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첫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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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친히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
성경구절 이사야서 63:7-9/ 히브리서 2:10-18/ 마태복음서 2:13-23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9-12-29
전주 지난해 주의 은총에 감사하나이다(J. S. Bach)
찬양1부 하나님께 감사드리자(G. F. Händel)
지휘자 정록기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경배하며 감사 찬양(J. S. Bach)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예부터 도움 되신 주, 늘 보호하소서(W. Croft)
후주2부 예부터 도움 되신 주, 늘 보호하소서(W. Croft)
성경본문 이사야서 63:7-9
나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변함없는 사랑을 말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일로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푸신 은혜, 그의 긍휼과 그의 풍성한 자비를 따라서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크신 은총을 내가 전하렵니다.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그들은 나의 백성이며, 그들은 나를 속이지 않는 자녀들이다"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하게 하시지 않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하여 주시고, 옛적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2:10-18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께 속합니다. 그러하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내가 주님의 이름을 내 형제자매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주님을 찬미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또 "나는 그를 신뢰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보십시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서 2:13-23
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해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요셉이 일어나서, 밤 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그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슬피 우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헤롯이 죽은 뒤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꿈에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그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이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요셉은, 아켈라오가 그 아버지 헤롯을 이어서 유대 지방의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리 지방으로 물러가서,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았다. 이리하여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게 속았다고 생각한 헤롯 대왕은 몹시 노하여,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고 합니다. 당시 높은 영아 사망률을 고려하고, 베들레헴 전체 인구가 천 명이고, 평균 연간 출산률이 30명이라고 할 때,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들은 아마도 스무 명 남짓이었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추정합니다.

 

헤롯(주전 73-주전 4)은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미래의 잠재적 경쟁자로 생각되는 갓난아기들을 살해하는 것은 물론, 태어난 아기를 중심으로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정치적 소요를 아예 뿌리 뽑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 외에도 헤롯의 잔인함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작, ‘유대전쟁사에서 헤롯의 재위 말년을 그의 잔혹한 행위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기록했습니다. 헤롯은 통제 불능의 분노에 휩싸여 자기 자신의 세 자녀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반드시 애통해 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망 소식이 들리면 저명한 정치적 죄수들을 여리고에 있는 경기장에서 죽이라고 지시한 인물입니다.

 

헤롯이 한편으로는 철권통치로 잔혹하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황제에게 충성과 조공을 통해 권력기반을 든든히 지키려고 했던 것은 그가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입니다. 헤롯은 에돔 출신으로 선조가 개종하여 유대인이 된 이른바 반쪽짜리 유대인이었습니다.

 

에돔 출신인 헤롯이 기원전 47년 율리우스 케사르에 의해 유대 총독으로 임명된 부친 안티파스 2세로부터 갈릴리 총독자리를 물려받았을 때, 그는 25살이었습니다. 그러나 7년 후, 주전 40, 32살의 나이에 그는 뛰어난 정치력과 외교술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헤롯은 지중해 연안에 항구도시를 만들어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가이사랴라고 칭했고, 헬레니즘 양식의 극장과 원형 경기장을 세우는 등 활발한 건축 사업도 벌렸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하스몬 왕가의 딸 미리암네와 전략 결혼을 했지만, 왕권을 노린다는 이유로, 처남인 아리스토불루스, 할아버지, 장모, 미리암네의 두 아들, 마침내 미리암네 자신도 처형하는 잔혹함을 보였습니다.

 

마태는 헤롯의 유아 학살을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슬피 우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2,17-18).

 

예레미야서 3115절이 언급하는 지역, 라마는 야곱의 아내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라헬은 야곱의 외삼촌 라반의 둘째 딸로서, 그녀를 아내로 맞으려고 칠 년 동안을 일을 했지만, 칠 년이라는 세월이 마치 며칠같이 느껴졌다고 할 정도로 야곱이 사랑했던 여인입니다(29,20). 그런데 그 라헬이 아기를 낳느라고 산고에 시달리다가 숨을 거둔 것입니다. 라헬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자기가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내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35,16-20).

 

마태는 헤롯의 유아 학살을 아들을 낳고 숨을 거두어야 했던 라헬의 슬픔에 빗댄 것이지요. 이로써 아기 예수님은 태어나시면서부터 자식을 잃은 모든 어머니들의 슬픔, 어머니를 잃은 모든 자식의 슬픔을 대신 짊어지신 분이 되셨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이들의 슬픔, 아니 위로받기를 거부하는 이들의 한()을 스스로 짊어지심으로써, 죽제 서남동 목사가 말한 한의 사제가 되신 것이지요.

 

그러나 예언자 예레미야가 자녀들을 위한 라헬의 통곡을 통해 은유적으로 암시하는 것은 아마도 주전 722-721, 앗수르에 의해 북왕국 지파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간 사건일 것입니다. 북왕국의 주요 지파들(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베냐민 지파와 함께 라헬의 후손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갓 태어난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야 했던 어머니의 슬픔이건, 자식들이 외국의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슬픔이건, 모두 강요된 이별의 슬픔입니다. 예수님은 이집트로의 피난과 헤롯의 유아 학살 사건의 중심에 계심으로써, 강제로 헤어져야 하는 모든 이산가족의 슬픔을 대신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얽힌 또 다른 장소는 베들레헴입니다. ‘이라는 뜻의 벧트와 떡이라는 뜻의 레헴이 합하여 떡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해발 777미터의 산악지대이고, 다윗 왕의 고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베들레헴으로 설정된 것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예언을 성취한 사건임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오히려 떡집이라는 마을 이름의 뜻이 더 상징적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가 먹는 것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때 악마의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빵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4,3). 세례자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은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겼던지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보아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11,18-19)라고 비난했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서 먹은 일(12,1-8)에서부터, 결혼잔치에서 술이 떨어지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요한 2,1-11),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에서 겨자씨(4,26-29), 누룩 등이 등장하는 것부터,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르기까지,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일은 예수님의 짧은 공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일의 하나, 아니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6,41; 6,48)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6,5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세상 끝까지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고 새로운 약속을 축하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절망한 제자들이 엠마오로 가던 길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낯선 분이 부활한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가, 그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눌 때, 비로소 그 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24,30-31).

그렇습니다. ‘떡집에서 태어나신 분답게,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나누어 주신 것이지요. 다른 사람을 잘 먹어치우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는 세상에서, 기꺼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나누신 분, 그 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중요한 또 다른 장소는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은 아기를 노리던 자들이 죽은 후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아기 예수님의 가족이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통치하는 유대 지방으로 가기가 두려워, 갈릴리 지방으로 가면서 선택한 동네 이름입니다. 헤롯이 주전 4년에 죽은 후, 그의 세 아들들이 유대를 분할 통치하였는데, 그 가운데 아켈라오가 가장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은 헤롯 아켈라오에게, 나사렛이 자리 잡고 있는 갈릴리 지역과 베레아 지역은 헤롯 안디바에게, 요단 강 동편 중 북쪽 가울라니투스(Gaulanitus) 지역은 헤롯 빌립에게 맡겼고, 요단 강 동편 남쪽 데가볼리 지역은 로마의 시리아 총독이 직접 통치하게 했는데, 그들 가운데 헤롯 아켈라오가 가장 잔혹하고 억압적인 통치를 했습니다. 아켈라오가 분봉왕이 되는 것을 항의하기 위해 로마로 갔던 유대 대표들이 그가 삼천 명의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 지위에 올랐다고 진술한 것이나, 주후 6년에 로마에 의해 폐위되어, 헤롯 대왕을 이은 세 명의 상속자들 가운데 가장 짧게 재위한 것으로 보아 그의 잔혹성이 얼마나 참을 수 없을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부모는 헤롯 아켈라오를 피해 나사렛으로 이주함으로써, 예수님이 후에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예언의 성취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나사렛은 하부 갈릴리 지방에 있는 도시로서 서쪽의 지중해와 동쪽의 갈릴리 바다 사이의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동쪽과 북쪽에 가파른 언덕이, 서쪽에는 488미터에 달하는 높은 산이 있고, 단지 남쪽만 열려 있는 분지에 자리 잡은 고립된 도시였습니다. 삼면이 높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던 나사렛은 주요 도로와도 떨어져 있어, 역사적으로도 구약성경은 물론 외경이나 다른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도시였습니다. 동북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곳에 갈릴리 가나가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역시 6km 정도 떨어진 곳에 당시 갈릴리의 주도 중 하나인 세포리스(Sepphoris)가 있습니다.

 

주후 6, 로마의 아구스투스 황제가 아켈라오 분봉왕을 해임하고 수리아 총독 구례뇨가 그의 지역을 관할하게 했던 해, 갈릴리의 유대라는 인물이 이끄는 열심당’(첼롯파)의 반란이 세포리스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구레뇨 총독은 곧바로 로마군 2개 군단(한 개 군단은 5천 명의 군인들로 구성)4개 기병대를 추가로 파병하여 반란을 진압한 후 세포리스로 들어가는 가로의 양쪽에 2,000개의 십자가를 세웠다고 유대 고대사를 쓴 요세푸스는 증언했습니다. 주전 71년 노예반란을 일으켰던 스파르타쿠스와 그 추종자들 6,000명을 로마로 들어가는 아피아 가도에 세운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세포리스에서 갑자기 2,000개의 십자가를 제작할 때 인근의 목수가 모두 동원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세포리스에서 가까운 나사렛의 목수 요셉도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열 살 된 소년이었을 예수님도 세포리스에서의 반란과 십자가 처형 이야기를 들었지 않았을까요.

 

예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린 것은 물론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나사렛이 가지를 뜻하는 히브리어 네체르에서 나와서 이사야의 예언인(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를 암시함으로써,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다는 예언의 성취로 이해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나사렛을 지키다, 지켜보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차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 나사렛의 지리적 특징을 표현하여 망대또는 지키는 장소로 해석합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나사렛 사람’(2:23)의 그리스어 나조라이오스보존된 자, 보호된 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초르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된 사람이라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2.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한결같이 옛 예언의 성취로 해석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마태는 그렇다면 그것으로써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 곧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그 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신 하나님은 인간이 되신 신’,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신이 된 인간도 아니고, ‘불멸의 존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 인간과 세계의 역사와 무관한 천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자기 백성이 고난을 받을 때에 친히 함께 고난을 받으신 분,’ ‘천사를 보내셔서 구하게 하시지 않고, 친히 그들을 구해주신 분입니다(63,9).

 

마태는 헤롯의 유아 학살 사건을 라마와 결부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의 삶의 처음부터, 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특징이었던 방랑의 운명을 예고한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리 저리 장소를 옮겨가면서 살아야 했던 아기 예수님은, 그리하여 모든 집 없는 사람들의 영원한 집이 되셨고,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는 모든 이들의 영원한 고향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인이 되신 후, 공생애 활동에 의해서 비로소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태어나시면서부터 임마누엘,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예수님은 태어나시면서부터 떠돌아다니는 난민생활을 강요받으셨고, 자식을 잃은 모든 어머니의 슬픔을 온 몸에 짊어지셨고, 세상의 공격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하심으로써, 친히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은 인간을 도우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구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오셔서,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셨다고 증언합니다(2,14-15). 그리스도는 모든 점에서 인간과 같아지셔야만 했는데, 그것은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함으로써, 시험받는 모든 사람을 돕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2,17-18).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보지, 신이 된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신은 인간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불멸의 신이 필멸의 인간처럼 피와 살을 가진 존재일 수 없습니다. 신은 절대자로서만, 전적인 타자로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물질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는 영지주의적 사고가 널리 퍼져있던 당시에, 히브리서 기자의 이런 생각은 혁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의 역사와 인간성에 얽매이고, 시험과 고난과 죽음에 얽매이신 분입니다. 스스로 인간의 피와 살을 가진 존재가 되신 분이지요. 그렇습니다. 육신이 되신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시험받고 고난당하는 모든 인간의 희망이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오히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분, 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분만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처럼 됨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온전히 인간일 때, 참으로 인간적일 때, 비로소, 구원의 희망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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