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십자가 죽음으로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저녁식사를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전승되고 있는 이 이야기는 섬김과 자기희생적 겸손을 가르치는 도덕적 교훈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석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 13,15)는 말씀에 의해 더 확증되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손님에게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을 제공하는 일은 관례적인 접대였습니다. 그러나 손님의 발을 씻는 일은 아주 낮은 신분의 종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같은 유대인 노예들에게는 요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때로 헌신의 표시로서 제자들은 그의 선생이나 랍비에게 이런 봉사를 하는 경우는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이자 선생으로서, 스스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신 후,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셨다’고 합니다(요 13,4-5). 선생이 스스로 겉옷을 벗는 행동이나, 수건을 허리에 두르는 것,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는 일련의 이런 행동, 오직 낮은 신분의 종들이나 하는 행동을 하신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셔서 종의 형태를 취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이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표징으로 해석합니다(요 13,1). 여기서 ‘끝까지’(에이스 텔로스)라는 구문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먼저 ‘죽을 때까지’라는 시간적 의미와 ‘아주, 완전히, 다 이룸’이라는 의미가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도(요 19,30) ‘텔로스’의 동사 ‘텔레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죽으실 때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신 사랑의 표징이자, 동시에 사랑은 자기희생적인 섬김, 곧 겸손에서 성취된다는 증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곧 십자가 죽음으로 자신의 겸손을 다시 확증해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놀란 시몬 베드로,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 반문하면서 말합니다: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요 13,7)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동이 단지 겸손의 교훈을 주기 위한 것, 그 이상의 의도를 가진 표징임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징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상관’으로 번역된 헬라어 ‘엑케인 메로스’는 단순히 ‘공유하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교제’의 뜻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70인역’ 성경에서 사용되는 ‘메로스’는 히브리어로 ‘헬레크’인데, 이 단어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유업’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레위인들을 제외하고 각 족속은 약속의 땅에 그들의 ‘몫’이 주어졌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요. 그래서 가톨릭 성경은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고 번역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사용하신 ‘몫’이라는 단어는 ‘상속’과 관련된 것으로서, 예수님이 씻어주시지 않으면 ‘구원의 상속’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깨끗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죄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도덕적 허물과 잘못보다 훨씬 더 근원적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씻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써만 씻김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족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족은 예수님이 곧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게 될 마지막 섬김의 표징임을 보여준 것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은 것일까요? 베드로는 ‘주님, 내 발 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겨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마치 씻는 회수나 정도가 예수님과의 관계를 향상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 밖에는 더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발 밖에는 더 씻을 필요가 없다’는 후대의 필사가들이 삽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당시 가장 중요시되었던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목욕하다’는 동사와 이의 동의어들은 세례를 가리키는 표준적인 신약성서의 단어들이었기에, 목욕을 한다는 것은 세례성사를, 발만 씻으면 된다는 것은 고해성사를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한번 세례 받은 사람,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발을 씻듯이 사람은 죄를 지을 때마다 용서를 필요로 하고, 용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야기 안에 요한은 가룟 유다의 배신 이야기를 함께 전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음이 괴로우셨던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고 환히 드러내어 말씀하셨습니다(요 13,21). 유다는 이 때 마음을 고쳐먹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은 ‘나와 함께 빵을 먹은 자’가 배반할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배반은 언제가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빵을 함께 나누는 것은 가장 가까운 관계를 상징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은 배반할 것도 없지요. 배반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자신을 팔아넘길 것을 아셨지만, 예수님은 유다에게 빵조각을 주었을 때, 어쩌면 그가 그 빵조각을 받지 않기를 바라셨을지 모릅니다. 유다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었습니다.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매우 친밀한 관계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 회중은 한 해를 시작하는 달, 제10일에 각 가문에서 어린 양 한 마리씩을 마련하되, 식구 수가 너무 적어서 양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없으면, 한 사람이 먹을 분량을 계산하여, 가까운 이웃에서 그만큼 사람을 더 불러다가 함께 먹도록 하라’고 명하셨습니다(출 12,1-4).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먹을 수 없고,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평등한 식탁 공동체, 이것이 출애굽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의 마지막을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으로 마무리하셨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마지막 만찬 전승과 사도 바울이 전해 받은 성만찬 제정사도(고전 11,23-26)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과 선포’라는 과제 안에서 제자들을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유다가 예수님이 주신 빵조각을 받아 함께 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한은 그가 빵조각을 받자, 그 때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합니다(요 13,27). 유다는 주님이 주신 빵을 받아먹은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는 단지 빵조각을 받았고, 그 때 사탄이 그에게 들어간 것이지요.
사람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불어넣는 것이 악마라면(요 13,2), 유다는 언제든지 그런 생각을 거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빵조각을 받은 유다가 곧 나갔는데, 때는 밤이었다고 요한은 증언합니다(요 13,30). 유다는 빛이신 예수님을 만난 후, 빛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있었지만, 마침내 스스로 어둠을 선택한 것이지요. 유다는 예수님과의 식탁 교제 안에 머물러 있기보다, 거기에서 나가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요한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이야기 안에 가룟 유다 만이 아니라, 베드로를 등장시킵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는 성격이 성급하고, 충동적이면서도 두려움과 의심이 많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 곧 ‘바위’라고 부르겠다고 하셨지만(요 1,42), 그러나 베드로는 결코 ‘반석 같은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스승이 잡히셨을 때,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배신은 유다만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을 때 모든 제자들이 도망쳤습니다. 유다와 베드로, 두 사람 다 예수님을 배신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가길 거부하고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를 통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나감으로써, 약속받은 영원한 구원에 이른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불어넣지만, 우리는 사탄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는 다만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사탄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4세기부터 교회 전례 안에서 발 씻는 예식을 행해 왔고, 이런 전통 위에서 우리도 고난주간 성목요일 전례로 세족식을 합니다. 세족식은 자기희생적 자기 낮춤과 겸손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이 사랑의 완성임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본받는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섬김의 삶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요 13,17).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서로의 손을 씻어주는 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본받아 살겠다는 결의를 새롭게 하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웃을 섬기는 것은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지, 의무감이나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희생적으로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이웃을 섬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사신 예수님을 전례를 통해 기억하고, 주님을 본받아 살겠다는 결의를 새롭게 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약한 믿음을 강하게 하시고, 우리를 주님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합시다.
번호 | 예배일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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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2025-04-18 | 성 금요일 음악회 / 십자가상의 죽음 | |
39 | 2025-04-17 | 성 목요일 세족예배 - 세족과 성찬 | 임영섭 목사 |
38 | 2025-03-05 | 성회 수요일 예배 (구별된 삶과 신앙) | 임영섭 목사 |
37 | 2024-03-28 | 성 목요일 세족예배 - 처음부터 끝까지 | 임영섭 목사 |
36 | 2024-02-14 | 성회 수요일 예배 (그리스도의 고난) | 임영섭 목사 |
35 | 2023-04-07 | 성 금요일 예배 - 말씀 묵상과 찬양 (2부 성가대) | |
34 | 2023-04-06 | 성 목요일 세족예배 - 사랑의 격려 | 임영섭 목사 |
33 | 2023-02-22 | 성회 수요일 예배 | 임영섭 목사 |
32 | 2022-04-15 | 성 금요일 음악예배-십자가 상의 일곱 말씀과 찬양 | |
31 | 2022-04-14 | 성 목요일 세족예배 - 사랑의 습관 | 임영섭 목사 |
30 | 2022-03-02 | 성회수요저녁예배 | 임영섭 목사 |
29 | 2021-04-02 | 성금요일 음악예배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 | 채수일 목사 |
28 | 2021-04-01 | 성목요일 세족(수)식, 성만찬예배 | 채수일 목사 |
27 | 2021-02-17 | 성회수요저녁예배 | 채수일 목사 |
26 | 2020-04-09 | 성목요일 세족(수)식, 성만찬 예배 | 채수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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