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열한째주일
미디어선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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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착하고 신실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
성경구절 사사기 4:1-7/ 데살로니가전서 5:1-11/ 마태복음서 25:14-30
설교자 채수일 목사
예배일 2020-11-15
전주 너희 영혼을 아름답게 하여라(J. S. Bach)
찬양1부 깊은 강(Afro-American Spiritual) 특송: 정록기 집사
지휘자
반주자 채문경 권사
찬양2부 내가 참 의지하는 예수(이현철 곡) 특송: 이예랑 교우
지휘자
반주자 신채우 집사
후주1부 주 너를 늘 지켜 주시리라(W. S. Martin)
후주2부 주 너를 늘 지켜 주시리라(W. S. Martin)
성경본문 사사기 4:1-7
에훗이 죽은 뒤에,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질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솔을 다스리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내주셨다. 그의 군지휘관은 이방인의 땅 하로셋에 사는 시스라였다. 야빈은 철 병거 구백 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하게 억압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 울부짖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의 사사는 랍비돗의 아내인 예언자 드보라였다. 그가 에브라임 산간지방인 라마와 베델 사이에 있는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앉아 있으면,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와 재판을 받곤 하였다. 하루는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납달리의 게데스에서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불러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너는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지파에서 만 명을 이끌고 다볼 산으로 가거라. 야빈의 군지휘관 시스라와 그의 철 병거와 그의 많은 군대를 기손 강 가로 끌어들여 너의 손에 넘겨 주겠다.'"

데살로니가전서 5:1-11
형제자매 여러분, 그 때와 시기를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아니하므로, 그 날이 여러분에게 도둑과 같이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며, 정신을 차립시다. 잠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자들도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 갑옷으로 입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하심에 이르도록 정하여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여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깨어 있든지 자고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십시오.

마태복음서 25:14-30
"또 하늘 나라는 이런 사정과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 그는 각 사람의 능력을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숨겼다.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주인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였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가와서 '주인님, 주인님께서 두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가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1. 하늘나라가 언제 임할지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열 처녀의 비유로 말씀하신(25,1-13) 예수님은, 이어서 재산을 종들에게 맡기고 여행을 떠나는 주인의 비유를 들어 하늘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25,14-30).

여행을 떠나는 주인은 세 종을 불러,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제각기 주었다고 합니다.

주인은 종들의 능력을 알았기 때문에 차등적으로 달란트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맡긴 돈으로 무엇을 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숨겼다고 합니다.

오랜 뒤에, 주인이 돌아오고, 주인은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습니다. 맡긴 돈을 활용하여 재산을 늘린 종들에게 주인은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고 말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게 합니다. 그리고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돈을 맡긴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한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둔 종의 발언에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종의 표현에 의하면, 주인은 굳은 분이어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으로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돈을 맡긴 주인은 무서운 분 일 뿐만 아니라, 마치 냉혹한 사채업자, 혹은 이윤에 눈이 먼 악덕 사업가같이 보입니다. 돈을 늘릴 능력이 없으면, 돈놀이 하는 사람에게 맡겨 이자라도 붙였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비난이 주인을 그런 사람처럼 보이게 합니다.

 

게다가 그에게 맡긴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면서,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으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철저한 시장자본주의자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가톨릭 신학자이자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마이클 노박(Michael Novak,1933-2017)은 이 비유야말로 예수님이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정당화한 성서적 전거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과연 이 비유의 초점이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뒷받침하는 데 있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나라도 무한경쟁과 빈부 양극화가 지배하는 그런 나라일까요? 그래서 가진 사람은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있는 것조차 다 빼앗기는 나라라는 말일까요?

이 비유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돈은 참으로 엄청나게 많은 돈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실제 화폐 단위로 따질 경우 은화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인데, 1데나리온은 시골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시골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최대한 낮게 잡아서) 5만 원으로 본다면, 은화 1달란트는 3억 원에 해당하고, 노동자가 16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서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종들에게 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는 물론 한 달란트도 결코 작은 돈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이렇게 엄청나게 큰 돈을 맡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이 비유를 듣고 있었을 청중들도 놀랐을 것입니다. 이 많은 돈을 도대체 무엇을 믿고 종들에게 맡길 수 있는지 놀라면서, 또 그렇게 하는 주인은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이 비유로써 하늘나라는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나라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 능력 또한 엄청난 것임을 말씀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주목할 것은 두 종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배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돈을 남겼기에 망정이지, 그들은 자칫하면 원금도 잃어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들이 당할 어려움은 어떨 것인지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종은 위험을 무릅쓰고, 어쩌면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큰 모험에 자신을 던진 것이지요.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에 숨겨두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랍비 법에 의하면, 땅에 묻어두는 것이 가장 안전한 도둑 방비책이었습니다. 담보물, 혹은 기탁물을 받은 후, 곧 땅에 파묻은 사람은 (도둑을 맞았을지라도) 배상의 의무를 지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맡은 돈을 보자기에 싸두었다가 도둑을 맞으면 조심스럽게 보관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배상의 의무를 졌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숨겨둔 세 번째 종은, 배상의 의무도 지지 않으면서, 가장 확실하게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세 번째 종은 자기 주인의 기쁨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 자신의 몸을 아끼는 데만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결코 나쁜 악당도 아니고, 부주의한 종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주인이 맡긴 돈을 잃어버려 주인으로부터 비난과 처벌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지요. 그는 주인을 위하여 자신을 던지면서 모험을 하지 못하는 사람, 주인의 기쁨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의 전형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비난을 받습니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기에 게으른 종이고, 모든 책임을 주인에게 돌림으로써 악한 종으로 평가받은 것입니다. 어느 공동체 안에나 게으른 사람은 있습니다. 일하다가 잘못되면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것이 두려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지 몰라도, 공동체의 발전과 도약을 위해서는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악한 일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소에서 교수형을 기다리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동족을 보면서 한 유대인이 흐느끼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뒤에 있던 유대인이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악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게으른 사람이 악()하기까지 하는데 있습니다. 이들은 일이 잘못되면 언제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면서, 자신은 언제나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입바른 소리는 도맡아 하면서, 정작 손해 보는 일에는 뒷전으로 물러나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은 가지고 있는 능력마저 빼앗기고, 빼앗긴 능력은 가진 사람에게 더 주어질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상에서 이미 그런 심판을 받은 악하고 게으른 종은 다시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지옥 형벌을 당합니다(25,30). 마태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는 표현을 비유에 세 번 첨가했는데(22,13; 24,51; 25,30), 이것은 언제나 자신의 죄로 인해 놓쳐버린 구원에 대한 절망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주인이 맡긴 돈을 두 배씩 남긴 종들에게 상금이 아니라, 많은 일, 보다 큰 책임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25, 21-23).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착하고 신실하게 임한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물질적 포상이 아니라, 더 많은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은 일많은 일의 대조를 주목해야 합니다. 힘은 쓸수록 커진다는 말이 있지요. 우리에게 맡겨진 주님의 일이 아무리 적은 일일지라도, 우리가 신실하게 행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종들에게 엄청난 금액의 돈을 맡기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것같이 보이는 많은 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하면, 우리는 마침내 주님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보다 더 큰 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비유의 첫 번째 초점은 인간에게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달란트)이 있는데, 선사된 하나님의 선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과감하게 사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보관해 두는 자는 하나님의 미래의 심판에서 파멸할 것이므로, 그것을 지금 사용해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기쁨은 자기 목숨을 걸고 모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일깨워주시려고 하신 것이지요.

 

이 비유의 두 번째 초점은 하나님은 종들이 두려워하는 방약무인하고 탐욕스러운 대상인(大商人)과 같고,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종들을 심판하는 무서운 분으로 묘사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 도래의 날과 시각을 알지 못하기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열 처녀의 비유(25,1-13)와 최후의 심판 비유(25,31-46) 사이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목하면, 이 비유의 초점은 임박한 하늘나라의 출현에 대한 잘못된 대망을 거부하기 위한 것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밤중의 도둑처럼, 한밤중에 나타나는 신랑처럼, 잔치에서 늦게 돌아오는 집주인처럼, 먼 여행에서 귀가하는 주인처럼 그렇게 예기치 않은 때 도래하기 때문에, 준비 없이 갑자기 엄습당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재림의 지연을 빙자하여, 태만하게 되지 말라는 경고에 그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도래와 함께 곧 역사가 끝날지라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주인을 기쁘게 하는 일을 일상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2.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는 초대교회 안에서 윤리적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재림과 함께 세상이 끝난다는 생각이 일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술에 취해 무질서하게 살게 한 것이지요. 바울은 데살로니가 공동체에 보낸 편지에서 그들을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빛과 낮의 자녀이므로(살전 6,5),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 갑옷으로 입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쓰고’(살전 5,8), ‘서로 격려하고, 서로 덕을 세우면서’(살전 5,11),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하면서, 세상 사람을 대하여 품위 있게 살아야 하고,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이’(살전 4,11-12) 살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주인이 맡긴 달란트로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긴 착하고 신실한 종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 그 때와 시각은 모르지만,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살전 5,2),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면서,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살전 5,15-18)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일상의 삶에 더 철저해야 합니다. 이른바 종말론적 삶이란,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가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살전 5,18).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안전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기쁨을 먼저 생각하고 위험을 무릅쓴 모험에 우리 자신을 던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 여호수아가 죽은 후,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활동했던 여성 예언자이자 사사였던 드보라가 바락에게 가나안 왕 야빈의 군 지휘관 시스라를 치라고 명령할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나안 왕 야빈은 철 병거 구백 대를 가지고 있었고,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하게 억압하고 있었습니다(4,2-3).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야빈 왕에게 겨우 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대적해야 할 바락은 두려웠습니다(4,10). 비록 사사 드보라가 하나님께서 야빈의 군지휘관 시스라와 그의 철 병거와 그의 많은 군대를 기손 강 가로 끌어들여 너의 손에 넘겨 주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예언했지만(4,7), 불안한 바락은 드보라가 함께 가지 않으면 자기도 가지 않겠다고 버팁니다(4,8). 그의 두려움과 불신앙 때문이었을까요? 드보라는 바락과 동행하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정작 바락은 승리의 영광을 얻지 못합니다(4,9).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친 적장 시스라는 바락이 아니라, 야엘이라는 여인의 손에 목숨을 잃습니다.

바락이 정작 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승리의 영광은 얻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과감하게 자신을 모험에 던지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착하고 신실한 종은 자신의 안전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기쁨을 먼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위험을 무릅쓴 모험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지요. 이 모험은 불확실한 미래에 거는 투기(投機)가 아니라, 확실한 미래에 거는 투자(投資)입니다.

 

4. 하늘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도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놓은 보물과 같은데, 보물이 밭에 숨겨져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는 사람과 같고,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사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13,44-46).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잘 모르고,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가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불확실한 현재의 모험에 우리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아니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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