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어둠의 자녀들과 빛의 자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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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사무엘기상 16:1-7/ 에베소서 5:8-14/ 요한복음서 9:1-7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03-22 |
전주 | 오, 너희 죄를 애통하여라(J. S. Bach) |
찬양1부 | 내 평생에 가는 길(P. P. Bliss) - 특송: 박영미 집사(Cello), 최정헌 집사(Clarinet)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
지휘자 | |
반주자 | |
후주1부 | 주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arr. J. C. Pardini) |
후주2부 | |
성경본문 |
사무엘기상 16:1-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사울이 다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내가 이미 그를 버렸는데, 너는 언제까지 사울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냐? 너는 어서 뿔병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길을 떠나,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거라. 내가 이미 그의 아들 가운데서 왕이 될 사람을 한 명 골라 놓았다." 사무엘이 여쭈었다. "내가 어떻게 길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사울이 이 소식을 들으면, 나를 죽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암송아지를 한 마리 끌고 가서,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치러 왔다고 말하여라. 그리고 이새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내가 거기에서 너에게 일러주겠다. 너는 내가 거기에서 일러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라." 사무엘이 주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니, 그 성읍의 장로들이 떨면서 나와 맞으며 물었다.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그렇소. 좋은 일이오. 나는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치러 왔소. 여러분은 몸을 성결하게 한 뒤에, 나와 함께 제사를 드리러 갑시다." 그런 다음에 사무엘은, 이새와 그의 아들들만은, 자기가 직접 성결하게 한 뒤에 제사에 초청하였다. 그들이 왔을 때에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시려는 사람이 정말 주님 앞에 나와 섰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에베소서 5:8-14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끼여들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폭로하십시오. 그들이 몰래 하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빛이 폭로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드러나는 것은 다 빛입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어서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환히 비추어 주실 것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9:1-7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
1. 세계를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의 틀에서 이해한 종교적 전통은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인류의 태양신 숭배 이후, 빛과 어둠을 선과 악의 상징으로 도덕적으로 분리하여 이해한 종교적 기원은 페르시아에서 기원한 조로아스터교라고 종교학자들은 말합니다.
빛과 어둠의 이런 이원론은 후에 ‘영지주의’로 꽃을 피웠습니다. 영지주의는 동양종교, 그리스 철학, 그레코-로마의 신비종교와 기독교의 교리가 섞인 일종의 혼합주의적 종교였습니다. 물질과 육체를 죄악시 하고 영을 높이 평가하는 그들의 극단적인 이원론은 한편으로는 금욕주의로, 다른 한 편으로는 쾌락주의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영지주의는 신의 속성을 지닌 불꽃인 영혼이 물질 세상에 갇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식을 통해 악한 물질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구원의 목표로 삼았고, 영혼의 감옥인 육체를 억압하는 금욕이 추구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이원론은 현실을 보는 시각을 단순화하여, 판단과 결단을 빠르게 하는 장점이 있지만, 인간의 삶의 모호성과 현실의 복잡성을 파악하고 담기에는 너무 엉성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빛과 어둠, 인간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만 구별될 수 없지요.
그러나 후기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교가 영지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초대 교회는 동시에 영지주의 집단과 대결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과 ‘몸의 부활’을 주장했습니다(고전 1,22-25). 또한 영적 지혜에 바탕을 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바탕을 둔 믿음(고전 2,5),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임을 강조했습니다(고전 2,12). 사도 바울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속이는 영과 악마의 교훈’(딤전 4,1),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골 2,8;2,20)라고 규정하면서, 이들은 ‘붙잡지도 말아라, 맛보지도 말아라, 건드리지도 말아라’(골 2,21)는 금욕주의를 강조하지만, 이런 것들은 ‘꾸며낸 경건과 겸손과 몸을 학대하는 데는 지혜를 나타내 보이지만,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비판합니다(골 2,23). 이들은 또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을 먹지 말라고 합니다(딤전 4,3). 그러나 바울은 그런 음식물도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과 진리를 아는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게 하시려고 만드신 것이고, 좋은 것이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강조합니다.(딤전 4,3-4).
신약성경 가운데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거나, 영지주의와 대결한 흔적이 남아 있는 서신들은 바울 서신들과 요한1서, 유다서, 요한 계시록 등인데, 사순절 넷째 주일인 오늘 주어진 서신의 말씀인 에베소서도 영지주의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당시 소아시아 교회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2. 에베소 교회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공동체였습니다. 바울은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전과 지금’, ‘어둠과 빛’으로 구별하면서,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의 빛이니, 빛의 자녀답게 살라’고 권면합니다(엡 5,8). 그들이 어둠 속에 있었을 때, 그들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엡 2,1-2). ‘그들은 자기 속에 있는 무지와 자기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엡 4,18). 그래서 지난날의 생활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고(엡 4,22), 수치의 감각을 잃고, 자기들의 몸을 방탕에 내맡기고 탐욕을 부리며 모든 더러운 일을 했던 것입니다(엡4,19).
그러나 지금 빛 가운데 있는 그들은, ‘마음의 영이 새로워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3-24)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고(엡 5,1), 선과 의와 진실이라는 빛의 열매를 맺습니다(엡 5,9). 그들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려고 노력하고(엡 5,1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사랑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엡 5,2).
그렇다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전과 지금’, ‘어둠과 빛’으로 구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요, 지혜를 찾는 그리스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보인 인물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셨지만(고전 1,22-23), 그러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4). 어둠 속 삶을 끝장내고, 빛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이라는 것이지요.
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나면서부터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을 보게 된 또 다른 인물을 요한복음서에서 만납니다. 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 그래서 거지가 되어 구걸로 연명하다가(요 9,8), 예수님의 치유를 받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요 9,1-41).
어느 날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러자 병은 죄의 결과라는 오래된 전통을 알고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요 9,2).
죄와 질병의 직접적인 인과관계에 대한 옛 이론이 예수님 시대에도 여전히 널리 퍼져있던 것이지요. 어른이 아프면 본인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지만, 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에 관한 문제는 사실 판단하기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이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5절부터 6절에 의하면,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 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출 20,5-6). 죄 값에 대한 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도 후손들에게까지 전해진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일부 랍비들은 부모의 죄는 아이에게 흔적을 남길 뿐만 아니라, 태아도 엄마의 태에서 죄를 범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 9,3).
병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픈 사람 본인의 죄의 결과도, 혹은 부모의 죄의 결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가서 씻자,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 이야기와(창 2,7) 악성 피부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의 치유 이야기를(왕하 5,1-14)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눈 먼 사람에게서 드러내시려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는 것입니다(요 9,39).
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은 치유하여 보게 하고, 날 때부터 본다고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사실은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치유입니다. 나면서부터 눈이 먼 장애를 가지고 있고, 거지가 되어 구걸로 연명한다는 요한의 증언은 그가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본인만이 아니라, 그것이 조상들의 죄의 결과라는 종교적, 사회적 낙인은 그의 부모와 조상들도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종교적 편견, 사회적 차별과 배제에 의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유하여, 일상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눈먼 사람에게서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서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먼저 주목할 것은 이 치유사건을 두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에 시비를 건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한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분이 누구신지에 관심하지 않고, 안식일을 어긴 예수님에 대한 비난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물론 사람의 생명이 위험에 빠졌을 때에는 안식일에도 사람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 먼 걸인은 생명의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사람의 치유를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까지 미루어야 했다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매우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안식일에 금지된 39개 행위 가운데, 반죽하는 행위가 들어 있는데, 예수님은 침으로 흙을 이겨 진흙을 만들었고, 안식일에 눈에 무엇을 바르거나, 침을 뱉어서는 안 되는데 그런 일을 했으니, 명백하게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규정을 엄격하게 지켰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것은 그들의 전통에 따르면 정당한 행위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요 9,39)고 말씀하십니다. 흥분한 바리새파 사람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반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요 9,41)고 받아치십니다.
나면서부터 보지 못하는 이 사람은 장애 때문에, 비록 앉아서 사람들에게 구걸하면서 살고 있지만, 세상의 빛이신(요 95)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점차 눈이 열리면서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깨달아 가는 동안, 바리새파 사람들은 점점 더 완고해지면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대조가 극명합니다. 눈이 멀어 보지 못했던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세 차례나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오히려 무지의 심연에 더 깊이 빠져들면서 세 차례나 예수님을 안다고 단언합니다. 처음에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하나님에서 온 사람이 아니다’고 주장하다가(요 9,16),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요 9,24), 마침내 그 사람은 모세의 제자가 아니라고 합니다(요 9,28-29).
무엇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눈을 막았을까요? 눈은 떴지만 보지 못하게 그들의 눈을 가로막은 것은 무엇일까요?
이제 죄가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나면서부터 눈이 먼 것이 죄가 아니라, 빛과 대면하고도 빛을 보기를 거부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불신앙으로 태어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도 믿기를 거부하는데 있는 것이지요. 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보지 못하는 그들이야말로 진짜 장애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첫 번째 장애는 무엇보다 그들의 종교적 전통이었습니다. 병을 징벌적 심판의 관점에서 보는 유대교 전통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 먼 걸인의 고통을 보지 못하고, 그 자신의 죄 혹은 조상의 죄를 먼저 보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요한은 이 시각 장애인의 고통은 그의 부모나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은혜의 사건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두 번째 장애는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아 상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유대 민족 전체를 정의하는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고백되고, 그 메시아가 유대의 인종적, 종교적 경계선을 넘어서도록 요청했을 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런 변화를 받아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믿어왔고, 지켜온 신앙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요한은 그런 유대인들이 빛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서 사는 것을 선택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들이 준수하는 종교적 전통에 눈이 멀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거부했기에, 여전히 어둠의 자녀로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빛과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 그들이 정말로 눈 먼 사람들이라면, 그들에게는 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본다고 하면서도 정작 보아야 할 것은 보지 않는 데 있는 것입니다. 유대 전통주의자들이 과거로부터 벗어나 예수님이 주시는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없었던 것은, 어둠 속에서의 삶, 과거의 종교가 주는 안전함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파 사람들이 옛 종교적 전통이라는 어둠에 사로잡혀 빛 가운데로 나아가지 못했다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왕권 강화에 대한 욕망이라는 어둠 속에서 빛을 잃은 비극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사울은 열두 지파 가운데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인물입니다. 사울은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선 인물이 결코 아닙니다. 사울이 사무엘 선지자의 지명과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사울이 암몬 족속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삼상 11장), 이전의 사사들과 마찬가지로 카리스마적 자질을 드러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속한 베냐민 지파가 가장 작은 지파여서, 다른 지파들의 질시가 거의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결정적인 원인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라고 지시하신데 있습니다(삼상 9,16).
사울은 비극적인, 그러나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준수한 외모를 가졌고, 겸손했으며, 자신의 전성기에도 도량이 넓고 기꺼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기도 했으며, 언제나 대담하고 용감했지만,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던 정서 불안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흥분하여 격노하기 일쑤인 변덕스러운 성미 때문에, 압박감을 느끼면 암울한 기분에 빠졌다가, 잠시 평정을 되찾는 상태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정신이 시계추처럼 흔들렸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랬는지, 후에 병을 얻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정신병은 사울의 삶에 드리운 짙은 어둠이었습니다. 그의 병은 자신을 다윗과 비교하면서 더욱 심화됩니다. 다윗이 블레셋 대장 골리앗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 백성은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 만 명을 죽였다.’고 환호합니다. 백성의 노래와 환호에 화가 치밀어 오른 사울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만을 돌렸으니, 이제 그에게 더 돌아갈 것은 이 왕의 자리밖에 없겠군!’하고 투덜거립니다(삼상 18,7-8). 그 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의심하기 시작했고, 악한 영이 그를 덮치자, 미친 듯이 헛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심지어 친구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 사울에게 항의하는 아들 요나단을 찔러 죽이려고 사울은 창을 뽑아 겨냥하기도 했습니다(삼상 20,32-33). 비교와 질투, 시기심으로 갈수록 심화되는 사울의 조울병 증세는 그 무엇보다 짙은 어둠을 그의 삶에 남긴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평생을 전쟁 속에서 카리스마적 자질을 극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무서운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선지자 사무엘과의 불화도 그에게 크게 불리했습니다. 두 사람의 불화는 사무엘을 기다리다 못해 사울이 스스로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가져다가 번제를 올린 것이 발단이었습니다(삼상 13,8-9). 사울이 제사장 직무를 남용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새로운 체제가 옛 체제의 유지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 제사장 사무엘과 왕으로서 좀 더 폭넓은 권한을 가지려고 했던 사울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공공연하게 사울의 지명을 취소했고, 이런 조치는 사울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사울의 비극적인 삶에 가장 깊은 어둠을 남긴 것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사울이 다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버리셨을까요?(삼상 16,1).
사무엘기 상은 사울 왕이 아말렉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그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약탈하는 데만 마음을 쏟아, 전리품을 챙긴 것이 원인이라고 증언합니다(삼상 15,18-19). 전투에 나간 부하 군인들이 강력하게 약탈을 원했고, 그들의 청을 듣지 않을 경우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울 왕은 군인들이 하자는 대로 하였다는 것입니다(삼상 15,24). 격분한 사무엘, 사울을 매몰차게 꾸짖습니다. 사울 때문에 마음이 상한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다시는 사울을 만나지 않았고, 주님께서도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합니다(삼상 15,35). 마침내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길보아 산 전투에서 세 아들들과 부하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합니다(삼상 31,6).
사울 왕은 하나님이 선택하셨다가 하나님이 버리신 비극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려고 원하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왕이 된 사람, 종교권력과 정치권력 사이에서, 말씀과 현실 사이의 긴장과 갈등 속에서, 욕망 때문에 정권과 현실을 선택하여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조울병 환자, 이것이 사울이라는 인물의 삶에 드리운 어둠이었습니다.
5.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 위에 드리운 빛과 어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지주의가 주장하듯이, 빛과 어둠은 이원론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은 빛의 자녀이고, 악한 사람은 어둠의 자녀라고 칼로 무를 베듯이 그렇게 나눌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수도, 빛에서 어둠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성경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분 안에 있을 때 가능하다고 증언합니다. 이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볼 수 없던, 그러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 보게 된 사람이 될지, 나면서부터 보기는 하는데, 정작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는 사람이 되어 눈 뜬 맹인(盲人)이 될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빛이신 주님은 모든 사람을 빛으로 초대하십니다. 그 초대에 응하는 사람은 빛 안에 있지만, 거부하는 사람은 여전히 어둠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하는 심판입니다. 심판은 죽음 이후나, 역사의 종말로 유예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한은 빛 가운데 있지 않은 현재, 어둠 속에 있는 현실,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기에 늦은 때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에 ‘아멘!’ 하는 것, 그리고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빛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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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 | 2025-04-27 | 부활절 둘째 주일 | 복음의 대가 | 임영섭 목사 |
1290 | 2025-04-20 | 부활주일 | 문을 열고 벽을 허물고 | 임영섭 목사 |
1289 | 2025-04-13 | 종려주일 | 장애를 가진 하나님 | 임영섭 목사 |
1288 | 2025-04-06 | 사순절 다섯째 주일 | 이웃을 위한 향유 | 임영섭 목사 |
1287 | 2025-03-30 | 사순절 넷째 주일 |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 | 임영섭 목사 |
1286 | 2025-03-23 | 사순절 셋째 주일 | 새 이스라엘의 사명 | 임영섭 목사 |
1285 | 2025-03-16 | 사순절 둘째 주일 | 전력을 다한 달음질 | 임영섭 목사 |
1284 | 2025-03-09 | 사순절 첫째 주일 |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임영섭 목사 |
1283 | 2025-03-02 | 주현절 여덟째 주일 | 산 아래로 내려가라 | 임영섭 목사 |
1282 | 2025-02-23 | 주현절 일곱째 주일 | 하나님이 나를 앞서서 보내셨다 | 임영섭 목사 |
1281 | 2025-02-16 | 주현절 여섯째 주일 |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 | 임영섭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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