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아홉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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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성경구절 출애굽기 34:29-32/ 고린도후서 3:12-17/ 누가복음서 9:37-43a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03-03
전주 너희 영혼을 아름답게 하여라(J. S. Bach)
찬양1부 오소서 하늘 아버지여(Louis R. Dressler)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전능왕 오셔서(A. Whitehead)
지휘자 김경원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주 하나님을 찬양하라(arr. Don Wyrtzen)
후주2부 주 하나님을 찬양하라(arr. Don Wyrtzen)
성경본문 출애굽기 34:29-32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모세 얼굴의 살결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으나, 모세가 그들을 부르자,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가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거니, 그 때에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모세는,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다.

고린도후서 3:12-17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주 대담하게 처신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얼굴에 너울을 썼지만, 그와 같은 일은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은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서 9:37-43a
다음날 그들이 산에서 내려오니, 큰 무리가 예수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무리 가운데서 한 사람이 소리를 크게 내서 말하였다. "선생님, 내 아들을 보아주십시오. 그 아이는 내 외아들입니다. 귀신이 그 아이를 사로잡으면, 그 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또 귀신은 아이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입에 거품을 물게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상하게 하면서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청하였으나, 그들은 해내지를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며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겠느냐? 네 아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아이가 예수께로 오는 도중에도, 귀신이 그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 악한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셔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랐다.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유’(고전 9,19)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을 섬김을 받는 자유가 아니라 섬김을 위한 자유라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가 침해되는 곳에 하나님의 자유가 침해된다고 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이에게 은혜로 주어진 자유는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권력독점을 비신화화 합니다. 은혜로서의 자유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권력의 자유를 폭로하고, 소위 자유시장경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돈의 자유를 폭로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자유는 돈의 힘에 의해 독점된 자유의 오만함을 부러워하지 않게 합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의 자유를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자연을 파괴하는 무책임성에 저항하게 합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의 인간적 능력이나 소유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유가 인간 자신의 능력에 의해 - 그것이 지적인 것이건, 물리적인 것이건, 경제적인 것이건, 정치적인 것이건 간에 - 확보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는 자아실현혹은 자기관철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자유의 기준은 언제나 개인이지 공동체가 아니고, 사적 이익이지 공공성이 아닙니다. 그런 자유는 힘 있는 자를 정당화하는 도구이며 현상유지(status quo)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은혜로 주어진 자유섬김을 받기위한 자유가 아니라, ‘섬김을 위한 자유로 이해합니다. ‘섬김을 받기 위한 자유는 인간에 대한 이해나 인간관계를 모두 자본화하고, 이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오직 소유관계에서만 보게 합니다. 그 자유의 중심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의 혹은 자기 조직의 이기심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주어진 자유는 섬김의 자유이지 지배를 위한 자유가 아닙니다. 스스로 종이 된 이들의 자유, 섬기는 자들의 자유는 자발적으로 절제된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유의 기준은 가 아니라, ‘이웃타인인 것입니다(벧전 2,16; 5,13).

 

4. 그리고 이런 자유는 오직 영이신 주님께서 주실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전승되고 있는 귀신축출 이야기도 주님의 영과 자유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신 이야기는 마태와 마가에도 전승되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마가는 소년에게 악한 귀신,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이 들렸다고 하고(9,25), 마태는 간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하지만(17,15), 누가는 단지 귀신이 소년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9,39).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년을 치유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악한 귀신을 꾸짖으시자 소년이 낫게 되었다고 합니다(9,40-42).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소년을 치유하지 못한 것이 제자들의 믿음이 적었기 때문이고(17,20), 마가는 귀신들린 소년의 아버지의 믿음 없음을 그 원인으로 제시합니다(9,24). 다시 말해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치유와 믿음의 관계가 강조되어 있다면, 누가복음에는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능을 받았음에도’(9,1-2),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을 예수님과 대조시키면서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9,43)이 강조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누가가 이 귀신들린 소년의 치유이야기를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가 변모하신 예수님 이야기(9,28-36) 바로 뒤에 배치하면서, 산에서 내려오신 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누가는 이 두 사건이 일어난 날을 구별함으로써, 하나는 하늘의 영광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땅의 고통에 대한 것으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산 위에서 변모하신 예수님을 본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곳에 초막 셋을 지어 머물기를 바랬지만,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산 위에 머무는 것, 곧 종교적 신비 체험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산 아래로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악한 귀신들린 사람들이 있는 곳, ‘듣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게 하는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는 세상으로 내려오셔야 했던 것이지요.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9,41)에게 오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 맞서 악한 짓을 한 세대(32,5), ‘타락한 세대, 진실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세대’(32,20),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 모든 정의의 원수,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세대’(13,10)에게 가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악한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셔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습니다’(9,42-43).

 

5. 예수님은 변화산 정상에 초막을 짓고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상으로,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힘과 돈이라는 귀신에 사로잡혀 소리를 지르고, 경련을 일으키며,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9,39),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에 사로잡혀(9,25), 어지러운 세상에서 귀 막고, 입 막고, 눈 감고 사는 것이 그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악한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시고,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치유하심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선(神仙)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人子)이셨습니다. 구름 속에서 들리는 소리,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9,35)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마땅히 그 분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구름 속이 아니라 먼지 속이, 천사가 있는 곳이 아니라 귀신이 있는 곳이, 예속의 영이 아니라 자유의 영이 계신 곳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머물러야 할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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