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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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절 | 사무엘기하 6:1-5/ 에베소서 1:3-14/ 마가복음서 6:14-16 |
설교자 | 채수일 목사 |
예배일 | 2021-07-11 |
전주 | 사랑의 주님께 찬양드리나이다(D. Buxtehude) |
찬양1부 |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주영광 곡) 특송: 김준홍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채문경 권사 |
찬양2부 |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주영광 곡) 특송: 김준홍 교우 |
지휘자 | |
반주자 | 신채우 집사 |
후주1부 | 주 예수 이름 높이어 찬양하나이다(O. Holden) |
후주2부 | 주 예수 이름 높이어 찬양하나이다(O. Holden) |
성경본문 |
사무엘기하 6:1-5 다윗이 다시 이스라엘에서 정병 삼만 명을 징집하여서, 그들을 모두 이끌고 유다의 바알라로 올라갔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올 생각이었다. 그 궤는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부르는 궤였다. 그들이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꺼내서, 새 수레에 싣고 나올 때에,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히요가 그 새 수레를 몰았다.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히요는 궤 앞에서 걸었고, 다윗과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은, 온 힘을 다하여서, 잣나무로 만든 온갖 악기와 수금과 거문고를 타며, 소구와 꽹과리와 심벌즈를 치면서, 주님 앞에서 기뻐하였다. 에베소서 1:3-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2)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 마가복음서 6:14-16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헤롯 왕이 그 소문을 들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고, 또 더러는 말하기를 "그는 엘리야다"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그런데 헤롯이 이런 소문을 듣고서 말하기를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 하였다. |
1. 세례자 요한을 살해하고,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셨을 때, 갈릴리와 베레아의 요단강 건너편을 다스린 통치자는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그의 부친인 헤롯 대왕이 죽은 주전 4년, 16살의 나이에 분봉 왕이 된 후부터 주후 39년, 권좌에서 추방되기까지, 로마 제국이 세운 네 명의 분봉 왕 가운데 하나로, 유다 왕국의 4분의 1을 지배한 꼭두각시 통치자였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를 자칫 그의 아버지인 헤롯 대왕과 혼동하는 것은, 헤롯 대왕의 가계도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헤롯 대왕은 열 명의 아내를 통해 수많은 자녀들을 낳았고, 또 이들 가운데는 근친결혼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의 아내 헤로디아는 헤롯 대왕의 손녀였는데, 그녀의 전 남편은 헤롯 대왕의 아들, 곧 그녀의 삼촌이었고, 이름도 헤롯이었기 때문에 더 복잡해졌습니다. 어쨌든 헤로디아는 전 남편 헤롯(빌립)과 이혼한 뒤, 그의 배다른 형제인 헤롯 안티파스와 결혼했고, 세례자 요한은 바로 이 결혼이 옳지 않다고 비난했던 것이지요(막 6,17-18). 이에 원한을 품은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헤롯 안티파스는 요한을 ‘의롭고 성스러운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고, 또 그의 말을 들으면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오히려 달게 들었다’고 마가는 증언합니다(막 6,20).
그런데 어느 날, 헤롯 안티파스의 비호 때문에 요한을 죽이지 못한 헤로디아에게 절호의 기회가 옵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푼 것이지요. 그 때 헤로디아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이자,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이자 동시에 의붓딸인 살로메가 춤을 추어 헤롯 안티파스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줍니다. 흥분한 헤롯 안티파스, 살로메에게 말하지요.: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내가 들어주마. 네가 원하는 것이면,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심지어 굳게 맹세까지 합니다(막 6,22-23).
진정한 왕도 아니고, 자기 마음대로 영토를 떼어줄 권리도 없는, 겨우 유다의 4분의 1을 통치하는 허수아비 분봉 왕에 불과한데,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지요. 아니, 어쩌면 바로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헤롯 안티파스는 더 허세를 부렸을지 모릅니다. 그러자 살로메는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달라고 청할까요?’라고 묻고, 헤로디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딸 살로메는 한 수 더 나갑니다. 그녀는 ‘급히’ 왕에게로 돌아와서 청합니다.: ‘곧바로 서둘러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내게 주십시오.’(막 6,25).
헤로디아는 단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살로메는 ‘곧바로 서둘러서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음식이 담겨야 할 쟁반 위에 요한의 머리를 얹어 보내라는 말입니다. 생일잔치 자리가 소름끼치는 살육의 자리가 된 것이지요.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 살로메, 당돌하고 사악함에서 ‘원판불변의 법칙’, 아니 더 진화하는 악의 표징입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 헤롯 안티파스의 처지였지요.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고 합니다(막 6,26). 일어날 수 있는 백성의 소요도 걱정이 되었겠지요. 그렇지만 ‘맹세한 것과 거기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비록 분봉 왕이지만, 이미 뱉은 말 주어 담을 수 없고, 왕으로서의 체면과 허세를 부리기 위해, 그는 곧 호위병을 보내서,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합니다. 호위병은 나가서,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서, 쟁반에 담아 소녀에게 주고,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줍니다(막 6,27-28). 생일잔치는 괴기한 참상으로 마무리됩니다. 요한의 머리가 접대용 접시에 담겨 만찬석상에 전달된 것이지요.
이로써 유대 권력자 분봉 왕 헤롯 안티파스가 그토록 두려워했고, 그의 아내 헤로디아가 그토록 원한을 품었던 세례자 요한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무덤에 안장했다고 합니다(막 6,29).
의롭고 성스러운(막 6,20), 위대한 인물의 죽음에 대한 보도치고는 너무 소박합니다. 살아 있는 요한의 모습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오직 절단된 그의 머리가 마지막 장면에 나타날 따름이지요. 요한의 죽음을 순교적 모범으로 고양시키거나,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도 없습니다. 요한은 그렇게 살해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세례자 요한의 운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과 병행하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요한이 유대 분봉 왕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듯이, 예수님도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임을, 요한이 헤로디아의 간계에 의해 목숨을 잃었듯이, 예수님도 제자 이스카리옷 유다의 배신에 의해 목숨을 잃는 병행 사건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도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죽은 세례자 요한이 부활한 것이라고 소문을 내었고, 이런 소문을 들은 헤롯 안티파스도 예수님이 자기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막 6,16).
주후 1세기에는 중요한 지도자가 죽은 자들로부터 귀환할 것이라는 대중적인 기대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나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죽은 세례자 요한이 되돌아 온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영웅의 환생 설화이지요. 이런 동일시는 영웅적 인물을 통해 성취되어야 할 집단적 희망이 실현되지 못했을 때, 역사적 시차를 두고 재기되는 메시아 대망의 다른 형태입니다. 그리고 이런 메시아 대망은 예수님 시대, 다윗 왕조의 회복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유대인을 구원할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믿음이지요.
2.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군사적 승리를 얻은 후, 정치적 안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예루살렘을 정치적 수도만이 아니라, 종교적 중심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북부 팔레스타인 지파들과 중부 팔레스타인 지파들을 제의적으로 예루살렘에 모이게 함으로써 다윗은 ‘하나의 국가, 하나의 중앙 성소, 하나의 왕’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정착시키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블레셋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려고 다윗은 정병 삼만 명을 이끌고 바알라로 올라갔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규모의 군사적, 제의적 축제 행렬이었습니다.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꺼내서, 새 수레에 싣고 나올 때, 다윗과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은, 온 힘을 다하여서, 잣나무로 만든 온갖 악기와 수금과 거문고를 타며, 소구와 꽹과리와 심벌즈를 치면서, 주님 앞에서 기뻐했습니다(삼하 6,3-5). 그 후, 잠시 오벳에돔의 집으로 옮겨진 하나님의 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때, 다윗은 큰 축제를 벌였고, 모시로 만든 에봇을 걸치고,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습니다(삼하 6,14).
다윗이 뛰면서 춤추는 모습을 창밖으로 본 그의 아내 미갈은, ‘마음속으로 다윗을 업신여겼고’(삼하 6,16), 궁전으로 돌아온 다윗에게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삼하 6,20)라고 왕을 멸시합니다.
미갈이 다윗을 무시한 것은 제사장이 입는 전형적인 에봇을 입고, 춤을 추다가 옷이 벗겨져 벌거벗은 상태가 된 데 있었습니다. 미갈을 특히 화나게 한 것은 하녀들이 자기 남편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지파들의 사회적 행동규범에 따르면 이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습니다. 미갈이 화가 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미갈의 이런 비난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벌거벗음을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으로 해석합니다. 아무런 보호막도 가식도 없이 온전히 무방비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 맡기는 행동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법궤를 되찾은 넘치는 기쁨은 전통과 관습으로도 억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미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소. 내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님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삼하 6,21-22).
다윗은 인간적으로 흠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고 천한 출신의 목동이었고, 사울에게 쫓겨 다닌 용병 대장이었으며, 왕이 된 후에 자신의 불륜을 감추기 위해 사악하고 비겁한 행동을 한 인물이었지요. 정적에게 무자비했고, 정치적으로 온갖 간계와 술책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수금을 타는 음악가이자 시인이었고,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자신이 얼마든지 더 낮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시편 150편 가운데, 73편의 시들이 다윗의 이름과 관계된 것입니다. 다윗의 이름과 결부된 수많은 평가들이 있지만, 우리는 다윗을 평생 하나님을 찬미(讚美)한 시인으로 주목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찾아올 때, 기쁨에 넘쳐 옷이 벗겨지는 것조차 모른 체 노래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즐거울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죽음 직전의 막다른 길목에 빠졌을 때(시편 4), 기력이 쇠하여 뼈가 마디마다 떨릴 때(시편 6),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 때에도(시편 23편) 다윗은 주님을 찬양(讚揚)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찬양은 아름다운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신음이고 절규였으며, 탄원과 원망이고, 고통의 마지막 외침 후에 나온 찬미였습니다. 다윗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주님을 노래할 것이다. 숨을 거두는 그 때까지 나의 하나님께 노래할 것이다.’(시편 104,33)고 결심했고, 그는 실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았습니다.
3. 사도 바울과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찬 삶의 한 복판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엡 1,4-5).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생명을 얻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가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크기와 우리 존재의 측량할 수 없는 소중함을 선언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은, 그 누구의, 그 어떤 생명이건, 그래서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마 16,26). 인간의 생명만이 아닙니다. 지구 위에 있는 모든 동물과 식물의 생명 안에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물을 학대하고, 식물을 함부로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명도 그렇게 학대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규정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찬미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사랑이, 인간과 지구 사이에는 책임이 그 관계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의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고 기후변화를 일으켜 지구의 본디 모습에 손상을 입히고, 자연 삼림과 습지를 파괴하며, 지구의 물, 흙, 공기, 생명을 오염시키는 것은 모두 죄입니다. 자연세계에 저지른 죄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거슬러 저지른 죄와 다르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5년 성령강림대축일에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라는 회칙을 발표했습니다. 교황은 회칙에서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가 당면한 기후위기의 심각한 현실,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을 제시하고,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접근과 행동방식, 생태교육과 영성을 제안합니다.
기후위기에서 비롯된 지구의 파멸과 멸종의 심각한 위기를 제시하고 극복방안을 모색하는 교황의 회칙 제목이 ‘찬미받으소서’라는 것이 처음에는 이상했습니다. 그러나 생태계 파괴와 자연 질서의 붕괴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이 지구에 선사하신 재화들의 무책임한 이용과 남용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찬미관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관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책임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극복될 수 없다는 주장은 왜 이 회칙의 제목이 ‘찬미받으소서’인지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회복은 우주 안에 내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찬미하는 신앙고백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성한 것과 인간적인 것이 하나님 창조의 가장 작은 부분, 우리 지구의 가장 작은 먼지 알갱이에서도 서로 만나게 된다는 겸손한 확신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낭만적인 휴머니즘이나 범신론, 순진한 자연예찬이 아닙니다. 지구 위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죄악은 충분히 잔인하고, 인간의 자연과 동물 학대는 충분히 잔혹합니다. 충격적인 어린이 학대와 살해사건, 동물학대 사건, 난개발로 파괴되는 자연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이 두 사건이 결코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생태적 영성’이 필요하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영성이 소란하고 복잡한 외부로부터 자기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찾고자 자기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생태적 영성은 자기 내부로의 침잠(沈潛)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데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엡 1,9-10). 생태적 영성은 사회적 책임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와 욕망 때문에 파괴되고 분열된 만물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다시 하나가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대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었거나 감사할 일이 성취되었을 때, 주님의 영광을 찬미합니다. 그러나 다윗과 바울은 기쁠 때만이 아니라, 슬플 때에도, 구원받았을 때만이 아니라,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헤맬 때에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쁠 때는 물론 슬플 때에도, 행복할 때는 물론 고통 받을 때에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엡 1,14).
번호 | 예배일 | 절기 | 설교제목 | 설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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