 자기를 화해하게 하셨기 때문에 화해가 가능한 것입니다(고후 5,18). 우리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용서가 하나님과의 화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 사이의 화해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울에 의하면 사람 사이의 화해의 전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이고, 그 화해는 우리의 회개와 우리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용서에 의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화해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화해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매개된 화해입니다. 당사자 사이의 직접적인 화해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매개로 한 화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화해는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보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경험을 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할 사람도, 용서하지 못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죄인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에서 진정한 화해가 시작됩니다. 전략적인 후퇴, 정치적인 양보나 외교적인 타협은 ‘가짜 화해’입니다. 개인과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 나라와 나라 사이의 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 갈등, 노사갈등, 젠더 갈등, 세대갈등, 빈부갈등에서부터 남남갈등, 남북관계, 북미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계가 극단화되고, 교착상태(膠着狀態)에 빠지게 되는 그 근본에는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불신은 과거의 경험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적인 화해는 대부분 현재에서 과거를 향한 화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화해는 현재에서 미래를 향한 화해입니다. 목적에 이끌리는 화해입니다. 모든 적대관계의 청산과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목적으로 하는 화해는 당사자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그것은 회개와 함께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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