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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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이사야서 11:1-9/ 히브리서 1:1-3/ 요한복음서 1:6-13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0-12-25 |
성경본문 |
이사야서 11:1-9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3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그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요한복음서 1:6-13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 사람은 그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
이사야서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장부터 39장까지, 40장부터 55장까지, 그리고 56장부터 66장까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세 부분이 반영하는 시대적 배경이 서로 다르고, 저자가 다르기 때문에 편의상 나눈 것입니다. 1장부터 39장까지의 저자는 주전 8세기, 앗수르 제국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병탄당한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 이사야로, 40장부터 55장까지의 저자는 주전 6세기 바벨론 제국의 침략과 포로기,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 시기의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 제2이사야로, 그리고 56장부터 66장까지, 곧 바벨론 포로기가 끝날 무렵에 활동한 예언자를 제3이사야로 이름 붙인 것이지요.
예언자 이사야는 예루살렘 상류계층인 아모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사 1,1). 역대하 26장 22절과 32장 32절이 이사야를 웃시야 왕과 히스기야 왕의 서기관이었다고 기록한 것은 신빙성 있는 역사적 증거입니다.
통일군주 다윗과 솔로몬이 이룩한 이스라엘은 80년간(주전 1000년-주전 920년) 안정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과 그의 아들 르호보암 왕의 실정과 종교적 배교로 점차 쇠퇴하다가 마침내 주전 922년/921년 경,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되었습니다(왕상 11,1-13). 쇠퇴와 분열의 원인은 외국과의 정략결혼과 동맹정책, 지역 차별, 사치와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한 민심이반, 관료주의와 궁중 권력 정치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전 8세기, 북쪽의 앗수르 제국이 남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고 정복 전쟁에 나섰습니다. 앗수르의 군주인 디글랏빌레셀 3세는 이미 주전 740년/738년 경에 북시리아 지역의 소왕국들을 모두 정복했고, 시리아, 페니키아, 팔레스타인의 소왕국들도 차례로 강제로 병탄하여 무거운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했습니다(왕하 15,19-20). 앗수르는 주전 734년경, 마침내 팔레스타인에 진출했고, 심지어 이집트 국경까지 육박해 내려갔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가공할만한 군사적 팽창에 작은 왕국들이 저항했으나, 모두 잔혹하게 진압되었습니다.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이 주도하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 일어났는데(주전 734년-주전 733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형제국인 남왕국 유다에게 반앗수르 연합전선에 동참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거부하면 형제국인 북왕국 이스라엘이 공격할 것이고, 연합전선에 가담했다가는 자칫 앗수르 제국에 의해 보복당할 것이 두렵기 때문이었지요.
바로 이런 상황에 예언자 이사야가 등장합니다. 이사야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북왕국 이스라엘의 연합전선 구축 요청에 응하지도 말고, 앗수르 제국에게 원군을 요청하지도 말라고 권고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도우심을 믿고, 외국 군대의 힘에 의지하지 말라고 한 것이지요. 그러나 아하스 왕은 이사야의 충고를 거부하고,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놀란 이사야는 앗수르 제국이 유다의 해방자로 출병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정복자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들을 쏟아냅니다(사 7,18-25; 8,1-10).
마침내 디글랏빌레셀 3세는 아람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북이스라엘의 북부 지역을 앗수르 제국의 속주로 병탄시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 베가는 막대한 조공을 지불하고, 간신히 파멸의 운명을 면했지만(주전 732년), 베가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이 된 호세아는 그 후, 이집트 왕과 동맹을 맺고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에게 다시 저항했습니다(왕하 17,4). 격분한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는 곧바로 이스라엘을 침략, 3년 동안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했는데, 그의 아들 사르곤 2세가 마침내 주전 722년/721년, 사마리아를 함락시키고, 수많은 상류층 인사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불안한 것은 남왕국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다는 조공을 바치는 봉신국가 신분을 유지함으로써 겨우 앗수르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전 705년 앗수르의 왕 사르곤 2세가 죽자, 다시 팔레스타인 소왕국들의 봉기가 시작되었고,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이집트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고, 반(反) 앗수르 봉기의 선봉장이 됩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새로운 군주 산헤립은 주전 701년 정복 원정에 돌입했습니다. 파죽지세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한 산헤립은 마침내 유다를 포위하고, 히스기야 왕에게 조공 외에도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것과 항복을 강요했고, 히스기야는 곧바로 산헤립에게 굴복함으로써 겨우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는 참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바로 이 시기, 유다의 정치적 위기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고, 주전 740년부터 701년에 이르는 약 40년간 지속된 국가적 위기 속에서 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유다 왕실과 고통 받는 유다 백성과 함께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두 차례에 걸친 앗수르의 정복전쟁이 남긴(1차는 주전 732년부터 722/721년, 2차는 주전 701년) 역사의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야 했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 다윗과 같은 이상적인 왕, 메시아에 의해서 실현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 메시아는 공평과 평화의 왕국을 세울 것인데(사 9,6-7), 그 왕국은 앗수르의 야만적인 세계정복 질서에 대한 대안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자기 백성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시고, 침략자의 군화와 피 묻은 군복을 모두 불에 태울 것입니다(사 9,4-5). 그리고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은 큰 빛을 보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도 그 빛을 보면서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사 9,2-3).
그러나 예언자 이사야가 꿈꾸고 예언한 메시아의 나라는 앗수르의 파멸과 다윗 왕조의 재건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전쟁 자체가 없는 나라, 갈등 없는 세상, 모든 무기가 농기구가 되는 나라였습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사 2,4).
주변 강대국에 의해 자기 나라가 멸망해가는 것을 보면서도 이사야는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적의 파멸과 자기 민족의 회복을 넘어, 역사의 전적인 새로움을 꿈꾸었습니다. 메시아의 왕국에서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닙니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사 11,6-9a)고 노래한 것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사야의 이 말씀은 역사상 수많은 형태의 ‘유토피아니즘’, ‘평화사상’에 상상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이사야는 폐쇄적 민족주의를 넘어 국제주의로, 아니 국제주의를 넘어 지구적 차원의 평화, 자연과의 화해, 생태적 회복을 꿈꾼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회복, 더 많은 힘과 무기, 전쟁과 승리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할 때 성취된다고 합니다(사 11,9b).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다른 지식이 아닙니다. 오늘 인류가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 ‘기후위기’가 왜 발생했는지 몰라서, 바이러스와 생태계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파멸로 치닫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종의 역사에서도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그 어떤 다른 인간 종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특별히 지난 200년 전부터 축적된 지식으로 우리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왔습니다. 물론 인간의 지식이 만들어낸 재앙은 다른 지식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방관이 불을 냈다고 소방관이 불을 끄지 않는 것은 아니듯이, 인간의 지식이 만들어낸 지옥을 천국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지식입니다. 인간중심주의가 초래한 이 엄청난 재앙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지요. ‘호모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발 하라리도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에서, ‘겸손’을 그 하나로 제안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이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합니다.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새끼 염소가 어떻게 함께 살고, 함께 누울 수 있겠습니까! 사자와 송아지가 어떻게 함께 풀을 뜯는단 말입니까! 암소와 곰이 어떻게 서로 벗이 되며,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물리지 않고 손을 넣을 수 있단 말입니까!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비현실적인 현실성’이고, ‘불가능한 가능성’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믿음’이지요. 그리고 ‘믿음’은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그렇습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는, 우리들의 경험과 상식과 예측을 뛰어넘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도,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이야말로 ‘불가능한 가능성’입니다.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도 베들레헴 시골 마을에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단 말일까요!
그래서 요한복음서 저자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 것입니다(요 1,10). 전능하신 하나님이 기적과 권능이 아니라,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세상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다나엘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빌립에게 반문한 것입니다(요 1,46).
그러나 그를 알아보고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 합니다(요 1,12). 인간이 되신 하나님,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인간적 능력, 혈통이나 육정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판단을 뛰어넘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인 것이지요.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가능성의 현실을 깨닫지도, 경험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성탄절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불가능한 가능성의 실현이 아기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날이라는 것이지요. 베들레헴 촌, 여관에 방이 없어 구유에 누워있는 갓 난 아기가 세상의 권력자들을 두렵게 만들고, 금관도 홀도 없는데 평화의 왕이라 불리니, 이보다 더 큰 역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멸시받고 버림받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스스로 낮고 천한 자리로 내려가시고,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고,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고, 우리의 악함 때문에 상처를 받으시는 것이 과연 종교사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이 53,1-5).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하셨고, 그렇게 하시기 위해 아기 예수님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불가능한 가능성’, ‘비현실적인 현실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탄절의 비밀, 아니 성탄절의 신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절대자가 상대적 존재가 되고, 영이 몸이 된 날, 말씀이 육신이 된 날(요 1,14), 영원한 생명이 죽음 안에 들어온 날, 불멸의 존재가 필멸의 실존을 취한 날, 바로 이 날이 성탄절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기를 낮추심으로써,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는 사람들, 밑바닥까지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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