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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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성경구절 사도행전 10:34-36/ 골로새서 3:1-4/ 요한복음서 20:1-10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04-12
예배 주일
전주 주가 부활하셨다. 할렐루야(G. P. Palestrina)
찬양1부 하나님의 독생자(W. J. Gaither) 특송: 정록기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지휘자
반주자
후주1부 승리하셨도다 알렐루야(G. Young)
후주2부
성경본문 사도행전 10:34-36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골로새서 3:1-4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면,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20:1-10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이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 확진자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날부터(2020120) 82일이 되는 날입니다. 411일 현재, 우리나라의 확진자는 10,480, 사망자는 211명이었고, 전 세계적으로 누적 확진자는 160만 명, 사망자는 1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세계보건기구가 선언한 감염증의 세계적 대유행이 이전에도 두 차례 있었습니다. 1968년의 홍콩 독감과 2009년의 신종플루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세 번째 세계적 대유행으로 선언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는 그 빠른 감염 속도와 광범위함,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에서 파생되는 경기 침체와 사회불안, 양극화, 오래된 국가주의와 국수주의, 인종주의의 재현 등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정부의 노력과 국민의 헌신적인 참여와 인내로 위기를 잘 극복해가고 있어 세계의 주목과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일입니다.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구상하면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려는 노력과 실천이 여기저기에서 움트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입니다.

우리가 감염병의 위기 속에서, 주님 부활축일 예배를 비록 역사상 유래가 없는 온라인으로 함께 드리고 있지만, 죽임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기쁨으로 주님을 찬송하고, 길이요 진리인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1. 골로새는 오늘의 터키, 에베소에서 내륙 동쪽으로 약 160킬로미터 더 들어간 소아시아의 브루기아 주 계곡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수리아로 가는 무역로였기 때문에, 동서교통의 요충지이자 동서 문물의 교류가 활발했던 지역이었습니다. 루코스 강 유역의 경사진 초원은 양을 치기에 적합한 장소였고, 양털의 질도 좋아, 골로새는 양털 직물 생산으로 유명했습니다. 그 후 주변에 있던 라오디게아와 온천과 신비제의로 유명한 히에라폴리스가 급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떨어졌고, 바울 시대에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것은 주후 61년에 라오디게아 지역에 일어난 지진으로 골로새도 함께 파괴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라오디게아는 후에 복구되어 다시 번영했지만, 골로새는 그 후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의미 없는 작은 마을로 남게 되었다고 보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선교 활동을 할 때, 그리스도인이 된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졌습니다(1,7).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직접 그 사실을 언급합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에서만이 아니라, 그 주변 도시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에도 복음을 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고 바울은 크게 칭찬합니다(1,7: 4,13).

 

바울은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지방을 방문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으나 직접 방문하지는 못했습니다(2,1).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서 돌림편지를 보내, 골로새 성도들을 위협하는 사람들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고,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시련과 고난을)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도록’(1,10-11) 권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집단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골로새는 교역로에 위치해 있던 지리적 특성 때문에, 동서 문명은 물론 종교적으로도 다양한 종교적 제의들이 혼합되었습니다. 특히 풍요를 기원하는 대모신(大母神) 숭배가 널리 퍼져있었는데, ‘키벨레 제의라고도 불리는 이 축제는 열광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이 제의의 특징은 육체를 학대할 정도로 금욕주의적이었고, 심지어 육체를 훼손하는 고행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2,23).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널리 펴져있던 이런 사조를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하는 것이라는 합니다(2,8). 여기서 세상의 유치한 원리는 세상이 땅과 물과 공기와 불(에테르)’이라는 네 개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들이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헤라클리투스(Heraclitus of Ephesus, 주전 535-주전 475)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이 네 개의 원소들 상호간의 영원한 투쟁 때문에 세계는 언제나 몰락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후,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주전 493년경-주전 430년경) 이래, 인간은 숙명적인 원소들의 순환 속에 얽혀 있으며, 하나의 순환에서 다른 순환으로 쫓겨가고 따라서 오직 엄격한 금욕을 통해서만 그러한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엠페도클레스에게 매료되어 그에 대한 10권의 책을 썼고, ‘영웅전으로 유명한 플루타르크(Plurarchos, 주후 46-주후 120)는 원소들의 투쟁이 일어나는 세계를 () 아래에 있는 세계로 표현했고, 인간의 영혼은 죽은 후, 달 아래의 세계를 벗어나 먼저 달까지 승천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영혼이 여전히 지상적인 것을 가지고 있어서 충분히 순수하지 않다면, 그 영혼은 다시 원소들 속으로 하강합니다. 그 밖의 경우 영혼은 반()신적인 악령이 되어 사람들에게 구세주로 등장하며, 신탁의 장소에 내려와 신비 제의 속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Philon, 주전 25-?)은 이 영들을 천사들과 동일시하면서, 완전히 순화된 영혼들은 네 원소 가운데 최고의 원소인 불(에테르)까지, 곧 지복(至福)의 상태로 올라간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세계관에 스며있는 모티브들은 주전 1세기 피타고라스(주전569?-주전497?) 학파의 문헌 속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우주는 네 원소로부터 생성되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신적이며 위에 있는 원소는 에테르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지상적 영역은, 순수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위에 있는 세계와 대립된다. 순수한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땅과 바다를 벗어나 위에 있는 세계, 최상의 원소인 에테르로 인도된다. 그렇게 에테르로 인도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음식을 포기하고, 천사를 숭배해야 하며, 성교를 절제해야 한다(2,21).’ 모든 물질을 부정적인 것으로, 비물질적인 영혼의 방해물로 평가한 것이지요. 인간이 원소들을 통과하여 땅에서 물로, 물에서 공기로, 공기에서 일종의 불의 영역으로 점점 더 높이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인간은 모든 물질세계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에테르안에서 순수한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주전 1세기, 아시아와 그리스에 널리 퍼져있던 철학이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부활절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은 이런 지루한 철학 이야기를 굳이 길게 한 것은, 바로 이것이 골로새 교회의 철학적 배경이자, 동시에 사도 바울이 가졌던 부활신앙의 의미를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에 나타난 부활은, 결론을 앞서 말하면, 금욕을 통한 육체의 해탈, 혹은 영혼의 이데아 세계로의 상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극복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라는 말이지요.

 

2. 그런데 골로새 교회 안에는 이런 철학의 영향을 받아, 온전한 세계를 위에서 찾고’, 금욕을 세계 초월의 수단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처럼 고양될 수 있는 수단으로 간주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신성을 육체의 해탈에서 찾으려는 그들에게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2,9)고 합니다. 충만한 신성은 몸을 초극하거나 해탈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충만한 신성은 몸이 되어’, ‘몸 안에머물러 있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금욕이 꾸며낸 경건과 겸손과 몸을 학대하는 데는 지혜를 나타내 보이지만,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2,23)고 일축합니다. 바울은 몸을 열등하게 여기거나 억압해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육체의 학대가 아니라, ‘육체적이라는 개념으로 포괄되는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 곧 우상숭배의 극복입니다(3,5).

물론 사도 바울도 골로새 성도들에게 죄에서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성도들로서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고 권면합니다(3,1). 그러나 바울은 위에 있는 것들로 이른바 제4원소, 모든 것을 정화하고 순수하게 하는 불(에테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말로 어떤 종류의 세계 도피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위에 있는 세계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됩니다. 로마서 834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오른쪽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시편 1101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오른쪽은 원수들을 발판이 되게 하는주님의 권세와 지배를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만물은 네 원소로 구성되어 있고, 원소들 상호간의 투쟁을 통해 아래에서부터 위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바울은 주장합니다(1,16). 그러므로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삶은 육체의 극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로의 진입인 것입니다. 이로서 바울은 부활을 죽음의 극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이르고 빠름, 형태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생명은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죽음은 부활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부활의 반대말은 죄로 인한 죽음이고, 부활은 구원받은 죽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모든 원수의 세력을 물리치신 그리스도가 모든 통치와 권세의 머리이시고(2,10), 우리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를 힘입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 죽임의 현실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리스도인들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이라고합니다(3,3-4).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인은 세례와 함께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으로써 다시 얻은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현재의 생명도 우리 자신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규정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우리의 미래는 우리 자신도 모르고, 다른 그 누구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불안하고 근심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미래를 모른다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3,4).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에 싸여 나타날 미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건 미래건, 하늘 아래에서건 하늘 위에서건, 죽든지 살든지,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의 근거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권세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1,11). 부활신앙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위에서 성취된 미래가 우리의 현재의 삶 속에 임재 하는 은혜를 힘입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규정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 다시 말해 부활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를 새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3,10-11).

 

사도 베드로도 말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10,34-35).

 

초대교회가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급진적 평등의 실천이었습니다. 신분과 계급, 인종과 종교에 의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던 시대에,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평등사상,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신다는 믿음에서 온 것입니다(3,11). 다신론과 우주의 계층적 이해는 인간사회의 불평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신앙고백만이 급진적 평등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어둠과 빛, 하늘 아래와 하늘 위, 죄와 은혜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 세상은 더욱 분열되었습니다. 세계화의 정점에 있는 지구촌이 자가격리’, ‘이동통제’, ‘국경봉쇄로 서로 문을 닫고 있습니다. 인류는 감염자와 비감염자’, ‘양성과 음성이라는 두 인종으로 나뉘었습니다. 죽음도 평등하지 않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 앞선 희생자는 병든 노약자들이고, 더 큰 희생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도시빈민, 노숙자들, 난민, 미등록외국인노동자는 치료도 받지 못하고, 새로운 불가촉천민이 되어 추방과 죽음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쪽에 앉아계시는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치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말씀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20,10), 우리는 코로나 이전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코로나 이후 시대’, 새로운 세계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집단적 죽임의 코로나 바이러스-19의 세계적 대유행 시대에 부활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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