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둘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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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용서를 부르는 용서
성경구절 출애굽기 14:26-31/ 로마서 14:1-3/ 마태복음서 18:21-35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09-13
전주 주께 간구하나이다(J. Pachelbel)
찬양1부 Panis Angelicus(C. Franck) - 특송: 이현숙 권사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찬양2부
지휘자
반주자
후주1부 주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arr. J. C. Pardini)
후주2부 주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arr. J. C. Pardini)
성경본문 출애굽기 14:26-3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라. 그러면 바닷물이 이집트 사람과 그 병거와 기병 쪽으로 다시 흐를 것이다." 모세가 바다 위로 팔을 내미니, 새벽녘에 바닷물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이집트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물결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주님께서 이집트 사람들을 바다 한가운데 빠뜨리셨다. 이렇게 물이 다시 돌아와서 병거와 기병을 뒤덮어 버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따라 바다로 들어간 바로의 모든 군대는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갔는데, 바닷물이 좌우에서 그들을 가리는 벽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바로 그 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셨고,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널려 있는 이집트 사람들의 주검을 보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치신 주님의 크신 권능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과 주님의 종 모세를 믿었다.

로마서 14:1-3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

마태복음서 18:21-35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그런데 그는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그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말하기를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였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 유대인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같은 죄에 대하여 두 번에서 세 번까지 용서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동족 사이에서도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두 번에서 세 번까지 용서하는 것은 유대 사회의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에게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18,21)라고 물은 것은, 그가 기꺼이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통상적인 용서의 횟수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로써 베드로는 한편으로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빈번하게 죄를 짓는 형제가 있는데, 자신이 얼마나 그런 형제에게 관대한지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는 도대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 그 인내의 한계와 용서의 양적 횟수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18,22)고 대답하셨습니다. 다른 사본에 의하면 일흔일곱 번까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한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양적인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질적으로 답변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이 답변은 창세기에 나오는 이른바 라멕의 노래,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4,24)는 라멕의 노래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가인은 최초의 형제살인자였습니다. 라멕은 가인의 5대 후손입니다. 질투와 화 때문에 아우를 죽인 가인의 후손인 라멕은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젊은 남자를 죽였습니다. ‘상처로 번역된 히브리어 펫짜는 자식에게 매질할 때 나는 상처(20,30), 혹은 넘어져서 입은 멍이나 타박상 정도의 상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라멕은 이렇게 미미한 상처에 대하여 살인으로 보복한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히면, ‘일흔일곱 갑절로 보복하겠다고 합니다. 폭력에 대한 더 큰 폭력적 대응, 오직 죽음으로만 끝나는 보복의 악순환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21,25)는 구약성경의 동태복수법을 어기는 것이며,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32,35)는 하나님의 보복권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멕의 노래는 일종의 자기 과시의 노래로서, 끝없는 복수를 선언한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의 직업세계의 변화와 함께 죄가 증대하고, 그와 함께 본래적 삶의 질서가 점점 더 깊이 파괴되어 간 세상을 반영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 형제살인에 이어, 이제는 하나님이 하시는 보복을 인간 스스로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수는 아주 무자비합니다. 작은 상처를 입어도 한 남자를 죽이고, 한 번 손찌검을 당해도 젊은 남자를 죽이고, 일흔일곱 갑절로 보복하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라멕의 노래를 빌려, 역설적으로 일흔일곱 갑절의 보복이 아니라, ‘일흔일곱 갑절의 용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오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오는 이 끝없는 복수의 악순환은, 오직 끝없는 용서를 통해서만 끝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2. 그리고 예수님은 용서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종에 대한 비유를 베드로와의 대화에 덧붙이십니다. 어떤 왕 앞에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끌려왔습니다. 만 달란트는 사실 계산하기 어려운 엄청난 규모의 금액입니다. 당시 헤롯 대왕의 일 년 수입이 약 900 달란트였고, 주전 4년 갈릴리와 뵈레아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이 약 200달란트였다면, 만 달란트라는 금액은 헤롯 대왕이 11년 이상의 수입을 모아야 하는 엄청나게 큰 액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배경은 왕과 그에게 개인적으로 부채를 짊어진 종에 관한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조세 체계와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는 지역의 세금 징수를 최고 입찰자에게 도급으로 주었고, 입찰을 받은 사람은 실제적인 세금 징수를 위해 다른 대리인을 고용했습니다. 세리가 그런 사람들이었지요. 황제의 세금징수 대리인은 바쳐야 할 세금 외에도 자기 이익을 남겨야 했기 때문에, 백성에게 가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여된 세금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황제는 대리인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거나, 감옥에 가두어, 그의 다른 후견인이나 의뢰인들이 대신 부담하게 했습니다. 황제는 그들이 대리인을 구하기 위해 부족분을 벌충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먼저 왕은 그 종에게 자기 자신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종은 무릎을 꿇고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닙니다. 물론 이스라엘에서도 채무자가 자신을 노예로 팔 수 있었습니다(왕하 4,1; 50,1; 2,6; 5,1-13). 그러나 당시 노예의 가격은 500데나리온에서 2,000데나리온 사이였기에, 1억 데나리온이라는 막대한 채무액은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을 다 노예로 팔아도 갚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왕의 이런 요구에서 이 비유가 유대적 배경이 아니라, 이방인의 전통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법에 의하면 도둑이 훔쳐온 것을 배상할 수 없는 경우에만 이스라엘 사람을 파는 것이 허용되었고, 아내를 파는 것은 유대지역에서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채무자를 파는 것도 채무액이 채무자를 판 금액보다 많을 때에만 허락되는 것이 유대적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의 상황은 참으로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빚진 종은 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습니다(18,27).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그에게 빚진 것을 갚으라고 다그쳤다는 것입니다. 사실 백 데나리온은 큰 돈이 아닙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충분히 갚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백 데나리온이라는 소액으로는 채무자를 팔수도, 구속할 수도 없었던 것이 유대적 전통이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용서받은 만 달란트에 비하면 오십만 분의 일에 불과한 돈입니다. 그런데 만 달란트를 용서받은 종은 자기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했다고 합니다(18,30).

 

자비와 은혜를 입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무자비하고 강퍅한 세상의 현실을 보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남에게는 끝없이 잔혹한 인간성, 동병상련(同病相憐)보다, ‘내로남불이 지배하는 세상을 반영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른 종들이, 그를 매우 딱하게 여겨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습니다. 노한 주인은 그를 불러다 놓고,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했다고 합니다(18,32-34).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던가요? 적은 빚을 진 동료에게 한 대로, 엄청나게 많은 빚을 용서받고서도 동료를 용서하지 않은 종도 감옥에 갇힙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지요. 그가 다른 사람에게 한 대로 당한 것입니다.

 

3. 비유의 배경이 로마 제국의 세금징수체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과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이 비유가 마지막 심판에 관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용서할줄 모르는 악한 종에 대한 비유는 용서에 대한 권고이자 심판에 대한 경고라는 말이지요. 왕이신 하나님은 모든 이해와 상상을 초월하는 은혜로운 용서를 허락했는데, 그런 용서를 받고도, 형제가 진 사소한 빚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교 묵시문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두 개의 척도, 곧 자비와 심판을 가지고 세계를 다스리지만, 마지막 심판에서는 오직 심판의 척도만 적용됩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재판관의 보좌에 앉아 나타나시면, 긍휼은 없어지고, 동정은 멀리 가며, 관용은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에 반해, 마지막 심판에서도 자비의 척도가 적용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은 어느 경우에 자비의 척도를, 어느 경우에 심판의 척도를 사용하시는가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해, 대답하셨습니다. ‘용서’, 오직 용서만이 하나님의 용서를 불러오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형제의 작은 잘못도 무한히 용서한다는 것, 그러나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18,35)이라고 답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만이 용서를 불러옵니다. 증오는 더 큰 증오를,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부르는 세상에서, 용서로 용서를 부르는 형제자매들의 신앙공동체를 함께 만들라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4. 사도 바울도 음식 문제로 갈등과 분열에 휩싸인 로마 공동체에 보낸 편지에서,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말라고 권면합니다(14,1).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받아드리고, 다른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말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14,3).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바울은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3,13)라고 말함으로써, 용서는 용납(容納)임을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우리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다른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않아야 하는 것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목적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거짓으로, 전략적으로, 입술로만(15,8)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18,3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하는 형제자매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용서받을만한 행동이나 배상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유대 전통과 마찬가지로, 두 세 번은 혹시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흔 번을 일곱 번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와 무조건적인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무조건적으로, 한계 없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자비롭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앙의 응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 사이의 용서는 선후와 조건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게 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실 리가 없지요.

 

5. 세계적인 영성가인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은 네델란드 출신의 예수회 사제였습니다(1957년 서품). 1971년부터 예일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나, 1981년 자신의 풍요로움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하여 교수직을 버리고, 페루의 빈민가로 가서 민중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으나, 다시 돌아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심리학과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안식을 느끼지 못한 그는 다시 하버드 대학 강단을 떠나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정신박약장애자 공동체 데이브레이크(Daybreak)에서 6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장애인들과 생활한 인물입니다.

 

그가 풍요롭고 안정된 세계 최고의 명문대 교수직을 버리게 한 것은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며,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그치지 않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질문은 그의 안정된 삶을 방해했지만, 그 방해거리들로 인하여 그는 자신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방해거리들은 그에게서 뭔가를 하나 빼앗아 간 대신에 새로운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교수로서의 성공 너머에는 고독과 공동체 안에서의 내적 평안이, 어머니와의 유대관계 너머에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임재가, 북아메리카의 안락한 생활 너머에는 볼리비아와 페루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해맑은 미소가 있었고, 학자로서 쌓아온 경력 너머에는 마음과 몸이 부서진 사람들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소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뒤에서 오던 승합차의 백미러에 받혀 사경을 헤매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때의 경험을 기록에 남긴 책, ‘거울 너머의 세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의 목전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나를 삶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분노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 진정한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진정한 문제는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남겨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내 안에 생명이 꺼져 가고 있음을 느끼면서 어떤 강한 열망, 즉 용서하고 싶고 용서 받고 싶은 욕망, 내가 내렸던 그 모든 평가들과 의견들을 다 날려 보내고 싶은 열망, 그리고 판단하는 모든 짐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열망들을 느꼈다.’

 

살면서 자신이 내린 평가와 의견과 판단 때문에 친구만이 아니라, 적도 생기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우리 자신이 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적대감만큼, 적도 우리 자신에게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적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분노 때문에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더 큰 분노는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일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죽음을 향한 길 위에서 마지막으로 원한 것은 용서하고 싶고, 용서받고 싶은 욕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을 떠날 때, 여러분의 마지막 열망은 무엇이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는지요? 죽음의 문턱에서 여러분이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은 무엇일지 생각해보셨나요? ......... 헨리 나우웬의 마지막 열망은 모든 짐들을 다 날려 보내고, 얻는 자유였고, 그 자유는 오직 용서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깨달음이었습니다.

 

용서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페시스’(aphesis)떼어낸, 분리된을 뜻하는 접두어 아포’(apo)보내다를 뜻하는 어간 히에미’(hiemi)가 합성된 여성 명사형 단어로 떼어서 떠나보내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우리가 살면서 짊어진 무거운 짐, 부채, 죄를 우리에게서 떼어내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무한한 자비와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빚을 떼어내 떠나보내신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용납된 죄인’, ‘용서받은 죄인이 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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