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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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에스겔서 34:11-16/ 에베소서 1:15-23/ 마태복음서 25:31-40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11-22 |
전주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F. Mendelssohn) |
찬양1부 |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G. B. Shea) 특송: 송승연 집사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내 마음 정결케 하소서(C. F. Mueller) 특송: 이예랑 교우, 김유정 집사, 김호 집사, 김준홍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나라와 권세와 영광, 아버지께 영원히 있나이다(F. Mendelssohn) |
후주2부 | 주 예수 이름 높이어(J. Corell) |
성경본문 |
에스겔서 34:11-16 "참으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나의 양 떼를 찾아서 돌보아 주겠다. 양 떼가 흩어졌을 때에 목자가 자기의 양들을 찾는 것처럼, 나도 내 양 떼를 찾겠다. 캄캄하게 구름 낀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하여 내겠다. 내가 여러 민족 속에서 내 양 떼를 데리고 나오고, 그 여러 나라에서 그들을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산과 여러 시냇가와 그 땅의 모든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 기름진 초원에서 내가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이 거기 좋은 목장에서 누우며,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좋은 풀을 뜯어 먹을 것이다.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눕게 하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들겠다. 그러나 살진 것들과 힘센 것들은, 내가 멸하겠다. 내가 이렇게 그것들을 공평하게 먹이겠다. 에베소서 1:15-23 그러므로 나도, 주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서, 여러분을 두고 끊임없이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내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마태복음서 25:31-40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
1. 왕을 목자로, 백성을 양떼로 비유하는 예는 중근동의 고대 수메르 시대부터 신(新)바빌로니아 시대까지 널리 발견됩니다. 함무라비(BC 1728-1686) 법전에서도 왕은 ‘방탕한 자들과 악한 자들을 없애고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의 권리를 박탈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임명된 사람들의 목자, 곧 목초와 물의 공급자’로 일컬어집니다. 이런 표현법은 대략 주전 710년경에 이르기까지 왕의 비문들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이집트의 제왕 찬가에도 백성으로 하여금 살고 숨 쉬게 하는 목자인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라고 권고하는 말이 나옵니다. 고대 근동의 이상적인 제왕 상에는 올바른 목자가 약한 양을 목장으로 인도하고 음식물과 물을 공급하며, 목초지와 안전한 울을 확보해줌으로써 양떼를 보살피는 보호기능이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이상적인 왕을, 때로는 하나님을 목자로, 백성을 양떼로 묘사하는 전통은 구약성경에서도 빈번히 나타납니다. 시편 23편이 대표적이지만, 시편 77편 20절, 80편 1-2절, 이사야서 40장 11절, 요한복음 10장 11절 등에서도 주님은 목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님을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 비유한 또 다른 인물은 예언자 에스겔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을 ‘자기 양떼를 찾아 돌보시는 목자와 같으신 분, 캄캄하게 구름 낀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양 떼를 구하시는 분, 여러 나라에 흩어져 헤매는 양 떼를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드시는 목자’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시에 ‘살진 것들과 힘센 것들은 멸하시는 목자’, ‘백성을 학살하고 착취하는 이스라엘의 부패한 지도자들을 대적하여, 그들에게 맡겼던 양 떼들을 되찾아 오시고, 그들을 반드시 멸하시겠다고(겔 34,16) 자신의 생명을 두고 맹세하는 목자’(겔 34,8)이시기도 합니다.
부시의 아들인 예언자 에스겔은 여호야긴 왕이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온 지 오 년째가 되는 어느 날, 곧 주전 593년 6월에, 이라크 남쪽에 위치한 고대 도시 니푸르(Nippur) 근처, 그발 강가에서 주님의 권능에 사로잡혀 환상을 봅니다.
‘에스겔’,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 또는 ‘하나님이 강하게 붙잡으신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었지만, 소명을 받을 때, 그는 두려움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겔 1,28). 주님에게 반역하는 족속, 얼굴에 쇠가죽을 쓴 고집센 자들(겔 3,7)에게 가서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했던 에스겔은 ‘괴롭고 분통이 터지는 심정에 잠겨, 얼이 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었습니다(겔 3,14-15).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언자로 나선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했으나, 얼굴에 쇠가죽을 쓴 고집센 반역의 족속, 자기 동족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했고, 왕과 지도층 인사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에스겔도 유배지로 끌려간 포로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조국 유다에 남아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냐를 중심으로 한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고, 느부갓네살 왕이 탈취하여 간 성전의 모든 기구를, 포로로 끌려간 백성과 함께 2년 안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것이라는 거짓 예언으로 백성을 선동했기 때문입니다(렘 28,2-3). 유다에 남아있던 예언자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이 거짓이라고 선포하고,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에게 편지를 보내, 거짓 예언에 속아 귀향에 대한 망상을 갖지 말고, 바빌로니아에 정착하라고 권면합니다(렘 29,1-7).
그러나 거짓 예언에 솔깃해진 유다 포로들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유다에 남아있던 시드기야 왕은 이집트의 파라오 프사메티쿠스 2세의 약속을 믿고 무모한 반란을 시도합니다. 주전 588년 드디어 유다의 시드기야 왕은 바빌로니아에 대한 조공을 거부하고, 느부갓네살은 즉시 전쟁을 선포한 후, 주전 587년 예루살렘 성을 포위공격, 마침내 주전 586년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파괴했습니다.
예레미야와 동시대 예언자였지만, 바빌로니아 유배지에서 선택받은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을, 목자와 양떼의 비유를 들어 선언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기는 하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는 않는 목자들,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주지 않고, 병든 것을 고쳐주지 않고,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고, 오히려 양 떼들을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목자들인(겔 34,1-4) 부패한 이스라엘의 지도층 인사들을 멸하시고, ‘여러 민족 속에서 흩어진 양떼를 모아서....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고,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고,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드실 것’이라고 합니다(겔 34,16).
2. 하나님을 목자로, 그의 백성을 양떼들로 비유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최후의 심판 비유(마 25,31-46)에서도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 때에,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 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운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 오른 쪽에 세운 양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의인들’이라고 호칭 받는 양 떼로 분류된 사람들은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서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련의 비유들의 마지막 비유가 모든 민족에 대한 최후의 심판과 관계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역사의 종말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는 카이로스적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최후의 심판 때에,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느냐’(마 25,41), 아니면 ‘창세 때부터 준비한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느냐’(마 25,34)를 판단하는 기준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하나에게 선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라는 것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은 그들이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구체적으로 말해, ‘굶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내 형제자매’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참으로 미미하고, 생명이 위태롭고, 압박당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인간들 안에 그들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양으로 분류된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들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허다한 사소한 일들 속에서 다만 그들을 도왔던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계셨다는 것, 아니 그들 안에 계셨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염소로 분류된 ‘저주받은 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되물은 것이지요.: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마 25,44).
마치 주님께서 그런 고통을 받으시는 것을 알았더라면 돌보았을 것인데, 주님은 그런 적이 없지 않느냐는 말투입니다. 그렇지요, 그들은 주님이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시는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스스로 그런 고통을 받으신 적은 없었고, 주님이 그런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초월적 존재로서,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 그것도 지성소 안에 머물러 계신다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최후의 심판’ 비유의 진정한 초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거나, 영원한 형벌이냐 영원한 생명이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조건 없는 ‘선행’이라는 것을 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적극적으로 구원의 활동을 하고 계시며, 이웃종교인, 심지어 무신론자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선언을 뒷받침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칼 라너의 주장은 모든 인간과 피조세계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에 근거한 것이지만, 이런 고백과 선언은 자칫 그리스도교 신앙의 절대성 주장, 혹은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비유의 진정한 초점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이해하거나, 야고보서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라고 말한 것처럼 선행이 중요하다거나, 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신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곧 하나님이냐는 질문이 제기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통받는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곧 하나님이다는 주장은 이해하기도 쉽지 않지만,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민중신학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민중이 곧 메시아라면, 그렇다면 민중은 누가 구원하느냐는 질문이 제기된 것이지요.
1975년 3월,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 1926- )이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에도, 그리고 그 후 민중신학자들과 서구 신학자들과의 신학적 대화가 진행되었을 때에도, 이 문제는 그치지 않고 제기되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을 당시 한국의 개발독재체제 아래서 고통 받는 한국 민중과 동일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래서 민중이 곧 메시아라는 주장은 서구 신학자들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민중신학자들은 구원의 주체와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주객도식에 사로잡힌 서구적 발상이라고 비판했고, 서구신학자들은 그러면 민중은 누가 구원하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민중 자신이 구원자라면, 그 다음 민중은 자신을 위해서 어떤 구원자도 갖지 않으며 역시 가질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그랬던 것처럼, 민중이 그의 고난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면, 우리는 민중의 고난을 신성시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 고통을 가능한 빨리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서구 신학자들은 민중신학자들에게 만일 한국이 발전해서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가 되면, 그 때에 민중신학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대화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1970년대 한국의 민중신학자들과 서구 신학자들 사이에 있었던 신학적 대화를 소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1975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젊은 독일 신학자였던 위르겐 몰트만이 준 신선한 충격과 고난 받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과의 헌신적인 연대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이 되었고, 특별히 그가 1975년 부활절에 우리 경동교회에서 행한 특강, ‘민중의 투쟁 속에 있는 희망’이 마태복음서 25장의 ‘최후의 심판’ 비유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음을 상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는 말씀은 선행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의 자만심과 자족감, 우월감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에게서 최후의 심판자를 볼 때 가능한 것이지요.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일화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데 추위에 떠는 거지가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기억한 김목사님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주면서, 이 거지가 예수님이실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몰래 거지의 뒤를 쫒아갔는데, 한 참을 걸어가던 거지가 다리 밑 천막으로 들어가더라는 것입니다. 허탈했지만, 추위에 떠는 걸인을 도와준 뿌듯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이지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신다는 이 말씀은 우리 시대에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진실로 큰 위로가 됩니다.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우리 안에 함께 계신다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는 존재론적 변화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변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관계이지요.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요 6,51)고 말씀하셨을 때, 빵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 말씀은 가장 거룩한 분이 물질적인 것 안에 계심으로써 물질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거룩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믿는 사람은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학이 말하는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도 같은 의미이지요.
3. 그런데 하나님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과만 자기를 동일시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와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이라고 증언합니다(엡 1,20-23).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성자 하나님을 통해, 성령 하나님 안에 존재하고, 하나님은 그의 영을 통해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창조 공동체 안에 현존하십니다. 하나님은 만물 안에 계시고, 만물 위에 계시며, 만물을 통하여 계시면서(엡 4,6), 만물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완성하신다는 뜻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인간과 역사의 구세주만이 아니라, 우주적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근대의 서구 신학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인간과 영혼구원으로 축소시킴으로써, 이 세계의 다른 모든 피조물을 구원이 없는 상태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모든 만물의 화해를 찾고(골 1,20),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을 통해 대가를 치르신 귀중한 존재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교회가 구원을 인간 세계와 인간 영혼에 국한시킨 것은 위험한 제한이었습니다. 이제 교회는 우주 전체를 대변해야 하고, 인간 때문에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피조물의 탄식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합니다(롬 8,19).
기후위기로 파멸에 직면한 지구를 살리는 것, 이것이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을 머리로 한 교회의 시대적 사명이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말한 크리스천의 ‘생태적 회개’입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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