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셋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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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성경구절 요나서 3:1-5, 10/ 고린도전서 7:29-31/ 마가복음서 1:14-20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1-01-24
전주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셨다(D. Buxtehude)
찬양1부 주의 은혜라(이율구 곡) 특송: 김준홍 교우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찬양2부
지휘자
반주자
후주1부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갑니다(W. A. Mozart)
후주2부
성경본문 요나서 3:1-5, 10
주님께서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요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이다. 요나는 그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고린도전서 7:29-3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마가복음서 1:14-20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를 일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





1. 마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세례자)요한이 (헤롯에게) 잡힌 뒤에’,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헬라어 성경은 요한이 넘겨진 후에라는 수동태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요한이 잡힌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과 행동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같은 동사가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서도 세 번 사용되는데(9,31; 10,33; 14,41), 이것은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 같은 분이 죽고 사는 것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고 권력자는 사람의 운명이 자기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자기 운명이 자기 소유에 달려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 공중의 새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입히신다.’(6,26; 6,30)고 믿는 사람들,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10,28-29)은 자기 운명이 권력자나, 자신의 소유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요.

물론 모든 행복한 일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듯이, 모든 불행한 일도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뜻과 관계된 것은 아닐지라도,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 우리의 생명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신뢰하는 사람이지요.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구속되자 갈릴리로 오셔서,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1,15)고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찼다’, 공동번역은 때가 다 되어로 번역했습니다. ‘로 번역된 카이로스’(Kairos)는 우리가 아는 대로 연대기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다르지요. ‘때가 찼다는 표현은 예언자적-묵시문학적 언어에 일치하는데, 이 표현의 배후에는 때를 정하는 것도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인식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시점을 하나님께서 확정하셨고, 예수님과 함께 시대의 결정적인 전환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청중들은 놀랐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시대의 결정적인 전환이 하늘 문이 열리고, 천군천사들이 나팔을 불면서 내려오고,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지는 심판과 함께 우주적인 사건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선포에 실망했을 것입니다. 나사렛 출신의 목수,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전환, 하나님 나라는 누룩과 같고 겨자씨 같아서, 잘 보이지 않고 누구나 다 지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지각할 수 있는 숨겨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고 합니다.’(1,16-18). 또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시자, 그들도 아버지 세베대와 일꾼들과 배를 남겨 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습니다.’(1,19-20).

 

그들은 그들의 생계수단이었던 배와 그물, 혈육인 아버지를 주저함 없이 버리고 곧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무언가 더 큰 것을 본 사람은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지요. 마치 밭에 숨겨놓은 보물을 발견하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는 사람, 좋은 진주를 발견하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사는 상인처럼 말입니다(13,44-46).

 

마가복음서 저자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부름을 받은 제자들도 무엇인가 더 큰 것을 예수님에게서 보았음이 분명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롯왕에 의해 구속되자, 그와 함께 시작된 운동도 이제는 끝장났다고 절망한 제자들에게 갑자기 나타나,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 하시는 예수님에게서 무언가 놀라운 것을 본 것이 틀림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바치는 기도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루씩 지나가고 한 해씩 사라지건만, 저희는 기적들 사이를 장님처럼 걸어갑니다. 저희의 눈을 볼 것들로 채워주시고, 저희의 마음을 알 것들로 채우소서. 당신의 현존이 마치 번갯불처럼 저희가 걸어가는 어둠을 비추는 순간들이 있게 하소서. 저희가 어디를 바라보든, 떨기에 불이 붙었지만 불에 타서 없어지지 않는 것을(3,2) 볼 수 있게 도우소서. 그리고 당신께서 빚으신 흙덩이인 저희들이 거룩함에 닿게 하시고, 놀라움 가운데 이 얼마나 경외로 가득한 곳인가!’(28,17) 하고 외치게 하소서.”

 

사실 매일이 기적인 것을 모르고, 우리는 기적을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기적들 사이를 장님처럼 걸어가면서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순간적으로 예수님에게서 무언가 다른 것, 무언가 놀라운 것, 경외로 가득한 무엇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이 온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의 결단, 회개와 믿음을 촉구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 생각 바꾸기가 아닙니다. 삶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4,22-24)입니다. 회개는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는 것’(3,10)이지요.

 

2. 회개는 단지 개인적 차원에서만 삶의 변화와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민족인 니느웨 백성의 회개는 재앙을 멈추게 했고(3,10), 한 민족을 구원했습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변 왼쪽에 자리 잡고 있는 지금의 이라크의 모술(Mosul) 맞은편에 있었으며, 기원전 612년에 멸망했습니다.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고(3,3), 인구가 12만 명도 더 되는 큰 성읍(4,11)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 수많은 짐승들도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받은 것이지요. 단지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가히 생태적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지요.

 

요나서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참회하는 이방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개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백성을 회개시켜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방민족인 니느웨가 차라리 멸망하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지는 자기 민족만이라는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분리주의와 종교적 편협성을 요나서는 규탄합니다.

 

3. 고린도 교회에도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가진 집단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혼인과 성()에 대하여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집단은 영적 지식을 가진 사람은 모든 도덕적 규제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어떤 도덕률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성적으로 방종한 생활을 하는 집단이었고(고전 6,12), 다른 집단은 그와 정 반대로 엄격한 금욕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성적으로 방종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고전 6,13), 몸은 성령의 성전이니,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고전 6,19-20) 권면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엄격한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고전 7,1), 성관계를 멀리하면서, 서로에 대한 혼인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금욕주의적 태도에 대해 명확하게 제한을 두는데, 오직 배우자의 동의하에서만, 그리고 얼마 동안 만’, ‘기도에 전념하려는 목적에서만’, 결국 다시 합하기위해서만 성관계를 멀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고전 7,5). 기도를 위해 한시적으로 아내와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은 당시 유대교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구적으로 성관계를 멀리하는 것은 헬레니즘-로마 문화 전반에서 예언자적, 종교적 활동을 하는 여성들에게서 흔히 나타났던 일이었습니다.

 

여성들의 금욕주의적 태도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성관계와 결혼관계에 대한 일종의 대항이었는데, 여성은 자신의 몸에 대해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한 것이지요(고전 7,4). 여성의 이런 영적인 금욕주의는 전반적으로 여성들에게 해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당시 여성들은 어린 나이에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와 결혼해야 했고, 과부가 되거나 이혼하면 빨리 재혼해야 했는데, 그것은 여성들이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법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의존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적인 가정을 제외하면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설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여성들에게 금욕주의는 남편에게 의존하고 그들의 권위에 예속되었던 무기력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고,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혼인과 성문제와 관련하여 바울은 보수적이었습니다. 혼인을 남자나 여자가 음행에 빠질 유혹을 이겨내는 길로 묘사한 것이나(고전 7,2), 아내는 가지 몸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남편이 주장한다는(고전 7,4) 표현들이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바울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결혼관계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바울이 의도적으로 양성 평등적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와 같이 남편에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십시오.’(고전 7,3). ‘아내가 자기 몸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남편이 주장합니다. 마찬가지로, 남편도 자기 몸을 마음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주장합니다.’(고전 7,4).

바울의 이런 태도는 아내의 몸에 대한 남편의 권위만이 인정되었던 가부장적인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혼인에 대해서는 보수적 입장이었던 바울은 그러나 세상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매우 혁명적인 생각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제국 사회, 즉 옛 질서 전체의 임박한 종말을 기대했습니다. 바울은 때가 얼마 남지 않았고’(고전 7,29),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진다.’고 생각했습니다(고전 7,31b). 다시 말해 지금 이 시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 질서는 사라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이 곧 온다는 확신 속에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이 세상의 주된 사회-경제적 구분, 즉 노예와 자유인, 유대인과 이방인, 가부장적인 결혼제도에 의해 구분된 남편과 아내라는 모든 장벽이 무너진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아는 제도화된 형태의 사회는 곧 지나갈 것이므로,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적절한 태도는 마치 아닌 것 같은태도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고전 7,29-31).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스토아 철학자들의 삶의 태도와 겉으로는 비슷하지만, 그들에게는 이 세상의 형태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단지 지배적인 사회형태와 문화적 가치를 멀리하고 정신적이고 내적인 삶과 안전함으로 물러나는 것을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지 않고,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지배적인 사회 형태와 그 가치들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습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위선적으로 혹은 자기를 드러나게 하지 않고, 기회주의적으로 살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안 그러면서 그런 체하면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염려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고전 7,32). 모든 염려는 마음이 나누어지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는 것이 좋으냐, 결혼 하지 않는 것이 좋으냐는 바울에게 양자택일, 혹은 선악이나 죄의 문제가 아닙니다(고전 7,36). 결혼을 했건 안했건, 장사나 사업과 같이 세상을 이용한 사회적 관계를 하는지, 안하는지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품위 있게 살면서, 마음에 헛갈림이 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고전 7,35).

 

그리스도인이 마치 아닌 것 같은 태도로 살아야 하는 것은, 스토아 철학자들처럼 정신적이고 내적인 평안에 이르기 위한 무관심’(Apathy)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 형체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결혼과 같은 사회적 관습이나 상업제도는 다 변한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기쁨도 없고, 슬픔만 영원히 계속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내 돈으로 산 물건도, 내가 물려받았거나 번 재산도 영원히 내 것일 수 없습니다. 인생은 전도서 저자가 노래한 것처럼,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는 것이지요.’(3,1-4).

 

4. 그렇습니다. 삶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찼다는 것, 다시 말해, 모든 기존의 것들이 사라지고, 전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때가 찼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다 변하는 것도 아니지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만이 결정적인 시간에, 결정적인 전환을 할 수 있습니다.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기후위기는 우리 인류에게 때가 찼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찼다는 깨달음 자체가, 인류가 임계(臨界)상태에 다다랐다는 인식 자체가, 인간을 자동적으로 회개시키고, 결정적인 문명전환으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문명전환의 힘, 곧 회개는 새로운 미래,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살면서 여러 차례의 카이로스를 겪겠지만, 마지막 카이로스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때를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가 언젠가 다 죽는다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끝이 있다는 것, 아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사람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설령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때가 찼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음이 없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6세기, 성 베네딕토(480-547)는 그가 쓴 규칙서’(Regula Benedicti)에서 착한 일의 78개의 도구들 가운데, 47번째에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우리가 비록 세상 안에 살고 있지만, 세상의 가치와 제도 안에만 얽매어 살지 않을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은 그래도 뭔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언제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일 우리의 삶이 끝난다고, 지구가 파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찌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끝에서 새로운 미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절망이 아니라, 약속 있는 희망을 이미 찾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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