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회개하지 않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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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이사야서 55:6-9/ 고린도전서 10:9-13/ 누가복음서 13:1-9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19-03-24 |
전주 | 오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보소서(D. Buxtehude) |
찬양1부 | 내 마음 정결케 하소서(Carl F. Mueller) |
지휘자 | 김홍태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오 세상의 구주(A. Somervell)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 모두 맡으신 주(E. A. Hoffman) |
후주2부 |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 모두 맡으신 주(E. A. Hoffman) |
성경본문 |
이사야서 55:6-9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고린도전서 10:9-13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맙시다. 그들 가운데 얼마는 그리스도를 시험하였고, 뱀에게 물려서 죽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얼마가 불평한 것과 같이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멸시키는 이에게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고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 누가복음서 13:1-9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
1.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 제물에 섞은 사건을 몇 몇 사람이 와서 예수님에게 일러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 이야기를 전승하고 있는 누가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유대 지역에 파견된 다섯 번째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주전 12년–주후 38년)가 왜, 갈릴리 사람들을 예루살렘에서 학살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의 두 번째 황제였던 티베리우스(Tiberius, 주전 42년-주후 37년)에 의해, 주후 26년 혹은 27년에 유대 총독으로 임명받은 후, 10여 년 동안 재임한 빌라도의 통치는 매우 혹독한 것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학살은 무언가 정치적, 사회적 소요와 관계된 것이었으리라고 추정합니다.
빌라도에 대한 자료를 남긴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였던 필로(Philo, 주전 30년–주후 45년)도 빌라도를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으로 여기는 행동(그는 헤롯의 궁전에 금칠한 방패를 설치하여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헌정하였다)을 한 사람으로 언급하면서, 그를 ‘고집스럽고, 변덕스러우며, 게다가 잔인하기까지 한 자’로 묘사했습니다.
또 다른 배경은 갈릴리가 반로마제국 정서가 강력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학살당한 사람들이 로마 제국에 대항한 사람들, 혹은 무언가 정치적인 저항을 도모하기 위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모인 사람들이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제물은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드려지므로,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유월절 양들을 도살하고 있었을 때, 빌라도는 군사를 동원해 그들을 성전의 제사장 뜰에서 학살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빌라도의 학살 사건의 배경에는 그가 로마 황제들의 석상을 예루살렘으로 이동시킨 일에 격분한 예루살렘 사람들이 저항한 사건, 또는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송수로를 건설하려고 성전 재정을 사용한 것에 항거한 사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로마 제국이 파견한 식민지 총독이었던 빌라도의 잔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갈릴리 사람 학살 사건을 몇몇 사람이 와서 예수님에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전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누가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추측컨대 그들은 로마 제국과 유대 지배층에 저항했던 갈릴리 사람들을 지지한 사람들이든지, 아니면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학살당한 사람들을 지지한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은 왜 그런 일에 침묵하는지, 같이 저항하면서 민족해방운동에 동참해야하지 않겠느냐고 독촉할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저항적인 갈릴리 사람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그들의 급진주의 때문에 학살당한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고 경고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학살 사건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잔혹한 빌라도를 비난하고 민족주의적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학살당한 갈릴리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 이야기를 회개 촉구의 수단으로 이용하십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눅 13,2-3).
덧붙여 고대 예루살렘 옛 성벽의 일부였던 실로암에 있는 망대가 무너져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눅 13,4-5).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살면서 당하는 갑작스런 재난이나 사고, 또는 고난은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로 인식되었습니다. 특별한 불행은 특별한 죄를 드러낸다는 것이지요.(욥 4,7-8).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오래된 이스라엘의 전통을 거부하십니다.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 9,1-3)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난이나 고난은 하나의 ‘경고’이지,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당하지 않은 사람이나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이런 경고의 강력함과 확실성을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는 두 번에 걸친 예수님의 말씀으로 뒷받침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살면서 실수건 고의건 잘못한 일 하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 안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이니까요. 물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악행을 한 사람은 물론,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함께 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착한 사람들도 함께 망한다면 그것은 억울한 일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함께 망한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학살당하지 않은 갈릴리 사람들, 사고로 목숨을 잃지 않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무엇을 회개해야 한단 말일까요?
자신의 죄는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를 보면서, 그들이 당하는 재난과 고난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것’(마 7,3)을 회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악행을 묵인하거나 침묵으로 동조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차례대로 교수대에 오르는 유대인들, 한 아이가 교수대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줄어 서있던 한 유대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곁에 있던 다른 유대인이 말했다지요. ‘그렇지요,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랍니다.’
사람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교회나 한 나라가 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한 일, 악행 그 자체 때문에 망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뉘우치지 않고, 행동을 바꾸지 않으면, 다시 말해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크게 망하게 됩니다. 아니, 자신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세계도 함께 망하게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죽게 되는 것이지요.
2. 빌라도 학살 사건과 실로암 탑 붕괴 사고 이야기에 이어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눅 13,6-9)가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삼년이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포도원지기에게 명합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공연히 땅만 차지하면서 자양분을 빨아먹어 땅을 못쓰게 만들고, 다른 나무를 심지도 못하게 하는 피해를 주변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같이 망하게 합니다.
학살당한 갈릴리 사람들이나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은 사람들에게 재난은 밖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이 무화가 나무 자체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원지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활동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히거나 뽑혀서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더 큰 죄입니다. 회개를 뒤로 미루거나 결심하지 못해서 오는 죄는 누군가의 손에 혹은 예측하지 못한 재난으로 당한 죽음이 암시하는 죄보다 더 큽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회개를 언제나 뒤로 미루면서 악을 되풀이 행하는 것을 끝장낼 은혜의 마지막 때가 주어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불행과 고난이 죄의 결과가 아닌 것처럼, 불행과 고난 없는 삶이 곧 의로운 생활의 결과인 것은 아닙니다. 무화과나무 비유가 말하듯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당장 찍어버리지 않고 유예기간을 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결과이지, 결코 하나님이 그것을 그대로 용납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시 한 번 마지막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시는 것뿐입니다.
은혜의 마지막 때가 이 무화과나무에게 주어지듯이, 예수님의 회개 촉구도 하나님의 심판 전 짧은 ‘은혜의 시대’에 전개됩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이, 회개가 선포되는 때가 언제나 ‘마지막 때’이고, ‘은혜의 시대’인 것입니다.
3.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도 말했습니다: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사 55,6).
만날 수 있을 때 주님을 찾지 않고, 가까이 계실 때 부르지 않으면,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전도서 기자도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전 3,1-8). 때를 놓치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생각과 행동이 아무 소용이 없지요.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해야 할 때를 놓치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회개해야 할 때는 언제일까요? 회개해야 할 때는 언제나 ‘지금’입니다. 그리고 그 ‘지금’은 언제나 ‘마지막 때’이자, ‘은혜의 때’입니다. ‘지금’이 ‘마지막 때’인 이유! 회개함으로써 우리가 변화되어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결정적 시간이기 때문입니다(고후 5,17). 이전 세상은 지나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기 때문입니다(계 21,1).
그리고 그 ‘마지막 때’는 또한 ‘은혜의 때’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은혜의 때’인 이유! 그 날에 주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때문입니다(고후 6,2).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기 때문입니다.’(사 55,8-9).
그리스도인에게 결코 늦은 때는 없습니다. 회개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그 때는 언제나, 그리고 바로 ‘지금’이고, ‘마지막’입니다. 회개와 함께 이전의 내가 죽고, 회개와 함께 새로운 내가 태어나기에 회개는 언제나 나에게 ‘마지막 때’이자 ‘은혜의 때’인 것입니다.
4. 회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 3,2; 4,17)는 선포와 함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하고, 무슨 일이든지 불평만 하는 이들이 멸망을 당한 것은 일종의 경고와 본보기라고 하면서 회개를 촉구한 것이지요(고전 10,9-11).
고린도 교회를 심하게 꾸짖어 교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후회되기도 했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오히려 그런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고후 7,10).
그렇다면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잘못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뉘우치고, 삶의 변화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마 3,8). 태도와 행동의 변화가 없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과 몸이 같이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회개는 기도로 시작된다고 솔로몬 왕은 말했습니다: ‘죄를 짓지 아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백성이 주님께 죄를 지어서,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들을 원수에게 넘겨주시게 될 때에,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고, 기도하거든,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계시는 곳인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의 사정을 살펴보아 주십시오.’(왕상 8,46-49; 대하 6,37-38).
그리고 몸의 회개는 단식이나 금식으로 시작됩니다. 요엘 예언자는 자기 백성에게 촉구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너희는 진심으로 회개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욜 2,12).
사실 몸과 마음은 하나입니다. 몸을 비우면 마음도 겸손해지고, 마음이 겸손한 사람은 태도도 공손(恭遜)해지는 법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순절을 회개와 금식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순절에 회개하고 금식하는 이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다. 어차피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롬 2,5).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에,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환난과 고통을 주실 것이요, 선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내리실 것입니다.’(롬 2,5-11).
유대인이건 그리스인이건 관계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상관없습니다. 교회 안의 직분이 무엇인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회개하는 것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시대의 회개는 기도와 금식을 통한 개인의 도덕적 정화를 넘어,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악을 행하거나 악에 침묵으로 공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그들 때문에 죄도 없이 같이 죽어야 할 생명과 지구를 함께 살리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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