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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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사도행전 4:32-35/ 요한1서 1:5-2:2/ 요한복음서 20:19-23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1-04-11 |
전주 | 내 영이 주를 찬양하나이다(F. Couperin) |
찬양1부 | 영화롭도다(W. A. Mozart) |
지휘자 | 정록기 집사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부활절 찬송(R. Shephard) |
지휘자 | 김선아 집사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하나님 하신 일, 모두 선하시다(F. Liszt) |
후주2부 | 즐겁도다 이 날(L. Smith) |
성경본문 |
사도행전 4:32-35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요한1서 1:5-2:2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쓰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20:19-23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1.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요 20,18).
그런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은 그 날 저녁까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말을 하셨습니다(요 20,19). 그리고 자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후, 여드레 뒤, 의심하는 제자 도마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집 안에 모여 문을 잠그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말을 하셨습니다(요 20,26). 그리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요 20,27)고 말씀하셨지요.
이 두 사건은 예수님이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요한의 예증입니다. 그런데 육체로 부활하셨다면, 어떻게 모두 닫아걸은 문(요 20,19), 잠겨 있는 문(요 20,26)을 뚫고 들어오실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부활하신 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몸과 무언가 같으면서도 다른 특이한 몸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살아있을 때의 형체를 유지하는 영혼이라는 말인가? 불멸하는 영혼의 부활이라면, 굳이 육체의 부활이라고 주장할 수 없지 않은가?
2. 이런 질문들이 교회의 역사에서 시대마다 제기되어 왔고, 그에 대한 답도 다양하게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사실 주전 6세기,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완전히 패망했을 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전 6세기 예언자들은 멸망한 나라를 하나님께서 다시 세워주실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들의 부활신앙은 다윗 왕국과 왕조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이런 선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제국에 의해 연달아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속된 군사적 재앙과 고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억압 속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재건과 부활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일부 유대교 사상가들은 이 미래의 부활이 국가가 아닌 개개인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제기한 질문은 일종의 ‘신정론’적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면, 의로운 자들이 겪은 고난을 보답도 없이 내버려 두실 리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신정론’적 질문에 합당한 설명을 찾기 시작한 유대 사상가들은 사후 세계관을 제시했습니다. 종말의 때가 오면 하나님이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것이고, 죽은 자들은 육체로 되살아나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살아간 자들에게는 상을 내리고, 그들을 괴롭혔던 적들에게는 벌을 내림으로써 자기 백성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국가의 회복’이라는 의미의 부활신앙이 죽은 ‘개인의 부활’에 대한 신앙으로 변화되었지만, 예수님 시대 이전부터 부활신앙은 유대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예수님 시대에는 부활문제를 중심으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바리새파는 천사와 영의 존재, 몸의 부활을 믿었으나, 사두개파는 부활과 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막 12,18; 눅 20,27; 행 23,8).
3. 몸의 부활 신앙에 대한 신약성경 전승 가운데 복음서들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서고 진정성 있는 전승은 고린도 전서 15장에 실려 있는 사도 바울의 증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그들은 어떤 몸으로 오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씨와 열매’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땅에 심는 씨는 장차 그 씨로부터 생겨날 열매와 다릅니다. 땅에 심겨진 씨가 변하지 않으면 열매가 될 수 없듯이,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은데,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고전 15,42-44).
이 말은 부활할 몸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와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일 같다면, 다시 말해, 지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모든 약점과 장애를 안고 부활한다면, 그런 육체의 부활, 아마 모든 사람이 사양할 것입니다. 게다가 어느 시절의 몸으로 부활하느냐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몸으로 부활한다면,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가신 조상들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우리가 흙으로 빚은 사람의 형상을 입은 것과 같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을 것’(고전 15,49)이라고 표현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부활할 몸, 다시 말해 썩지 않을 몸, 영광스러운 몸, 강한 몸, 신령한 몸이 어떤 몸인지는 알 수 없지만 - 물론 죽은 다음에는 알게 되겠지요 - 지금 가지고 있는 몸 위에, 다른 몸을 덧입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는다.’는 것이지요(고전 15,54).
4. 바울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몸의 부활을 믿으면서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당시 지배적인 철학이었던 헬레니즘 세계의 ‘영혼불멸설’과 영지주의 세계의 ‘가현설’의 도전 때문이었습니다. 플라톤(기원전 427-347)으로 대변되는 영혼불멸설은 땅 혹은 수치스런 물질에 속한 육체는 사멸하지만, 정신에 속한 영혼은 불멸한다는 이원론적 인간학이지요. 인간의 육체는 영혼을 감금하는 영혼의 감옥이고, 죽음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이데아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침착하고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죽음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고통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절규하면서 마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정치범의 한 사람으로, 나무에 달려 죽어 저주받은 자의 한 사람으로(행 10,39), 하나님마저 침묵하는 절망 속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온 몸으로 죽음을 죽으셨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영혼이 분리된 껍데기만 고난 받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육체는 축복받은 하나님의 창조였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야 합니다.’(창 1,28). 그리고 죽음은 영혼의 자유가 아니라,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였습니다(고전 15,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믿는 부활은 불멸하는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도, 기억의 재생도,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시체의 소생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분의 몸이자,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영의 몸(고전 45)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 시체의 소생이냐 영적인 존재로의 거듭남이냐에 있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난 사람들의 부활신앙이 바울의 관심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고전 15,18)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모두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모든 권위와 모든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에 두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한다’고 합니다(고전 15,23-26).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사후 운명을 넘어, 역사에 대한 심판입니다. 지상에서의 모든 통치와 모든 권위와 모든 권력을 폐하시고, 세상 나라를 하나님에게 넘겨드리는 심판을 앞서 보여주신 사건이지요. 세상 권력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멸절시켜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침내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 그 자체입니다(고전 15,26).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생명이 죽음을 삼켜,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는다는 믿음입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주님께서 재림하시면서 세상의 모든 통치와 권력을 폐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홀연히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고전 15,52).
5. 그래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어떤 몸으로 부활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만약 그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요한도 닫힌 문을 뚫고 들어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어떤 몸인지 설명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요한은 다만 유대사람들이 무서워서 제자들이 문을 닫아걸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 서셨다’고 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을 제자들이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는, 제자들이 막달라 마리아의 전언을 듣고도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는데서 드러납니다. 두려웠겠지요. 자기들도 스승처럼 고문당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은 그러나 도마 만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모두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먼저 그런 제자들에게 오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말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오십니다. 제자들이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태에 있든지, 스스로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은 우리 자신의 용기나 능력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믿음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주님에 의해서 극복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면서,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자,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두려움이 기쁨으로, 불안이 평화로 바뀐 것이지요. 예수님은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자기만족적 기쁨 안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제자들은 닫힌 문 뒤에서, 그런 개인적인 기쁨 안에서 영원히 머물러 있기를 원했을지 모릅니다. 오랜 세월동안 교회는 세상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닫힌 문 뒤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시고,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고 약속하십니다(요 20,21-23).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문 밖, 곧 죄가 넘치고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찬 문 밖, 세상으로 다시 보내십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자들은 자신을 통하여 그들을 보내신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을 보여주셨듯이.
이제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제자들, 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평화였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임재의 표징으로 성령을 불어넣으시면서, 세상 죄를 용서할 권한을 주십니다(요 20,21-23).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개인적이고 영적인 자족감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닫히고 잠긴 문을 열고 문 밖으로, 제자들을 세상으로 밀어냅니다. 선과 악이 맞서 싸우는 곳, 죽임과 죽임이 지배하는 어두운 세상으로 두려움 없이 나가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 나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보증으로, 생명의 숨,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 20,23)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한 편으로 오래동안 가톨릭 교회 고해성사의 정당성을 알리는 성서적 전거로 사용되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먼저 열한 사도에게, 그리고 그들이 서품을 준 성직자들에게만 주어졌다는 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을 회중으로 받아들이거나, 회중에서 쫓아내는 교회의 권위와 관련하여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권세가 제자들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으며,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죄사함을 전하는 권세이자 죄인들에게 세례를 주는 권세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하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다시 험한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성령과 함께 그들에게 죄를 용서할 수도, 용서해 주지 않을 수도 있는 권세를 주신 것은 분명합니다.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무엇이든지 그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 16,19)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박해와 고통,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총이나 칼 같은 무기나 갑옷을 줄 수도, 아니면 돈 주머니를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죄를 용서하거나 용서해주지 않을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빛의 갑옷을 주셨는데(롬 13,12), 그 갑옷은 ‘진리의 허리띠, 정의의 가슴막이,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엡 6,14-17; 살전 5,8)으로 구성되는 갑옷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총칼로, 사회적 지위나 돈이나 권력으로 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의, 그 어떤 죄든지 용서함으로써 구원하고, 그 누구의, 그 어떤 죄든지 용서하지 않고, 그 죄를 남아있게 함으로써 심판합니다. 죄가 남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은 다만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죄가 그대로 남아있게 하면 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죄와 악이 넘치는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을 때 주시는 유일한 무기, 그것은 용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가장 힘없는 사람의 무기이지만, 가장 강한 구원의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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