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없이 계신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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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욥기 23:1-9/ 히브리서 4:12-16/ 마가복음서 10:17-31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1-10-10 |
전주 | 복된 삶을 위해 기도하나이다(S. Buxtehude) |
찬양1부 | 주 은혜를 받으려(Traditional Netherlands Folk Song) 특송: 이예랑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주 은혜를 받으려(Traditional Netherlands Folk Song) 특송: 이예랑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주 너를 늘 지켜 주시리라(W. S. Martin) |
후주2부 | 주 너를 늘 지켜 주시리라(W. S. Martin) |
성경본문 |
욥기 23:1-9 욥이 대답하였다. 오늘도 이렇게 처절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니! 내가 받는 이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그분이 무거운 손으로 여전히 나를 억누르시는구나!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그러면 그분은 무슨 말로 내게 대답하실까? 내게 어떻게 대답하실까? 하나님이 힘으로 나를 억누르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씀을 드릴 때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실 것이다.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하나님께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고 나서는, 단호하게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 히브리서 4:12-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마가복음서 10:17-31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눈여겨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렸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
1. 전통적으로 구약성경의 욥 이야기는 ‘신정론’(神正論, Theodizee)의 시각에서 해석되었습니다. 왜 착한 사람이 고난을 받고, 악한 사람은 오히려 더 잘 사는가?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인가? 세상은 공정한가?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절대 선하신 분이시라면 어떻게 악의 존재를 용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신학적 대답을 찾는 이론이지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욥기는 까닭을 알 수 없는 고난과 고통 속에 있는 한 신앙인의 삶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한 순간에 모든 재산과 가족을 잃고, 견디기 어려운 피부병으로 육체적 고통을 겪으면서, 그동안 그가 믿어왔던 하나님의 정의로우심과 선하심, 악을 심판하시고 세상에서 정의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깨어지는 깊은 절망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고 탄식하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지요(욥 3,1-13).: ‘내가 태어나던 날이 차라리 사라져 버렸더라면(욥 3,3)....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아,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이 고난을 겪지 않아야 하는 건데!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그 순간에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가?(욥 3,11).... 어찌하여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빛을 보게 하시고, 이렇게 쓰디쓴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가?’(욥 3,20)
그렇습니다. 욥은 탄식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속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습니다. 자신의 절망, 고통,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분노와 고발을 서슴없이 그리고 가감 없이 진술합니다. 때로는 신성모독처럼 들리는 위험한 발언도 서슴치 않습니다.
그러나 욥은 탄식을 통해 성숙해갑니다. 친구들이 조언하는 값싼 은혜, 상투적인 종교적 답변에 쉽게 만족하지 않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없으니, 욥의 고난은 반드시 죄의 대가라고 주장하면서(욥 4,7),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은 복된 것이라는 엘리바스의 주장에(욥 5,17) 욥은 자신의 무죄를 항변합니다. 친구 빌닷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면 가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위로하지만(욥 8,6),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시고, 오히려 숨 돌릴 틈도 주시지 않고 쓰라림만 안겨 주시는데(욥 9,18),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절규합니다. 또 다른 친구 소발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흠 없음을 우기는 욥을 비난하고, 그의 고난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욥 11,7).
친구들의 조언과 충고, 비난과 격려가 도움이 되기는커녕, 인정조차 할 수 없게 된 욥은 ‘죽기까지 결백을 주장하겠다.’(욥 27,5)고 하면서, 의심과 회의, 좌절과 절망, 고통과 고난의 끝까지 파고들어 오직 하나님 자신과만 씨름합니다. 욥에게 탄식은 방향 없는 비탄, 끝없는 원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집중된 갈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는 욥은 그 누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 자신과만 씨름합니다. 자신의 추한 모습, 자신의 근심과 걱정, 절망과 고통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을 가장 괴롭힌 것은, 재산과 가족의 상실, 육체적 고통, 친구들의 오해가 아니었습니다. 욥을 그 무엇보다 견디기 어렵게 한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자기가 처한 사정을 아뢰고, 자신의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할 터인데(욥 23,4),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 없었습니다.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 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다는 것이(욥 23,8-9), 그를 고통스럽게 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욥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부재였습니다. 자기 백성의 절규와 탄식을 듣지 않으시는 낯선 하나님, 불의와 억울함으로 고통 받는 자녀를 돌보지 않으시고 관망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절망과 원망이었지요. 욥기에서 단지 전통적인 인내와 고난 받는 의인을 발견할 것이라고 기대한 독자는 욥의 저항과 절규, 신성모독적인 발언에 심한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항변, 저항과 울부짖음, 탄식과 원망을 긍정하십니다. 울부짖음은 모든 신앙의 기원이고, 탄식은 모든 신학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욥에게 잃었던 모든 재산을 두 배로 회복하여 주셨고, 많은 자녀들도 주셨으며, 그 뒤에도 욥은 오래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욥 42,10-17).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일종의 해피엔딩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고난을 감내한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보상은 재산과 가족의 회복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 자기 눈으로 주님을 뵙게 된 것’이었습니다(욥 42,5). ‘없이 계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어디에도 안 계신 것 같으나, 사실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하나님을, 그동안 이런 저런 소문으로만 듣던 하나님을 이제 직접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욥기에서 삶의 길 위에 서 있는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을 만납니다. 이 길 위에서 욥은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는가?’(욥 2,10)라는 순종으로 출발하였으나,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과 고난에 대한 격렬한 반항과 자신의 정당함에 대한 끝없는 내적 투쟁,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에 대한 절규와 탄식을 거쳐, 다시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하는 순종으로 돌아오는 한 신앙인으로 우리를 만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까닭을 알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을 받을 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절규와 탄식,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반항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것 같아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듣지 않으시는 것 같아도 우리의 탄식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고통 받는 것을 누구보다 더 아파하시고, 분노하시는 분입니다.
2. 하나님은 무관심과 침묵으로, 인간과 피조세계가 고통 받는 것을 천상에서 지켜보시는 절대자가 아닙니다.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올라가셨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신 것은, 그 분이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이라고(히 4,15)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과 유혹을 받으시고, 아파하시고, 슬퍼하신 분, 절규하시고 탄식하신 분이셨기에 시험받고, 고통 받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분, 그 분이 바로 하늘에 계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히 4,16).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의심과 회의, 우리의 실수와 실패, 흔들리는 믿음과 소망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우리가 은혜의 보좌,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아무 것도 감출 수 없고, 어떤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주님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히 4,13).
우리는 우리의 약함, 시험받을 수 있음을 굳이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약함과 시험받을 수 있음은 인간됨의 본질입니다. 게다가 주님의 말씀은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고,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사람 속을 꿰뚫고, 우리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내기 때문에’(히 4,12-13), 우리는 주님 앞에서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씀을 양날 칼에 빗댄 것은 절단과 예리함 때문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야기하는 베고, 찌름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은 죽음과 심판을 동반한다는 것이지요.
3. 주님의 말씀이 죽음과 생명, 심판과 구원의 양날을 가진 칼과 같다는 것은, 누군가에는 죽음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명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심판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된다는 것은, 한 부자청년을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시는데,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이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물었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마태는 이 사람을 젊은이(마 19,20), 누가는 어떤 지도자로 서술하고 있어(눅 18,18),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질문을 한 사람이 부유한 청년지도자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예수님에게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예의바르고, 부활에 대한 종교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경건한 부자청년임을 보여줍니다. 당시 묵시문학과 함께 유대교 안에 널리 퍼진 부활신앙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구원을 보증하지 않고, 개개인으로 하여금 윤리적 결단과 실행에 맞서도록 촉구했기 때문에, 그는 부활을 위해 그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대답하심으로써, 영생에 대한 답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예고하십니다. 그런 후, 십계명 가운데서 이웃 인간과 관계된 계명들을 제시합니다. 그러자 이 부자 청년,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청년은 경건하고 부유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흠 잡힐 데가 없는 인물입니다. 이런 그를 예수님은 사랑스럽게 여기시고,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은 이 부자청년 자신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안심하고 그가 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의 초점은 자선 행위에 대한 하늘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데 있었습니다. 그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다는 말이지요. 소유의 포기와 하늘에서의 보상은 예수 따름의 결과이지, 전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예수를 따를 수 있다면, 과연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포기는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은혜의 결과이지, 조건이 아닙니다.
부자청년은 예수님의 권유를 뿌리칩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고 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울상을 지었다’고 하는데, 헬라어는 ‘분개하다’, ‘안색이 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었던 존경심이 갑자기 분개로 역전된 것이지요. 기대했던 칭찬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하늘의 보화를 믿을 수 없었거나, 예수님의 말씀이 감당하기 어려울정도로 급진적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복음서 저자는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기술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러나 재산 그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경건한 부자청년은 재산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사도 손해가 아닌 나라이지요. 마치 밭에 감추어놓은 보물을 찾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 밭을 사는 사람처럼 결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청년 지도자는 자기 재산에 대한 욕망과 걱정 때문에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것입니다.
놀란 제자들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하고 서로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눈여겨보시고,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 실천이나 선행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현재에 대한 근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제거합니다. 구원에 대한 인간의 염려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적인 의존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누가 구원을 베푸시느냐로 대화의 주제를 바꾸신 것이지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사람들, 가진 것도 없고, 보잘 것 없지만, 새로운 세상,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그런 의미에서 은혜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특별히 베드로는 어쩌면 자랑스럽게 말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을 눈여겨보신 주님은 그들에게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과 복음 때문에 친지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버린다는 점에서 포기는 훨씬 능동적이고, 급진적입니다. 기득권의 포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입니다. 새로운 세계, 하나님 나라에로의 진입은 기존의 세계와의 단절 없이는, 모든 기득권을, 그것이 재산이건, 세상 권력이건, 명예건, 자존심이건, 포기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빅해와 고난과 고통을 불러올지 몰라도,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으로 보상받을 것입니다.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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