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첫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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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성경구절 창세기 1:1-5/ 사도행전 19:1-7/ 마가복음서 1:4-11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1-01-10
전주 요단강가에 오신 주 예수(D. Buxtehude)
찬양1부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Phoebe P. Knapp arr. by Diane Bish) 특송: 이재은 집사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찬양2부
지휘자
반주자
후주1부 성도여 다함께 주 찬양하여라(B. Carr)
후주2부
성경본문 창세기 1:1-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사도행전 19:1-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 바울은 높은 지역들을 거쳐서, 에베소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몇몇 제자를 만나서,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울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바울이 말하였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했는데,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마가복음서 1:4-11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1.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첫째 날이 그렇게 지났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해가 뜨면서 하루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는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고 말하는 것이 익숙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저자는 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고 말한 것일까요?

 

고대 이집트에선 매일 파라오나 신관들이 정화의식을 치르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느라 한밤이 아닌 새벽을 하루의 시작으로 삼았고, 낮과 밤을 12시간 단위로 나누는 역법과 자정이 하루의 끝이 된 것은 로마에서 유래했습니다. 4,000년 전 바빌로니아에선 해 질 녘을 하루의 시작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중세 이탈리아도 이런 시간계산법을 따랐고, 정통파 유대인은 아직도 금요일 해 질 녘부터 토요일 해 질 녘을 안식일로 지킵니다.

 

창세기에 대한 지난 200여 년 간의 학문적 탐구에 의하면, 창세기에서 여호수아기에 이르는 책들은 한 명 혹은 그 이상의 편집자들에 의해 후에 기술적으로 짜맞춰진 몇 개의 연속된 자료문서들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두 자료는 하나님의 명칭을 특징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야훼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자료는 ‘J문서, ‘엘로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자료는 ‘E문서로 표현합니다. ‘야훼 문서의 연대는 주전 950년경으로 잡을 수 있고, ‘엘로힘 문서는 그 보다 1-2세기 후로 잡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들은 창세기 11절부터 23절까지의 창조 이야기는 이른바 사제파 문서혹은 ‘P자료에 속한 것입니다. 사제파 문서는 후기의 첨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빌로니아 포로기 이후 시대, 즉 대략 주전 538년부터 주전 450년 사이에 편집된 것입니다.

 

이런 분류와 연대 설정은 편의상 그런 것이고, 모두 추측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되지만,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를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창세기 11절부터 23절까지에 실려 있는 창조 이야기가 기원전 6세기경에 기록한 사제파 문서에 속하는 것이고, 바빌로니아 포로기 이후 시대의 자료라고 한다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의 저자는 포로기 전후에 그들이 접했던 주변 근동 제국들의 창조설화들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그들의 창세기에서 하루의 시작을 해질 녘부터 계산한 것은 바빌로니아의 셈법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그 외에도 창세기가 고대 근동,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이집트 등에 널리 알려져 있던 신화나 서사시, 창조설화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창세기는 분명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고, 자기 고유의 세계관을 가지고 기록된 것입니다.

 

바빌로니아 창조설화에 나오는 창조신 마르둑은 다른 신 티아마트를 살해하고, 그의 사체를 쪼개어 그 조각들로 하늘과 성소를 만들고, 다른 부분으로는 땅, 기후, 물과 지리적 지형을 만듭니다. 인간 창조 설화도 폭력적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마르둑은 킹구를 죽이고 그의 피로부터 인류를 창조하는데, 인류의 창조의 목적은 신들이 쉴 수 있도록 그들의 수고를 인류에게 맡기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창세기는 단지 짧고 분명한 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1,1). 하나님의 창조는 신들과의 폭력적인 투쟁과 승리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 창조주이시기에 그 어떤 다른 신들과 다툴 이유가 없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다만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도 다릅니다. 바빌로니아 창조설화인 에누마 엘리쉬에 의하면, 마르둑은 신들을 쉬게 하려고 인간을 창조합니다. 신들은 쉴 수 있어도 인간은 쉴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도 하나님이 엿샛날까지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고 합니다(2,1). 겉으로는 비슷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크게 다릅니다. 하나님이 쉬신 날, 인간과 모든 피조세계도 함께 쉬어야 했습니다.

 

창조와의 관계도 다릅니다. 바빌로니아 창조설화에서는 창조주인 마르둑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는 상하관계, 주종관계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하나님이 피조세계에 이름을 주셨고, 창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인 인간과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평등한 계약관계를 만드셨습니다(2,15-17). 하나님은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에 관심을 기울이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에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러므로 현실은 질서정연한 구조로 되어 있고, 만물은 각자의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은 이 질서를 이상적인 상태로 이끄는 주체입니다.

 

또 다른 차이는 바빌로니아 창조설화, 에누마 엘리쉬에 등장하는 마르둑이나 이집트의 멤피스 신학은 그들의 신들이 통치하는 특정 도시, 곧 바빌론과 나일 삼각주의 남쪽에 있는 멤피스라는 도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반면, 창세기의 하나님은 지리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예루살렘도 또는 에덴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하늘을 보좌 삼고, 땅을 발판으로 삼으시는 분입니다(66,1). 하나님의 통치는 우주적이어서 특정 도시나 성전 안에 가둘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창세기와 바빌로니아 창조설화를 비교함으로써, ‘사제파 문서의 창세기가 자기 나라 유다를 폭력적으로 파멸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간 바빌로니아 제국의 창조설화에 대한 신학적 반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나라를 잃고, 성전도 파괴되었고, 남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온 신세였지만, 창세기 저자는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전쟁과 폭력의 신 마르둑에 대립시켰고, 피조된 세계를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과 살해한 신들의 지체와 피로 세계를 만든 마드룩을 대립시켰습니다. 족보가 있을 수 없는 하나님과 많은 신들의 족보 중간에 등장하는 마르둑을 대립시켰고, 무로부터 창조하신 하나님을 신들의 주검에서 창조한 마르둑을 대립시켰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가 사제파 문서에 속한 것이고 바빌로니아 포로기에 속하는 것임을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나라를 빼앗기고 망한 약소민족의 자기만족적 과대망상이 지어낸 허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흔히 약소국이나 약한 사람들이 과대하게 역사를 포장하거나 자신을 과시하는 경향이 있지요. 바빌로니아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스라엘의 창세기가 그렇게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창조설화에 대응하려는 의도에서 창조 이야기를 쓰고 전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저자가 고백하는 창조주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의 부족신, 혹은 유다 민족의 민족신이 아닙니다. 창세기를 쓴 것도 바빌로니아 제국의 창조설화에 맞서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저자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세계질서를 꿈꾸었습니다. 물론 앗시리아, 이집트, 바빌로니아 제국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고난과 고통이 그 배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자기 나라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간에(포로기), 가장 혼란스런 곳에서(바빌로니아 유배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창세기를 기록했습니다. 창세기 저자가 꿈꾼 세상은 이스라엘이 또 다른 제국이 되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오래된 미래를 보았습니다.

오래된 미래혼돈과 공허, 어둠이 지배하는 땅에 빛이 비치고, 계절의 바른 순환에 따라 열매를 맺고, 천체는 질서 있게 운행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함이 존중받는 세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는 태초’(역사의 원인)에 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종말’(역사의 목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그런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길어 올리는 샘이자, 어둔 밤에 방향을 알려주는 북극성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창세기 저자는 하루를 저녁에 시작하여, 아침에 끝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고 합니다(1,2).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심연, 두려움을 일으키는 폭풍이 빛이 생기기 전에 있었던 것이지요.

 

모든 시작은 어렵다’(Aller Anfang ist schwer)는 독일 속담이 있습니다. 모든 일의 시작이 가지는 특성입니다. 모든 시작은 창세기의 증언처럼, 혼돈스럽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작은 혼돈스럽습니다.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작은 공허합니다. 결과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빛은 즉각적으로 혼돈에 휩싸여 있던 세계를 가득 채웠고, 하나님은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습니다(1,5). 이로써 하나님은 처음으로 시간을 창조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창조의 하루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서 지나갑니다.

 

창세기 저자의 하루 셈법이 저녁에 시작되어 아침에 끝난다는 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4,000년 전의 바빌로니아 전통을 단순하게 수용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유배지에서, 바빌로니아 창조 설화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창세기를 써야 했던 상황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 저자에게는 바빌로니아 제국의 폭력적 지배야말로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깊음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고 함으로써, 어둠으로 시작되어 빛으로 끝나는 시간관을, 황혼과 함께 시작되어 새벽으로 끝나는 역사관을 제시한 것이지요.

 

어찌 하루의 셈법만 그렇겠습니까! 사실 인류의 역사는, 우주의 발생도 그렇지만, 어둠에서 시작되었지요. 하나님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깊은 어둠 속에 있는 세계를 빛과 질서와 조화가 지배하는 세계, 보시기에 좋았다고 즐거워하신 그런 세계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 신앙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시작되는 모든 상황에서, 개인의 삶에서거나, 인류의 역사에서건, 빛을 희망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2. 혼돈과 공허와 깊은 어둠은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생활(19,1)과 세례자 요한이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던 광야를(1,4) 연상시킵니다. 광야는 황폐하고 척박할 뿐만 아니라, 인적이 없고, 위험한 야생동물들이 출몰하는 곳입니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40년 동안 준비시키신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함으로써, 어둠 속에서 빛을 찾고,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는 사람들, 고통스런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 사이에 끼여 있는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푼 곳은 요단강이었습니다. 요단강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시리아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며 갈릴리 호수를 지나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약 251km 길이의 강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가나안 지역,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넌 강이지요.

 

요한이 세례의 장소로 요단강을 선택한 것은 매우 상징적인 행위로 보입니다. 물론 정결예식으로서의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했겠지만, 굳이 요단강을 선택한 것은 광야와 약속의 땅 사이라는 상징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는 물속에 온 몸을 담금으로써 단지 정결만이 아니라,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죄로 물든 옛 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상징행위이지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일종의 증인으로서, 지금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위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물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소리가 하늘로부터 났습니다.

 

새번역 성경하늘이 갈라지고라고 번역했으나, 헬라어 단어(스키조메누스)의 본뜻은 찢어지다라는 뜻입니다. 마태와 누가의 평행 본문들은 열다를 뜻하는 보다 일반적인 동사인 아노이게인을 사용하는데, 마가는 보다 거친 톤의 단어를 사용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하늘을 찢고 내려오셨다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하늘 문을 열어줬거나, 혹은 천천히 갈라진 하늘 틈새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성령이 능동적으로 하늘을 찢고 내려 오셨다는 것입니다.

 

정교회는 하늘이 찢어진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찢어진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도 성전 휘장의 한 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23,45).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 사건을 하나님이 하늘 높은 곳에 숨어 계시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 유한한 피조물에 의해, 눈에 보이고, 귀로 들려지기 위해 이 땅의 가장 낮은 곳까지 오신 놀라운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 성과 속을 가르는 모든 장벽을 없애신 것이지요.

 

그렇게 성령은 하늘을 찢고 예수님에게 내려왔고, 이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 되셨고, 그를 믿는 자들은 모두 세례와 함께 성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방언과 예언을 했습니다(19,6). 방언은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전도와 선교를 위한 은사였고(2,4-11), 예언은 미래 예측이 아니라, 현실을 올바르게 보고,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의 은사였습니다.

 

3.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마치 최초의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는 것같습니다. 저녁이 시작된 것이지요. ‘코비드-19의 세계적 대유행은 일상이 되었고, 장기적인 경기침체는 사회적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입양한 16개월 된 딸 정인이의 학대살인사건도 충격적이지만, 정인이의 양부모 모두 목사 자녀들이라는 사실은 더 충격적입니다. 도덕적으로도 인류의 저녁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는 퇴보하고, 기후위기의 충격도 습관과 관습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어디쯤 오고 있는 것일까요? 희망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마가복음서 저자는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는 비둘기 같은 성령의 임재와 함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합니다. 마가가 성령을 비둘기에 빗댄 것은 태초의 창조에서 혼돈과 공허와 깊은 어둠이 지배하는 물 위에 움직이는 하나님의 영이 새와 비슷하다는 표상과 관계된 것입니다(1,2).

그런데 저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 등장하는 비둘기와 더 관련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홍수가 그친 후, 노아는 물이 빠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처음에는 까마귀 한 마리를 바깥으로 내보냈다가, 다음에는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발을 붙이고 쉴 곳을 찾지 못한 비둘기는 방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그 비둘기를 다시 방주에서 내보냈는데, 저녁때가 되어서 돌아온 비둘기는 금방 딴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땅 위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8,6-11).

 

첫 번째 창조의 심판과 파괴 후,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가 금방 딴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돌아온 비둘기에 의해 확인된 것이지요. 죽음이 끝나고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노아에게 두 번째 창조의 시작을 확인해준 비둘기처럼, 비둘기 같은 성령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새 창조를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인해 주는 표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고,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신 성령을 힘입어,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받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현실을 올바르게 보고, 새로운 세상,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계를 만들 과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이미 저녁이 되었으나,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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