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열셋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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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의 것
성경구절 다니엘서 7:13-14/ 요한계시록 1:5-8/ 요한복음서 18:33-37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18-11-25
전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D. Buxtehude)
찬양1부 내 목자는 사랑의 왕(H. R. Shelley)
지휘자 김홍태 집사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영광 노래 부르자(Eugene Butler)
지휘자 김선아 집사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나라와 권세와 영광, 영원히 있나이다(F. Mendelssohn)
후주2부 주 예수 이름 높이어(A. Jordan)
성경본문 다니엘서 7:13-14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옛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5-8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이시요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나라가 되게 하시어 자기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른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서 18:33-37
빌라도가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를 불러내서 물었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하는 그 말은 당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말하여 준 것이오?" 빌라도가 말하였다. "내가 유대 사람이란 말이오? 당신의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겨주었소.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빌라도가 예수께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1. 성경 가운데 가장 난해한 성경의 하나인 다니엘서의 최종형태는 주전 167년부터 164년 혹은 주전 169년부터 164년까지의 기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좀 더 오래된 부분, 곧 다니엘서 1장부터 6장까지는 페르시아 시대 말기와 헬레니즘 시대 초기에 형성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다니엘서가 포괄하고 있는 역사적 배경에는 네 마리 짐승 환상이 나타내는 것처럼, 유다 백성이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인 바빌론(Babylon, BC2300-BC539), 곰과 같은 메대(Mede, BC727-BC549), 머리가 네 개이고 날개달린 표범인 페르시아(Persia, BC550-BC330), 넷째 짐승으로 상징된 알렉산더 대왕BC356-BC323)의 마케도니아 왕국(Macedonians) 등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가혹한 지배를 받던 역사가 놓여 있습니다. 

특별히 다니엘서 7장의 배경은 네 짐승들 가운데, 넷째 짐승, ‘사납고, 무섭게 생겼으며, 힘이 아주 세었는데, 쇠로 된 큰 이빨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먹이를 잡아먹고, 으스러뜨리며, 먹고 남은 것은 발로 짓밟아 버린 짐승’(단 7,7) ‘뿔을 열 개나 달고 있었는데, 새로 돋아난 뿔이 그 가운데 세 개의 뿔들을 뿌리째 뽑아내고, 사람의 눈을 가지고, 입이 있어서 거만하게 떠드는 뿔’(단 7,8), 곧 마케도니아 왕국의 셀류커스 왕조의 설립자인 셀류커스 니카토르(Seleucus Nicator, BC305-BC281)로부터 시작하여,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Antiochus IV Epiphanes, BC215-BC164)에 이르는 열 명의 왕들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 돋아난 뿔은 열 명의 계승된 지배자들 가운데 세 명의 지배자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재위기간 BC175-BC164)를 상징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뿔에 달린 눈, 오만한 입’으로 상징되는 왕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는 헬레니즘으로 자신의 왕국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의 일부에게 한편으로, 헬레니즘은 성공의 기회였지만, 다른 한편, 옛 날의 믿음과 관습을 유지하려고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습니다. 이 두 유대인 집단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격화되기 시작하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헬레니즘에로의 동화를 거부한 유대인들을 혹독하게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헬레니즘에로의 동화냐 거부냐는 하나님께 대적해야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 편에 서야 하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막다른 선택으로 몰고 갔습니다. 

전통을 충실하게 지키려고 했던 유대인들은 죽음으로 저항했고,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주전 167년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22,000명의 병력을 동원, 안식일에는 유대인들이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악용하여, 예루살렘 성을 공격, 살육, 방화, 약탈하고 어린이와 여자들은 노예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모든 절기축제와 율법을 금지시켰고,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쳐, 성전과 유대인들을 모독했지요. 그런 상황이 다니엘서 11장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의 군대가 성전의 요새를 더럽히고,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없애고, 흉측한 파괴자의 우상을 그 곳에 세울 것이다.... 지혜 있는 지도자들 가운데 얼마가 칼에 쓰러지고, 화형을 당하고, 사로잡히고, 약탈을 당할 것이다.”(단 11,31-33). 

바로 이런 상황이 다니엘서의 배경입니다. 그렇다면 꿈꾸는 젊은 예언자, 다니엘은 누구였을까요? 우리는 다니엘서 외에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니엘서에 따르면 다니엘은 유다 왕 여호야김 재위 3년,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포로로 끌려간 왕과 귀족의 자손들 가운데 한 소년이었습니다. ‘몸에 흠이 없고, 용모가 잘 생기고, 모든 일을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으며, 지식이 있고, 통찰력이 있고, 왕궁에서 왕을 모실 능력이 있는 소년들 가운데 뽑혀 바빌로니아의 언어와 문학을 3년 동안 공부한 소년,’(단 1,3-4). 문학과 학문에 능통하였으나, 특별히 환상과 온갖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그가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년(단 1,17)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왕이 내린 음식과 포도주를 거부하고, 물과 채소만 먹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우리는 다니엘이 서기관이며 학자였고, 헬레니즘과의 일체의 타협을 거부했던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뜻의 집단인 하시딤(Hasidians)에 속했던 인물이었으리라고 추정합니다. 이들은 주전 2세기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게 저항했던 마카베오 혁명(BC 164년 겨울에 예루살렘 성전 정화)이 본질적으로 세속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을 때까지는 유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청년 묵시문학가 다니엘이 목숨을 걸고, 당대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던 헬레니즘과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게 저항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30일 동안 다리우스 왕 외에는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간구하는 사람은 사자 굴에 넣기로 한 칙령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늘 하듯이 하루에 세 번씩 그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를 드린 것’(단 6,10)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다니엘이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역사를 자신이 정한 종말을 향해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은 자기편에 선 사람들과 하나님께 대적한 사람들을 구분하는 심판을 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한 짐승 같은 폭압적 권력자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뭉그러뜨려 타는 불에 던진 후, 비로소 시작되는 심판은 권력자들에게는 역사의 종말이지만, ‘기억의 책’에 이름이 기록된 이들에게는(단 7,10) 하나님의 역사가 완성되는 때라는 것이지요. 이런 믿음,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했던 채식과 기도에 철저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일상에서 단 하나라도 신앙과 관계된 자기 자신만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할 결정적 순간의 결단에 힘이 된다는 것을 우리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다니엘 이야기는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와 자주 비교됩니다. 이는 이 두 사람 모두 해몽의 능력으로 외국의 왕궁에서 중책을 담당하였고, 이방 통치자들로부터 자기들의 종교를 인정받게 되었다는 민족적, 종교적 자긍심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사에 포함되어 있는데 반해, 다니엘 이야기는 하나님의 승리를 수반하는 역사의 종말에 대한 약속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작은 차이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땅의 사건들을 향한 하늘의 급진적인 개입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제국들을 심판하시고, 권세를 빼앗고, 멸망시키시며,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환상을 봅니다.(단 7,26-28). 그리고 그 환상으로 헬레니즘에로의 동화를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박해를 받는 유대 민족을 위로했던 것이지요. 

다니엘서를 이어, 신약성경 시대에 묵시문학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요한 계시록의 저자입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요한 계시록의 저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시고(계 1,5),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며(계 1,6), 그 분만이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도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계 1,8)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한 증인’으로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주님’을,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로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올리움을 받은 주님’을 봄으로써(계 1,5), 예수 그리스도의 세 인격을 표현했습니다. 또한 자기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직분을 주시고, 마지막 때에 ‘구름을 타고 오셔서’ 우리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분으로서의 세가지 직분을 예언하면서(계 1,5-8), 악마에 대한 불의 심판과(계 20,10)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계 21,2). 


2.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다니엘은 세상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들이 자기 조국 유대를 섬기고 복종하는 환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마카베오의 저항과 독립운동이 성과를 거두고 일정 기간 동안 하스몬 왕조를 수립하기는 했으나, 기원전 67년, 하스몬 왕가의 계승 투쟁에 개입한 폼페이우스가 유대 왕국을 공납국으로 만들어 유대왕국은 다시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했습니다. 그 후, 유배지 밧모섬에서 로마 제국의 박해가 끝나는 미래를 꿈꾸었던 요한도 결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지상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비전과 고백, 곧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역사를 심판하시며, 종말로 인도하신다는 주장은 전혀 비현실적이고, 그리스도인들의 아전인수식 역사해석이란 말일까요?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힘 있는 강대국들이 지배하고 있고, 그들이야말로 이 땅 위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독점하고 있는 통치자들인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은 자기기만이거나, 독단적인 선언이 아닐까요? 

정당한 비판이자 회의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역사,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역사의 주인은 여전히 군사, 경제 대국이지 하나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해석될만한 사건들이 있지만, 결국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전쟁이나 자연적 재난이지,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의 역사개입과 심판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리 역사는 해석의 문제라고 하지만, 역사를 하나님의 약속과 해방, 심판과 구원사의 틀에서 보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인들의 자의적 해석이라는 것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먼저 성경의 묵시문학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묵시문학, ‘아포칼립스’(Apocalypse)는 ‘드러내다, 열다, 뚜껑을 열다’는 뜻에서 온 것입니다. 비록 묵시문학이 미래의 일을 이미지와 상징 언어로 예시하는 형식을 취하기는 하지만, 그 미래는 언제나 ‘현재적 미래’, ‘현재가 극복된 미래’입니다. 현재와 관계없는 미래는 없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 없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수 없고, 눈물과 죽음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고통이 극복되지 않는 미래는 요한 계시록이 말하는 미래가 아닙니다(계 21,4). 


3.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란 말일까요?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라고 물었습니다. 무슨 죄로 이곳까지 끌려왔는지 심문하지도 않고, 곧바로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하고 물은 것은 아마도 그가 들은 소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칭하면서 백성을 현혹하고, 식민지 종주국인 로마 제국에 폭동을 선동하는 자칭 메시아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예수도 그런 선동가들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빌라도의 답변으로 사실임이 드러납니다: “당신이 하는 그 말은 당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말하여 준 것이오?” 묻는 질문에 빌라도는 “내가 유대 사람이란 말이오?” 비아냥거립니다. 그는 로마 총독이고, 유대인은 왕이건 백성이건 그가 두려워하거나 존경해야 할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때,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8,36). 영어 성경은 ‘My Kingdom is not from this world’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의 나라, 오직 군사력과 경제력에 의해 서열이 정해지고, 폭력에 의해 평화가 유지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그리고 그런 제국의 식민지 국가가 자기가 꿈꾸고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 서 있는 초라한 죄인, 나라와 군대는커녕, 추종자도 없어 보이는 이 청년이 생각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몰라도, 자기 나라에 대해 말하니, 빌라도는 다시 물은 것 아닐까요: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 두 번째 같은 질문은 첫 번째 질문보다 훨씬 더 냉소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요 18,37). 

세상의 왕은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곧 진리라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모두 정당하고, 자기가 하는 말은 모두 진리라는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세상의 왕은 필요하면 얼마든지 거짓 뉴스를 생산해내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잘못된 길로 가게 합니다. 그는 명령할 뿐, 증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필요하면 얼마든지 사람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권력자입니다. 세상에 속한 나라에서는 돈이 모든 가치의 최종 판단기준입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나라, 돈 되는 일이면 사람 목숨도 해치고, 인격도 유린하고, 자연과 생태계를 무한 파괴하고 착취하는 나라가 세상에 속한 나라입니다. 교사가 자기 딸들 성적을 위해 시험지를 훔치는 나라, 단 돈 몇 백 원 때문에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사람을 죽이는 나라, 조금의 이권도 양보할 수 없어 타협이 불가능한 나라,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억지주장이 통하는 나라, 입만 열면 정의를 외치지만 정작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나라, 국익보다 사익을 추구하는 공직자들이 더 잘 나가는 나라, 갈등이 극단적 증오와 대결로 치닫는 나라, 그래도 양심의 마지막 보루라는 사법과 종교마저 신뢰를 상실한 나라, 그런 나라가 세상에 속한 나라, 세상으로부터 나온 나라이지요. 

그래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이기에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실 수 있었을까요? 하늘 저편에 있어서?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여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큰 소리로 외쳐 불렀던 복음성가 ‘믿음으로 가는 나라’, 아시지요? 아마 여러분 모두 다 잘 아시겠지만,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벼슬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그 나라는 믿음으로만 가는 나라라는 점에서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여권과 비자가 없어도, 힘과 돈이 없어도, 지식과 권세가 없어도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에 세상 나라와 다른 것이지요. 그러면 그 나라는 어떤 믿음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을까요? 

역사의 주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심판자이신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믿음 아니고 무슨 믿음이겠습니까!(히 12,23).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도, 최후의 승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믿음 아니고 어떤 믿음이겠습니까!(고전 15,55-57).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믿음 아니고 어떤 믿음이겠습니까!(시 73,1). 악인은 그 악함 때문에 끝내 죽음을 맞고, 의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 아니고 무슨 믿음이겠습니까!(시 34,21). 

우리는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문장을 알고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놀랍게도 우리는 주님의 기도가 정치적이고(나라), 경제적이고(권세), 사회적인(영광) 기도로 마무리되는 것을 봅니다. 이 기도가 바쳐질 때마다, 이 기도가 올려지는 곳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최고 권력자에게 집중된 세상 나라의 권세자들은 당연히 긴장할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도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그들에게 잠시 주어질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소유한 권세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세상이 제안하는 헛된 권세와 영광에 고개를 흔들며,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 것들은 한 순간에 사라질 것이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것임을 증언하는 믿음의 증인들이 구름 떼와 같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히 12,1). 

또한 이 기도는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있는 권세자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합니다. 이 기도를 바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셨고, 그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이미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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